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에서 렌트비와 씨름하기

런던, 이야기만 들어도 느껴지는 낭만이 있는 도시다. 운치 있는 템즈 강을 사이에 두고 우뚝 서 있는 런던아이와 빅벤을 보는 일은 상상만 해도 즐거운 일이 아닌지.

런던에 산 지 2년이 넘은 지금이야 익숙한 풍경이 되었지만, 종종 그 앞을 지나갈 때면 어떤 식으로든 감상에 젖고야 마는 의미 있는 풍경이다.

런던살이에 이런 낭만만이 가득했으면 좋겠으나, 좁디 좁은 나의 방 한 칸을 생각하면 여기 오고 싶은 생각이 바뀔지도 모르겠다.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첫 렌트 집, 아니 방 렌트 계약을 하던 생각이 난다.

아니 왜 주당 렌트는 뉴질랜드 달러와 숫자가 비슷한 것 같은데, 왜 단위가 파운드인가? 뉴질랜드 돈 2불 정도를 주어야 영국 돈 1파운드를 살 수 있는데, 한 마디로 렌트비가 얼추 2배라는 이야기다.

나의 연봉도 함께 2배가 되었다면 참 좋겠으나, 만약 뉴질랜드에서 10만 불을 벌던 사람이 런던에 온다면 시세에 맞춰 연봉이 5만 파운드 정도가 되어버리니, 이해가 되면서도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런던의 존(zone) 시스템
런던은 중심부인 센트럴 런던을 기준으로 1존을 이루고, 점점 원을 그리며 바깥으로 나가면서 2존 3존이 된다. 마치 등고선처럼 둥글게 잘도 그리며 9존까지 가는데, M25라고 부르는 외곽순환 고속도로(런던 경계를 둥글게 싸매고 있음) 정도까지 원이 넓어진다.

존이 멀수록 시내로 나오는 교통비가 비싸지게 되고, 상대적으로 집값은 내려가는 구조라고 이해하면 쉬울 것 같다. 런던의 우편번호 시스템도 이와 살짝 비슷한데, 이것은 익숙해지면 생각 외로 엄청 획기적인 시스템이긴 하다.

런던 중심을 기준으로 지역을 동(E), 서(W), 남(S), 북(N), 남동(SE), 남서(SW), 북서(NW) 이런 식으로 나눈 다음에 지역 우편번호 3자리를 주고, 그 지역의 주소들을 50-100개씩 세부적으로 그룹 지어 고유 우편번호 3자리를 할당하는 방식인데, 이런 식으로 어디든 위치 파악을 쉽게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노팅힐에 위치한 킹스크로스 한인교회의 우편번호는 W11 2PL 인데, 노팅힐이 런던 서쪽에 있는 11번째 지정된 지역이라 W11을 앞에 쓰고, 2PL이라는 고유번호를 같이 쓰는 50개의 주소지로 좁혀주는 방식이다.

실제로 저 암호 같은 우편번호를 구글맵에 넣기만 해도 교회가 어디에 있는지 단숨에 찾을 수 있으니, 인구가 많고 복잡한 도시의 행정으로서는 굉장히 스마트하다고 할 수 있다.

우편번호 앞자리만 보고서도 부자가 많은 동네인지, 다니면 위험할 수 있는 동네인지 대충은 가늠 할 수 있고, 집 가격이나 렌트비도 어느 정도 예상해 볼 수 있는 런던 생활의 지표가 되기도 하니까. 꽤 흥미로운 시스템이다.

머나먼 이국 땅에서 내 집 찾기
런던에 아무리 집이 많아도 내 마음에 드는 완벽한 곳을 찾기가 어디 쉽겠는가(일단 대부분의 집은 그림의 떡이다). 무언가 마음에 들면 어디선가 불편한 무언가가 나오기 마련이라 살면서 하나씩 하나씩 보완을 해나가는 수밖에 없는 것 같다. 그렇지만 어디든 한번 렌트를 들어가면 최소 3~6개월은 살아야 하기에 신중하게 생각하고 결정해야 한다.

렌트비가 내려가는 것을 생각하며 런던 밖으로 나갔다가 매일 지옥 같은 출퇴근길에 힘겨울 수도 있고(요즘 같은 더위에는 정말 오래 탈 자신이 없다), 자신의 예산에 맞지 않게 너무 좋은 집, 혹은 시내에 가까운 집으로 들어갔다가 통장 잔고를 보며 부들부들 떨어야 하는 경우가 발생하기도 하니까.

같이 사는 플렛 메이트들과의 불화가 일어날 수도 있고, 집주인에게 렌트 사기를 당하기도 하는 일도 가끔 생기니 말이다. 말하자면 끝이 없는 스펙터클한 일들이 가득하다 보니 정신 차리고 꼼꼼하게 챙겨야 한다.

타향살이의 설움이 느껴질 때마다 뉴질랜드 생각이 많이 난다. 그때는 당연하게 누리던 것들이 결코 당연한 것들이 아니었던 것이었던 것을 깨달으면서…

다행히도 영국 정부에서는 젊은이들의 첫 집 마련을 위해 많은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 놓았는데, 그중 Help To Buy라는 제도는 뉴질랜드에서도 벤치마킹하면 좋겠다 싶어서 소개하고자 한다.

이 제도는 쉽게 설명하자면 정부가 실질적인 집 가격을 5년 동안 낮춰주는 방법인데(새로 짓는 집만 가능), 가령 50만 파운드짜리(뉴질랜드 돈 약 100만 불) 투베드 아파트가 있다고 하자.

이 중 구매자는 40%인 20만 파운드를 정부에게 무이자로 5년 동안 빌릴 수 있다. 그리고 나머지 30만 파운드 중 2만 5천 파운드는 예치로 내고 나머지 27만 5천 파운드를 은행에서 모기지를 받으면 집을 살 수 있는 것이다.

더군다나 영국의 이율이 지금 상당히 낮아서, 소득에 따라 다르겠지만 2% 정도의 이율로 대출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모아놓은 돈이 조금 있고 모기지를 받을 수 있는 상황이라면 이 제도를 이용해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일 수 있다.

다만, 영국은 투기를 막기 위해 집을 살 때 구매자가 부동산 가치 따라 내야 하는 스탐프 듀티(Stamp Duty-인지세)가 있기 때문에 집 구매를 제대로 계획하지 않으면 나중에 낭패를 볼 수도 있다.

가치의 싸움
머리를 싸매고 고민고민 하면서 나도 이런저런 계획을 세워 본다. 그러나 아무리 계획을 잘 세우고 계산기를 잘 두드렸더라도 결국 사람의 뜻대로만 인생이 나아가지는 않으니 그것이 곧 인생의 맛이 아닐까. 다만 그저 화장실 개수만 늘리다가 가는 인생이 되지 않기를.

렌트비와 씨름하고 있지만, 사실 우리 모두 가치의 싸움을 하고 있다. 그것들로 우리의 세계관이 드러남을 잊지 않기를, 우리의 스펙트럼이 더욱더 넓어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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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훈
17살 때 가족과 함께 뉴질랜드로 이민. 오클랜드 대학교 상대 졸업. 2016년에 런던으로 이주, 회계사로 일하고 있다. 킹스크로스교회 출석. 지하철(Underground)처럼 보이지 않지만 서로 연결된 런던이란 도시의 이모저모와 느낀 점들을 늦깍이 이민 1.5세의 눈으로 사유하고 소개하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