감사함으로 받으면

크라이스트처치 병원에서 도심 쪽으로 진입하다 보면 왼편으로 멋들어지게 신축된 크라이스트처치 법원 건물이 보입니다. 지진 이후에 새로 지어진 이 건물에는 법원뿐 아니라 경찰서도 함께 있어 규모가 상당하지요.

이 건물은 주차빌딩도 따로 있는데 이 안으로 많은 차가 출입하기 때문에 그 일대에 제법 교통량이 있는 편입니다. 게다가 도심 모든 구간은 30Km/h의 속도제한이 있어 그 건물 앞을 지날 때면 속도 내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언제 어디서나 성급한 운전자들은 있는 법. 많은 수의 승용차 운전자들은 이 구간을 그보다는 빠른 속도로 지나가곤 한답니다. 40~50Km 이상의 속도를 내어 내달립니다.

갑자기 등장한 경찰차에 놀라 급제동으로 속도 줄여
어느 늦은 오후였죠. 땅거미가 어스름 내려앉은 그 길을 지나 여느 때처럼 버스를 몰고 도심 터미널 쪽으로 진행 중이었죠. 퇴근 시간 즈음이라 교통량이 꽤 있었는데 모두가 집에 빨리 가고 싶어서인지 많은 차가 30Km 속도제한을 넘어 운전 중이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갑자기 내 앞에 붉은 브레이크 등 쇼가 벌어졌습니다. 앞서가던 모든 차가 일제히 브레이크를 밟으며 속도를 줄였기 때문이었죠. 안전거리 유지를 위해 나도 속도를 줄이며 앞을 내다보니 바로 그 법원 건물 주차장에서 경찰차가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경광등을 켠 경찰차는 아니었지만, 분명히 경찰차였습니다.

그제야 퍼즐이 좀 맞춰지더군요. 속도제한을 어겨가며 격하게 운전하던 운전자들이 갑자기 등장한 경찰차에 놀라 급제동으로 속도를 줄인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동안 운전자들은 제한 속도를 몰랐던 것이 아니라 그냥 시내 감속 주행이 싫어서 속도를 마구 내었던 것이었지요. 그런데 경찰차의 등장으로 행여나 단속에 걸릴까 봐 속도를 줄였나 봅니다.
법은 지키라고 정해져 있는 것인데 그 법을 하찮게 여기다가 집행자가 나타나니 경각을 하게 된 겁니다. 속도를 내어 운전해도 어차피 다음 사거리에서 신호대기를 해야 하는데 무엇이 그리 급한지 모르겠습니다.

이와 비슷한 일은 일반도로에서도 일어납니다. 편도 2차선 이상의 도로에서 일반 차량들은 버스를 아주 우습게 추월해 지나갑니다.

버스는 규정 속도를 넘어설 수 없기에 정속주행을 하게 되고, 버스 때문에 전방 시야 확보가 안 되는 일반 차들이 속도를 내어 버스를 추월하기 때문이죠. 하지만 이 외에도 그냥 평소 주행속도가 60Km 가까이 되는 운전자들이 있습니다.

보통 편도 2차선 이상의 도로들은 곡선 주로가 거의 없어서 많은 운전자가 꽤 빠른 속도로 주행을 하는데요, 그래도 가끔 버스 주변의 모든 차가 정말 착하게 정속주행을 하는 날도 있습니다. 그럴 때면 아니나 다를까, 주변을 돌아보면 으레 경찰차가 눈에 띕니다. 그 길에서 조금 더 빨리 달리면 누가 상이라도 주나 보죠?

안전운전 안내 시스템으로 조금 더 안전하게 운전하게 돼
내가 일하는 레드 버스의 대부분의 버스는 텔레메틱스라는 안전운전 안내 시스템이 있습니다. 일전에 언급한 적이 있는데요, 이를테면 운전자가 안전운전 가이드를 어겼을 때, 혹은 어길 법한 상황일 때, 경보음을 통해 운전자에게 알려주는 기계로 운전자의 안전운전을 돕는 장치입니다.

