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스토이의 “바보 이반”

“저 사람이 제 돈을 훔쳤습니다.”
어느 날 사람들이 이반에게 판결을 내려달라고 찾아왔습니다.

“그래? 돈이 필요했겠지 뭐. 그냥 줘 버려.”
이반이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이반이 바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몇몇만 모이면 쑥덕거렸습니다.

“아니, 왕이 뭐 저래.”
“이반은 원래 바보였대, 바보.”

걱정이 된 왕비가 이반에게 말했습니다.
“백성들이 당신을 바보라고 비웃고 있어요.”
“그래? 실컷 비웃으라고 해. 나는 원래 바보였는걸.”
이반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태연하게 말했습니다.

러시아 작가 톨스토이(Leo Tolstoy)가1886년에 발표한 단편소설 ‘바보 이반’(Ivan the Fool)의 한 장면이다.

작가의 정치적 성향인 기독교 아나키즘(anarchism ; 국가 등의 권력, 억압, 강제를 거부하는 무정부주의 사상) 성향이 표출된 작품으로 러시아 귀족들의 탐욕과 무위도식을 비판하고, 땀 흘려 일하는 러시아 농민의 삶을 고무하고 있다.

우선 줄거리를 간략히 살펴보자. 돈 많은 농부가 있는데 그에게 세 아들과 딸 하나가 있다. 큰 아들은 군인 시몬(Simeon)이고 둘째 아들은 뚱보에 장사꾼인 타라스(Tarras)다. 집안 일을 도맡아 하는 이반(Ivan)이 셋째 아들이고, 벙어리인 딸은 밀라냐(Milania)다.

이반은 바보다. 도무지 자기 것을 주장할 줄 모른다. 첫째와 둘째 형들이 하자는 대로 한다. 그의 권리를 악착같이 챙기지도 않고 부당한 천대와 손해도 기꺼이 감수한다.

어느 날 시몬과 타라스가 아버지를 찾아와 재산을 나눠달라고 했다. 아버지가 이반에게 의견을 묻자 그는 흔쾌히 동의한다. 아버지는 둘에게 재산을 떼어줬다.

늙은 마귀(Old Devil)는 이반의 가정이 평화롭게 지내는 게 못마땅했다. 작은 마귀(small devils) 셋을 불러 이반 형제들의 싸움을 붙이도록 지시했다. 세 마귀는 각각 세 아들을 맡았다.

큰 아들 시몬을 맡은 마귀는 세계를 군대로 정복해 왕에게 바치겠다는 야망을 그에게 불어넣었다. 물론 그건 실패하는 길이었고 큰 아들은 감옥에 들어갔다. 마귀는 시몬이 감옥에서 도망치게 한 뒤 곧장 아버지에게 달려가 구원을 요청하게 만들 것이다.

둘째 타라스를 맡은 마귀는 그가 보는 물건마다 죄다 사들이도록 탐욕을 불어넣었다. 빚을 잔뜩 짊어진 타라스도 어쩔 수 없이 아버지에게 달려가 도움을 청할 것이다. 이제 셋째 이반이 두 형을 거부하기만 하면 이반 집안의 평화는 깨져버린다.

그런데 의외의 사태가 발생했다. 바보 이반이 문제였다. 큰 형과 작은 형 가족 모두를 그가 한 집에서 기꺼이 모시겠다며 받아들인 것이다. 작은 마귀들에게 바보 이반은 보통 골칫거리가 아니었다.

워낙 부지런한 이반은 일을 놓지 않았다. 마귀는 그가 일을 할 수 없도록 배에 극심한 통증을 줘봤다. 그래도 소용없었다. 아픈 배를 움켜쥐곤 일을 멈추지 않는 것이었다. 결국 바보 이반에게 정체가 탄로나 붙들린 마귀는 무슨 병이든 낫게 하는 나무뿌리 세 개를 주며 살려달라고 애걸복걸했다.

바보 이반이 마귀에게“하나님께 가거라”하며 놓아주자 마귀는 기겁을 하고 도망쳐 땅에 구멍만 남겼다.

어느 날 바보 이반은 불치병에 걸린 공주를 그 나무 뿌리 덕분에 고치고 부마가 되었다. 얼마 후 왕이 죽자 바보 이반은 그 나라의 왕이 된다. 근데 이반은 왕이 되어서도 도대체 자기 것을 주장할 줄 몰랐다. 바보 이반의 이런 성품 덕에 큰 아들, 둘째 아들도 각자 나라를 하나씩 세울 수 있게 되어 왕이 되었다.

