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내는 신앙이어야 합니다

윤석목사<주를향한교회>

요한복음1장12절,에스라10장2절-4절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2. 엘람 자손 중 여히엘의 아들 스가냐가 에스라에게 이르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께 범죄하여 이 땅 이방 여자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았으나 이스라엘에게 아직도 소망이 있나니

숟가락을 물에 넣으면 굴절현상이 일어나고, 사막에는 뜨거운 공기로 인한 신기루가 있고, 컴퓨터로는 가짜를 실제처럼 느낄 수 있는 가상현실(VR: Virtual Reality)을 경험합니다.

세 가지는 사실 또는 실제와 다른 것을 보거나 경험하게 합니다. 헛것을 보고 진짜인 줄 착각하거나 변형된 것을 원형인줄 속게 됩니다. 믿음으로 살다 보면 실제도 아니고 사실도 아닌 것 때문에 고민하고 의심하거나, 반대로 믿음을 과신해서 자랑하고 쓸데없이 안심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신앙이 세상에 굴절되고, 가짜를 잡으려는 신기루 같은 믿음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죽어서 가는 곳이라서 현실을 가상현실에서 사는 것처럼 지나가면 되는 삶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믿기만 하면 자동적으로 신앙으로 살아지는 줄 알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살아지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는 것입니다.

신앙은 믿는 것만으로 자동적으로 살아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한복음1: 12). 주님을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권세를 부여해주신 것이 사실입니다. 권세는 “나는∼이다” 와 같은 타이틀이 아닙니다. 권세는 “나는∼을 할 수 있다”는 자녀의 권한, 자녀의 권리, 자녀의 권력 즉 자녀가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이고 권세입니다. 이 권세는 사용하고 발휘할 때 효력이 있는 권력이자 권능입니다.“예수 믿고 하나님 자녀가 됐다”는 신앙의 본질이 아닙니다. “예수 믿고 하나님 자녀로 살 수 있다”가 본질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대신 살아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자녀의 권세를 발휘하면서 자녀답게 살도록 모든 필요를 공급하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공급을 받아서 우리가 살아내야 할 우리의 몫입니다. 이것을 모르고 그냥 믿기만 하고 신앙활동을 열심히 하면 믿음이 되는 줄 압니다. 이런 삶은 하나님 자녀가 아니라 종교꾼일 뿐입니다.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야고보서1: 22) 계시의 말씀인 도는 그대로 살라고 주셨습니다. 주님을 믿는 이유는 믿는 대로 살아서 풍성한 삶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함이 없다”는 말씀은 믿는 대로 살 때 하나님의 뜻이 이뤄진다는 의미입니다. 믿음의 목적은 믿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믿는 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성실하고 충성스럽게 믿음대로 행하게 될 때 믿음이 완성됩니다.

아침에 말씀묵상을 했다고 삶이 말씀처럼 저절로 살아지던가요? 묵상하지 않으면 별로 신경 쓰이지도 않는데 말씀묵상을 하니까 말씀이 생각나고 더 조심스럽지 않습니까? 말씀묵상이나 기도, 찬양, 예배가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만병통치약이 아닙니다. 신앙이 좋은 사람은 신앙활동을 열심히 하는 사람이 아니라 말씀대로, 믿는 대로 의지를 드려 살아내는 신자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단지 믿기만 하고 그렇게 될 줄로 가만히 기다리는 신자는 결코 아무것도 이룰 수도, 얻을 수도 없게 되는 것이 기독교의 신앙입니다. 우리 모두 믿는 만큼 성실하고 충성스럽게 살아내는, 영적 의지로 나의 인간성을 이기고 믿음으로 사는 성도가 됩시다.