그런데 이 기계가 툭하면 경보음을 날리는 통에 운전 시 꽤 거추장스러워졌습니다. 코너에서 조금만 격하게 돌면 ‘삐익’, 신호등 앞에서 어쩔 수 없는 제동에도 ‘삐익’, 교통량 때문에 조금 서둘러 출발해도 ‘삐익’, 배차 간격 때문에 조금만 오래 정차해 있어도 ‘삐익’…

잔소리쟁이 운전 조교가 선탑한 차량을 운전하는 것 같습니다. 운전할 때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 기계 덕분에 그래도 조금 더 안전하게 운전하게 되었더군요.

처음엔 정말 어색하고 신경이 많이 쓰였는데, 이제 제법 적응이 된 탓인지 기계가 있는지 없는지도 잘 모르게 느껴질 만큼 안전운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더불어 승객들의 안전도도 높아졌고요. 조금 귀찮지만, 조금 어렵지만 그래도 안전한 게 최고지요.

불편해 보이고 어려워 보이고 귀찮아 보여도 감사의 눈으로 보면 모두 다 우리를 위한 것
경찰차, 텔레메틱스. 오늘 이 두 가지만 예를 들었지만 분명 우리 주변을 보면 나를 귀찮게 하고 힘들게, 또 불편하게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면을 보면 그것 때문에 우리의 안전이 보장되고 질서가 보장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결국은 그 귀찮음이, 그 불편함이 모두 다 우리를 위한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다면 참으로 감사할 일이지요. 결국 시각의 문제입니다. 불편해 보이고 어려워 보이고 귀찮아 보여도 감사의 눈으로 보면 모두 다 우리를 위한 것 아니겠습니까?

간혹 안 믿는 이들이 ‘교회는 왜 그렇게 할 일이 많고, 하지 말아야 하는 것도 많으냐?’고 묻습니다. 교회 안에서조차 이에 동의하는 이들도 많이 있는 듯합니다. 그러나 적당한 신앙은 적당한 열매를 맺게 만들지 않던가요? 적당히 믿고, 적당히 지키고, 적당히 행동해 보니까 어떠하던가요?

적당한 믿음은 적당한 행함을, 그 적당함은 적당한 열매만을 맺게 만듭니다. 달지도 않고 쓰지도 않은 무색무취의 열매. 믿음의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믿는 이들이라면 저절로 감사가 나와야 하지 않을까요?

아이들의 고백 속에 진짜 감사함이 있어
얼마 전부터 우리 가정에서는 그날의 감사 고백을 하도록 정했습니다. 매일 저녁 아이들에게 감사 고백을 해보라 했는데 놀랍게도 아이들의 고백 속에 진짜 감사함이 있었습니다. 나는 그것이 또 감사의 제목이 되더군요. 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나는 사실 일찍부터 돈 버는 것과는 그다지 연관 없는 일들을 해왔기에 아이들에게 남들과 같이 충분한 후원을 못해주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혹 아이들이 다른 집, 친구들과 비교해 불만이 있을 수도 있겠다 싶었습니다.

그러나 불만보다는 감사가 먼저인 아이들을 보며 참 감사했었습니다. 아이들이 한국말이 서툴러 표현은 좀 어색하지만 애써 감사를 표현하는 그 모습이 참 귀하고 아름답더군요. 부족한 이 부모가 보기에도 그렇게 예쁜데 완전하신 하나님 보시기에는 얼마나 더 예쁠까요?

우리에게는 놀라운 초능력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완벽한 감사의 제목들이 지천으로 널렸음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걸 젖혀두고 기꺼이 불평의 제목을 찾아내는 능력입니다. 마치 숨은그림찾기 퍼즐에서 기어이 숨어 있는 그림 하나를 찾아내듯 말이죠.

나는 단언컨대 이 능력은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생명을 건져주셨는데 그 무엇인들 감사하지 않을까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감사함이 없다는 것은 결국 사망에서 나를 건져주신 그 사실을 믿지 못한다는 말 아니던가요? 생명보다 무엇이 더 중요할까요?

한 해를 감사의 마음으로 잘 마무리 하려고 해
한 해를 돌아보니 감사할 것 투성이인데, 어쩌면 완벽한 감사의 제목들은 당연하다 여기고 애써 불평의 제목을 찾아내고 있지는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얼마 남지 않은 한 해를 감사의 마음으로 잘 마무리 하려 다짐합니다. ‘올 한 해를 돌아보니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며 인도하셨기에 참 감사합니다.’라는 마음으로 잘 마감을 한다면 새롭게 열리는 새해에도 새 희망으로, 새로운 출발을 또 다짐할 수 있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