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칙이 있는 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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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칙은 공정한 균형 추와 같다. 따라서 원칙이 정해지면 원칙은 그 누구도 봐 주지 않는다. 누구나 할 것 없이 원칙의 틀 안에서 원칙의 적용을 받아야 한다. 원칙은 오직 원칙을 따르는 자의 편에 서며 그들의 손을 들어준다.

그래서 원칙은 딱딱하고 요령이 없고 답답해 보인다. 원칙은 빠른 길을 놔 두고 힘든 길을 느리고 멀리 돌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원칙을 지킨다는 것은 바보 같아 보인다. 그러나 원칙은 가장 빠른 길이며 흔들리지 않은 최선의 탄탄함이다.

목회를 하면서 뭔가 한 것 같기는 한데 손에 잡히는 게 없고 허탈하다면 원칙 부분을 짚어보아야 한다. 원칙 없이 허공을 긋는 목회를 했기에 남은 것이 없게 되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목사는 주님께서 교회에 세우신 감독자로 양떼를 이끌어 가야 하는 최선봉의 리더이다. 그런 목사가 개인적이든 교회를 섬김에 있어서든 목회적 원칙이 없거나 그 원칙을 지키지 않으면 교회는 부지불식간에 혼란과 불안에 휩싸일 수 있다.

원칙이 무너지면 원칙을 무너뜨린 목사와 교인 그리고 교회가 무너진 원칙에 깔려 힘들어질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목회의 원칙은 목사의 신념이나 개인적 주관이 아닌 성경의 기초 위에 입각한 것이어야 한다. 원칙 있는 목사, 원칙 있는 목회, 원칙 있는 교회는 곧 건강한 목사, 건강한 목회, 건강한 교회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교회를 놓고 이런 말을 하는 것이 부적합해 보일 수도 있지만 실제로 현실에서는‘되는 교회’가 있고‘안 되는 교회’가 있다. 성령께서 역사하고 안 하고의 그런 차원이 아니라 성경적 원칙이 있는 교회와 그 원칙이 무시되고 무너진 교회의 차이가 결국 그렇게 만든다는 것이다.

모든 교회들이 부흥을 위한 계획을 수립하고 방법들을 강구하며 나아가지만 부흥을 향해 가는 길을 단 하나로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교회마다 각각 개별적인 특성이 다르기 때문이다.

교회 안에는 교인 수만큼의 하나님이 있다는 말을 하는데 사람들의 개인적 성향이 강하고 다양하다는 뜻이다. 원칙은 교회 안에서 소수의 의견이나 몇몇의 특성을 무시하고 집단화 시키자는 말이 아니다. 성경적 원칙은 교회를 교회 되게 하고, 궁극적으로 목사와 교인 그리고 교회 모두를 평안하게 하기 위한 견고한 틀이다. 그 원칙을 명문화해서 지켜야 하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모든 일이 원칙대로 지켜지고 행해져야 한다는 인식의 확산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내게는 목회에서 타협하지 않은 원칙이 있는데 철저한 주일 성수를 하지 않거나 십일조를 바치지 않는 사람은 집사나 직분자로 임명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교회 안에 남아 날 사람이 없을 것 같아도 그렇지 않다. 교회를 다닌 기간이나 얼굴을 봐서 자격이 안 되는 사람을 임명하면 그 사람에 대한 선례가 두고두고 교회의 원칙을 흔들게 된다. 물론 직분을 주어서 그 사람이 이전보다 신앙생활을 더 잘하고 교회를 더 잘 섬길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예외다. 현재 섬기고 있는 교회를 비견해서 조심스럽지만 우리 교회는 재적 인원이나 주일 출석 인원이나 거의 차이가 없다. 또한 정직한 십일조를 바치는 사람들이 교회의 재정을 성심으로 섬기고 있다. 나는 이것이 원칙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원칙은 뜨거운 감자와 같다. 원칙대로 하면 불편하다. 일이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파고든다. 하지만 원칙을 버리자니 무분별하고 무질서하게 될 것 또한 자명하다. 원칙을 버리면 원칙을 무너뜨린 것에 대한 대가를 언젠가는 반드시 치르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의 목회는 성경적 가치가 원칙이 되고 상식이 되는 교회를 만드는 일에 전력을 쏟아야 한다.

