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6년 런던의 크리스마스이브, 행복한 분위기 속에 모두 가족과 연인과 함께하던 그때, 나는 런던을 방문 중인 한 후배 녀석과 함께 보냈다.
나랑 한 학년 차이로 같은 고등학교에 다녔던, 사실 그냥 알고 지내던 동생인데, 커피 쪽 일을 하며 자력으로 영주권도 취득하고 그 업계에선 이미 실력도 인정받은 대단한 녀석이다.
같이 이야기하는데 이런저런 고충을 털어놓는다. 사실 우리 모두 같은 지점에서 고민하고 있다. 서른이 넘으면 뭐라도 하나 이룰 줄 알았는데, 당장 눈 앞에 펼쳐진 살아내야 하는 현실과 인정 할 수밖에 없는 한계만 듬뿍 인 인생이어서 더 그런가 보다.
나름의 격려를 서로 주고받는데 대뜸 나는 잊었던 기억을 꺼내 고맙다고 한다. “전 사실 형 덕에 대학교에 간 거예요.” 예전에 내가 3주 정도 속성으로 Economics 과외를 해준 덕분에 대학 갈 때 필요한 Credit을 다 딸 수 있었다고.
나의 기억 저편 어딘가로 날아가 버린 지난 일이 누군가에게는 나름의 고마웠던 일로 남아있다. 그래도 녀석에게 런던 구경은 시켜 줘야겠다 싶어서 내가 아는 익숙한 길로 데리고 다니며 런던의 야경 속을 걸었다.
우리는 손을 오들오들 떨면서도 계속 꿈을 이야기했고, 언젠가 런던에서 다시 만나자며 헤어졌다.
시간의 끈, 무스비
신카이 마코토의 “너의 이름은(君の名は。)”을 보면, 시간과 기억이란 주제를 기가 막히게 풀어낸 비유가 나온다. 주인공인 두 사람을 결국 이어준 끈, 그것은 바로 ‘시간’이었다.
“끈은 시간의 흐름, 뒤틀리거나 얽히거나 다시 돌아오거나 이어지거나. 더욱 모여 형태를 구성하고 뒤틀리고 얽히고 때로는 돌아오고 또다시 이어지는… 그게 바로 무스비(むすび), 곧 시간이라고.”
시간을 되돌리거나 앞서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우리는 살면서 무언가가 다시 돌아오거나 뒤틀리고 얽히다가도 또다시 이어져가는 경험을 해봤거나 어쩌면 지금도 계속하고 있지 않은지.
우리의 한마디 말과 삶의 작은 활동 하나까지도 소중한 이들에게, 아니 별로 가깝지 않은 이들에게까지 서로 영향을 주며 각자의 인생이 만들어져 간다.
인생은 마치 흐르는 강물과 같아서, 가늠할 수 있었거나 없었던 모든 일이 우연처럼 흘러 들어와 우리 삶을 흠뻑 적셔버린다. 흐름을 거스르려는 나의 어떤 시도조차 내 인생의 한 흐름이 되어 그 강물에 흡수되어 버린 뒤 마치 우리는 그 급류에 실려 표류하는 것만 같다.
그렇게 떠밀리듯이 런던에 들어왔다. 나이 서른이 넘어 몸과 맘에 적당히 힘이 빠진 상태로. 너무 늦은 것 같아 조급했었지만 나중에서야 깨달았다. 그때가 내가 이곳으로 오기에 제일 적당하고 완벽한 타이밍이었던 것을.
그 ‘시간’이라는 ‘끈’이 어쩌면 ‘섭리’라는 이름으로 우연처럼 다가오는 모든 일이 결국 필연 이었음을 깨닫게 한 것은 아닐까?
그 후배가 알려주지 않았으면 몰랐을 런던의 한 카페에 가서 플랫 화이트를 사 마셨다. 런던에 온 지 몇 달 만에 맛보았던 최고의 커피였다.
뉴질랜드에선 너무 당연한 이 맛있는 커피 한잔이 왜 나에겐 감히 구원처럼 느껴지는지.
그렇게 시간의 끈을 이어 가는 것 아닐까? 얽히고설키고 기쁘고 슬프고 마음 아픈 건 사람이기에 영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뒤틀리고 엉키고 때로는 돌아오고 또다시 이어짐을 반복한다 해도 괜찮다. 그러니 작은 것부터 하나씩 하자. 모든 것을 잘하려고 하면 모든 것을 못 한다.
아무 이유 없는 것만 같은 어떤 하루의 미미함 조차도 넉넉함으로 품고 가다 보면 언젠가 다 이어질 거다. 우리의 기억 저편으로 잠시 사라진다 하여도 괜찮다.
당신과 나를 끌어안고 인도해 가는 시간의 끈 ‘무스비’. 우리는 ‘섭리’라고 부르는 그것 아닌가. 하늘이 계속 일하고 있기에……
오늘의 한 조각
지난 3월 짧게 바르셀로나를 다녀왔다. 백 년 전에 살았던 천재 건축가 가우디, 그는 자신의 세계관을 건축물 안에 심어 놓았다. 그가 만든 모든 건축물이 아름다웠지만, 그 중에서도 아직 완공되지 않은 성가족성당(사그라다 파밀리아) 앞에 서 있으니, 마치 우주를 수놓은 별들을 보는 느낌이었다.
성경을 모르는 사람들이 보기만 해도 알 수 있도록 성경의 중요한 사건들을 조각 상들로 만들어 빽빽이 채워 놓았는데, 비슷한 사람 모델을 찾아 일일이 석고로 본을 떠서 제작했다고 한다.
그는 총 건설 기간을 200년으로 잡았다고 하니, 본인이 설계하고도 자신의 생애에 완공된 모습을 못 볼 것을 이미 알았다는 얘기다(하지만 가우디 사망 100주기인 2026년에 완공이 될 예정이라고).
자신의 한계와 현실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훌쩍 뛰어넘어 꿈을 꾸며 살았던 가우디.
그가 추구한 모든 미적 요소들을 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의 생각의 고리에 얕게나마 걸려 조금이나마 그의 철학을 맛보고 돌아온 시간이었다.
현실에 뿌리내려 오늘만큼의 꿈을 꾸어야 맞지만, 그 꿈의 지경은 나의 수명을 넘어설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의 영토는 끝이 없다는 것도 깨달았다.
지금 아무것도 아닌 하나의 행동이, 곧 위대한 일의 시작이 될 수도 있음을, 쳇바퀴 같은 삶 속의 지루함마저도 곧‘은혜’였음을 다시금 되새기면서.
“지금 삶이 힘든 당신,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당신은 이 모든 걸 매일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 대단하지 않은 하루가 지나고 또 별거 아닌 하루가 온다 해도 인생은 살 가치가 있습니다. 후회만 가득한 과거와 불안하기만 한 미래 때문에 지금을 망치지 마세요. 오늘을 살아가세요, 눈이 부시게. 당신은 그럴 자격이 있습니다.”-드라마‘눈이 부시게’中-
순간순간 불안하기만 한 망망대해에 나와 있는 것 같고, 혹여 이 삶의 퍼즐을 끝낼 수 없을지라도 오늘의 한 조각을 찾아서 있어야 할 그 자리에 담담하게 끼워 넣자. 하나씩 하나씩 맞춰가다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멋진 건축물이 완성되어 있을지도 모르니.
그렇게 오늘 하루를 살아내자,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이 값진 하루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