신앙은 영적, 육체적 의지를 발휘해야 살아낼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엘람 자손 중 여히엘의 아들 스가냐가 에스라에게 이르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께 범죄하여 이 땅 이방 여자를 취하여 아내를 삼았으나 이스라엘에게 오히려 소망이 있나니 곧 내 주의 교훈을 좇으며 우리 하나님의 명령을 떨며 준행하는 자의 의논을 좇아 이 모든 아내와 그 소생을 다 내어 보내기로 우리 하나님과 언약을 세우고 율법대로 행할 것이라 이는 당신의 주장할 일이니 일어나소서 우리가 도우리니 힘써 행하소서”(에스라 10:2-4)

백성들은 회개했으니 됐다고 생각했지만 에스라는 아닙니다. 입으로 회개한 것을 몸으로 실행해야 회개이기 때문입니다. 바벨론에서 70여년 동안 살았기 때문에 이방여인과 결혼하는 것이 자연스러웠고, 예루살렘에 귀환 했지만 70여년 동안 하던 대로 결혼했을 것입니다. 정황상 이해할만하지만 그렇다고 죄가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아내와 자식을 돌려보내기로 했고 16절부터 조사하고 찾아내어 돌려보냅니다.

예루살렘으로 귀환하고, 성전도 재건하고, 말씀도 선포되고, 회개도 했으니 신앙이 회복된 것 아닙니까? 그런데 에스라는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의지를 드려서 회개한 것을 바르게 고쳐서 행해야 진정으로 회복된 것이고 믿음으로 살게 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아내와 자식을 돌려보내는 것이 절대 그냥 되는 일이 아니라서 백성들은 의지를 발휘해서“내 주의 교훈을 좇으며 우리 하나님의 명령을 떨며 준행하는 자의 의논을 좇아” 일부러 그렇게 했습니다. 이런 행동으로 하나님과 언약을 세우고 율법을 행하겠다고 했습니다. 그 동안 제사와 절기로 율법을 행했고 날마다 하나님께 언약을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는 말로만 형식적이고 의무적이었기 때문에 이제 비로소 의지를 발휘해서 행함으로 언약과 율법을 완성하겠다는 고백입니다.

“오직 의롭게 행하는 자, 정직히 말하는 자, 토색한 재물을 가증히 여기는 자, 손을 흔들어 뇌물을 받지 아니하는 자, 귀를 막아 피 흘리려는 꾀를 듣지 아니하는 자, 눈을 감아 악을 보지 아니하는 자 그는 높은 곳에 거하리니 견고한 바위가 그 보장이 되며 그 양식은 공급되고 그 물은 끊어지지 아니하리라”(이사야 33:15-16).

우리는 높은 곳에 거하고 견고한 바위에 서며 양식과 물이 끊어지지 않는 삶을 열망합니다. 이런 삶은 그냥 믿기만 하면 되지 않고 의롭게 행하고, 정직히 말하고, 억지로 재물을 빼앗지 않고, 뇌물을 받지 않고, 악한 꾀를 듣지 않고, 그리고 눈을 감아 악을 보지 않는 삶을 살기 위해서 극한의 의지력을 발휘해서 일부러 살아야 살게 됩니다.

성경에는 믿고 구원 얻는 것보다 구원 얻어서 신자로 살라는 말씀이 훨씬 많습니다. 구원은 한번 결정하면 되지만, 그 이후는 죽을 때까지 신앙을 살아내야 합니다. 묵상은 말씀대로 살 때 묵상이고, 기도는 기도대로 살 때 기도이고, 예배는 예배대로 살아야 예배가 됩니다. 자동적으로 자연스럽게 되지 않고 영과 육의 의지적 발휘로만 됩니다. 쉽고 자연스럽고 자동은 진리가 아닙니다.
이제부터는 신앙을 살아내려는 의지의 발휘가 필요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우리의 일반으로 얻은 구원을 들어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뜻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유다서 1:3)

믿음의 도를 위해서 자신과 세상과 전통과 선례와 과거와 체면과 명성과 자리와 입심과 지식과 경험과 돈과 싸우고 귀차니즘과 싸워야 합니다. 하나님 자녀의 권세를 발휘하고 믿음의 도를 위해서 신기루와 같은 거짓과 힘써 싸워 기필코 믿음으로 살아내고야 마는 성도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