어떤 상황과 사람에 따라 기둥뿌리가 움직인다면 늘 흔들리는 목회를 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사람이나 상황을 따라 수시로 기초를 뽑아서 움직이면 교회의 밭고랑은 비틀어지게 되어 있다. 원칙은 단순한 운영의 묘가 아니다. 교회의 비전을 보다 더 높이 쌓을 수 있는 기초이며, 더 멀리 날아갈 수 있는 날개인 것이다.

원칙과 관용에 있어 원칙이 먼저다. 법은 원칙이지만 법에도 관용이 있듯이 원칙과 현실에서 조화를 이루게 하는 것이 또한 목회의 기술이다. 마치 율법과 은혜가 조화를 이루는 것처럼 말이다. 값싼 은혜에 만족하지 않아야 하고 율법도 무용지물로 폐기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율법과 은혜 사이에 균형을 이루는 목회를 해야 한다. 원칙대로라면 잘했을 때 상을 주어야 하고 잘못했을 때는 벌을 주어야 하지만 실제로 꼭 그렇게 할 수만은 없다. 왜냐하면 잘했을지라도 견책을 해야 할 때가 있고 잘못했을지라도 책망과 징벌보다 격려와 일으켜줌이 필요할 때가 있기 때문이다.

오래 전 신학교를 졸업할 당시의 일이다. 신대원 3학년 마지막 학기의 학비를 내지 못했는데 형편을 말했더니 학교 측에서 종강할 때까지 학비를 내면 강의를 들을 수 있도록 해 주고 학점으로도 인정해 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학기를 마치고 졸업식이 다가올 때까지 학비를 내지 못했다. 교무처에 사정을 말했지만 ‘안 된다. 미안하다’ 는 행정적인 답변만 돌아왔다. 고심 끝에 학장님에게 면담을 요청하고 어떻게 하면 좋을지를 상담했는데 내 얘기를 다 듣고 나서 학장님은 “공의도 살리고 사랑도 버리지 말자” 고 하시면서 “졸업식에 참석해서 졸업식의 모든 과정에 동참해라. 하지만 졸업장은 미납한 학비를 다 낸 후에 찾아가라” 는 비답을 주셨다.

그리고 후일 나는 학비를 마련해서 납부하고 졸업장을 찾아왔다. 대학부 시절부터 신대원까지 7년의 공부를 마감하는 졸업의 영예와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공의와 인애를 아름답게 조화시켜 주셨던 학장님의 결정과 배려는 주님의 교회를 섬기며 목회해 오는 동안 두고두고 잊을 수 없는 교훈과 감동으로 남게 되었다.

장사에서 남는 이익을 ‘마진’(margin)이라고 한다. 마진은 곧 ‘여유’ 라는 말과 상통한다. 목회가 항상 쫓기고 바쁜 것 같은데 마진이 없는 까닭은 원칙을 무시하고 요령과 임기응변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물론 빠른 상황판단으로 재치 있게 어떤 일을 해 내고 인간관계를 부드럽게 하는 것은 목회에 있어서 중요한 센스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모든 일을 센스 있게만 할 수는 없다. 목회는 이익을 따라 움직이는 사업이 아니기 때문이다.

원칙을 무시하면 그때는 괜찮은 것 같지만 원칙을 무시한 일들은 시간이 지나면 부분적인 보수에서부터 전면적인 개정까지도 해야 하는 난감한 상황에 직면할 수 있다. 성경을 기초로 한 보편적 개념과 원리를 원칙으로 삼아 교회를 섬기면 그 원칙이 목회에 여유를 주고, 임기응변보다 더 큰 목회의 능력을 발휘하게 할 것이다. 원칙은 자신을 수용하는 자에게 그 힘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