이렇듯 이반 집안이 승승장구하자 이번엔 늙은 마귀가 직접 나섰다. 늙은 마귀는 첫째 아들과 둘째 아들의 탐욕을 부추겨 결국 두 나라가 망하게 만들었다. 늙은 마귀는 최후의 승부처인 이반의 나라로 향했다. 과연 이반은 어떻게 될 것인가?

여기서 잠시 멈춰보자.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이반은 바보다. 그런데도 톨스토이는 현실세계완 달리 오히려 바보가 승리하고 똑똑한 두 형이 실패하는 거꾸로의 스토리를 보여준다.

고린도전서 1:27 말씀을 생각나게 하는 플롯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누군가가 내게 바보라고 말하면 그건 욕이다. 어릴 적 담벼락에 쓰인 바보란 낙서도 욕이었다. 그러나 시인 이문조는 그의 시“바보들”에서 생각을 바꿔보았다.

“바보”는“순수”의 이음동의어/ 모든 것이 돈으로 저울질되는 오늘날 돈도 안 되는 일을 하는 사람들“바보” /그 바보들 틈에서 노는 것이 마냥 즐겁다

바보 이반이 왕인 나라엔 단 하나의 법만 있었다. 그 법은 막내 벙어리 여동생 밀라냐가 정한 것이다. “손에 굳은 살이 박힌 자는 식탁에 앉을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먹다 남은 찌꺼기를 먹어야 한다.”

작은 마귀들 대신 직접 나선 늙은 마귀는 이반 나라에 들어가 이 하나뿐인 법을 공략했다. 손으로 일하는 삶은 어리석은 것이라며 머리를 쓰면 편하게 잘 살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반이 허락하자 그는 광장에 백성들을 모아놓고 머리 쓰는 법을 강연했다.

연단에 올라가 머리 쓰는 법을 열심히 설명했지만 정작 백성들은 고개만 갸우뚱했다. 연 이틀 동안 소리만 지르다 배가 고파진 늙은 악마가 빵을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다. 백성들은 “머리로 빵을 만들면 되지 않느냐?”고 대답했다.

늙은 마귀는 지치고 허기진 끝에 결국엔 비틀거리며 연단 기둥에 머리를 찧기 시작했다. 그러자 백성들은 그가 드디어 머리로 일을 하기 시작했다고 수군거린다. 늙은 마귀는 결국 연단에서 떨어지고 그가 떨어진 땅엔 구멍이 뚫렸다. 그 모습을 보고 바보 이반은 그제야 그 놈의 정체가 마귀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우린 일하지 않고도 호의호식할 수 있는 삶을 동경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그리 살 수 있는 인생을 금수저라 부르며 부러워한다. 소위 흙수저 인생도 단번에 일확천금을 만질 수 있는 로또가 그래서 인기다.

그러나 일에 대한 성경의 입장은 그렇지 않다. 무엇보다 하나님은 아담을 에덴동산에 두시며 그것을 다스리고(work it) 지키는 (take care of it) 일을 부여하셨다(창세기 2:15).

데살로니가후서 3장10절에서“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고 선언한다.
혹자는 이 소설이 육체노동을 북돋우고 머리 쓰는 사무직을 깎아 내리는 것이 아니냐며 오해한다. 그건 단견이다. 우리 사회에서 너무도 쉽게 무시되기 쉬운 육체노동. 이 소설은 바보 이반의 삶으로 대변되는 육체노동이 어떤 상황에서도 무시되지 못하게 방어하고 있을 뿐이다.

톨스토이는 성경적 가치로 살아가는 공동체가 어떤 모습인지, 바보 이반의 삶과 그의 나라를 통해 보여주고 싶어했다.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보기 원하셨던 바로 그 모습을 소설에 담고 싶었을 것이다.

우린 어떻게 살아야 할까. 아담의 에덴처럼 우리 역시 주어진 가정과 일터를 손에 굳은 살이 박히도록 섬겨야 하지 않을까. 감히 단언컨대, 흔히 상상하는 것처럼 천국은 일하지 않고 놀고 먹는 곳이 아닐 것이다. 오히려 그 반대의 나라다. 그 모범을 예수께서 친히 보여주셨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요한복음 5: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