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에 이민 온 지 20년이 되었건만 소위 고속버스는 처음이다. 그것도 너무 급하게 움직이느라 밤에 이동하는 버스 밖에는 자리가 없었다. 그래도 처음 타는 버스라고 긴장을 한다.
나보다도 더 긴장하는 아내와 함께 시내에서 출발하는 버스 정류장으로 갔다. “아니 웬 노숙자들 버스인가?” 허름하고 복장불량인 사람들만 야간 정류장에 기다리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었다. 뉴질랜드 고속버스의 위엄은 차가 도착하자 드러났다. 좌석 번호가 없어서 누구든지 먼저 타는 사람이 좋은 자리에 앉는다.
우리 부부도 떨어져 앉지 않으려면 필사의 노력을 해야만 했다. 그렇게 우리 둘은 겨우 자리를 잡았다. 의자는 뒤로 눕혀지지도 않고 자리도 거의 20년전 한국에서 타던 고속버스와 흡사하다.
“이런 상태로 앞으로 8시간을 가야 한다니……”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그래도 밤새도록 내려가는 버스니까 잠이라도 잠시 자야 한다.
“목사님! 절대로 다른 곳에서 주무시면 안돼요! 저희 집에서 주무셔요. 꼭이에요!”
얼마 전, 큰 딸이 입학하게 된 대학에 기숙사를 구하고 생활터전을 준비해 주기 위해 한번도 가보지 않은 파머스톤노스에 내려갈 일이 생겼다. 새로운 생활을 시작해야 하는 딸은 한참 긴장하고 나도 처음 가보는 곳에서 이것저것을 알아봐 주어야 하니 은근히 걱정이었다. 그런데 그때 정말 구세주처럼 연락을 해온 자매가 있었다.
10년 전, 지금의 교회를 처음 시작하게 되었을 때 그 자매의 아버님께서 제일 처음 나에게 전화를 주시는 등 나에게는 좀 특별한 인연이 있는 가정이다. 한동안 이 자매도 우리 교회에서 찬양을 인도하고 청년부 활동을 했었는데 한 멋진 청년과 결혼해서 이제는 아이 둘을 둔 아줌마 집사가 되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사는 장소가 달라졌는데도 한번씩 연락을 주고 정을 떼지 않더니만 이렇게 어려울 때 먼저 전화를 해서 자기집에서 머물지 않으면 안 된다며 엄포를 놓고 있다.
딱히 갈 곳도 없는 내가 사양할 만한 입장은 아니었다. 그래서 딸을 데리고 그 집에 머물며 며칠을 보냈다. 아침마다 정성스럽게 차려주는 아침을 먹고 이런저런 신앙 이야기를 나누고 웃기도 하고 울기도 했다. 바로 한 달 전 일이다.
그런데 갑자기 그 자매가 뇌수막염 판정을 받고 의식을 잃고는 깨어나지 못한다는 연락을 받은 것이다. 믿어지지 않는다. 정말로 믿어지지 않고 받아 들여지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우리 부부는 병원에 누워있는 그 자매를 직접 보기 위해 밤 버스에 오른 것이다.
“치익~ 치익…끼이익…”
얼마를 잠들었던 것일까? 허리도 아프고 엉덩이도 아프고 잠도 선잠을 자느라 더 피곤한 것 같은데 그래도 고속버스라고 한밤중에 휴게소에 들린다. 잠시 쉬었다 가니 화장실 갈 사람은 가라고 한다.
비록 한국에서는 상상도 못할 말도 안되는 휴게소지만 이렇게 잠시 멈추어 주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다. 잠시 일어나 뻣뻣한 몸을 펴고 기지개를 펴본다.
인생도, 사역도 어쩌면 한번씩 이렇게 쉬었다 가야 할 텐데 우리들은 너무 빨리 달리기만 하는 건 아닐까? 때로는 힘들고 때로는 인생이 뻣뻣해지기 시작하면 한 번쯤 쉬는 것도 오히려 더 유익할 텐데 말이다. 그걸 잘 알면서도 우리 인생은 잘 쉬지 않는다.
그런데 이렇게 상상도 못한 일을 만나면 우리는 잠시 멈추어 선다. 죽음이 우리 인생의 문 앞에 존재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될 때 우리는 잠시 멈추어 서는지도 모른다.
“목사님, 이젠 가능성이 없데요……”
잠시, 아주 잠시 호전되는 것 같은 소식을 들었는데 며칠이 되지 않아 그 자매의 쌍둥이 자매가 연락을 해 왔다. 그 이야기를 들으니 마음이 더 조급해 졌다. 아직 숨을 쉴 때 손을 잡고 얼굴 보고 기도라도 해 주고 싶었다. 어쩌면 목사가 되어 제일 힘들고 목사하기 힘들 때가 이런 순간인지도 모른다.
실제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때…… 고통 받는 가정을 보며 아무 위로도 되지 않을 때…… 나도 속으로 하나님을 원망하며 반항도 해보고 협박(?) 도 해보지만 하나님은 아무런 말씀이 없으실 때…… 이런 무능한 순간이 너무도 자주 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속한 시간은 계속 흘러간다.
드디어 버스가 파머스톤노스에 도착했다. 토요일 새벽이다. 온 도시는 마치 영화에 나오는 죽음의 도시처럼 바람만 불고 아직 아무도 문을 열지 않았다. 큰일을 겪는 자매의 가족들에게 혹시나 피해가 될까 싶어서 한사코 픽업을 마다했는데 막상 새벽에 내리니 갈 곳이 없다.
잠도 덜 깨고 피곤에 찌든 아내를 데리고 맥도널드를 찾아냈다. 우리는 맥도널드에서 간단한 아침을 하며 그곳에서 세수도 하고 단장을 했다. 그리고 병원을 찾아 걷기 시작했다. 지도에서는 짧아 보였는데 한 시간을 걸은 것 같다.
병원입구에서 자매의 신랑을 보자마자 눈물이 쏟아 진다. 우리는 아무 말도 못하고 잠시 길 한복판에서 끌어 안고 울었다. 그리고 간호사의 특별한 배려로 중환자실에 들어섰다.
이름도 모르는 이런 저런 기계들을 달고는 눈을 감고 조용히 자고 있었다. 쏟아지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정말 부르면 지금이라도 일어날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어머니 권사님이 자매에게 이야기를 한다.
“윤경아 네가 제일 좋아하는 목사님이 오셨네. 너 보러 여기까지 오셨네. 눈좀 떠 보렴…”
“목사님! 목사님 웰링턴에 내려오시면 제가 첫 번째 등록 성도 할 거예요!”
“야! 파머스톤 노스에서 웰링턴은 두 시간이나 걸리 잖아. 주일마다 어떻게 거기까지 오려고?”
“ㅋㅋㅋ 걱정 마세요. 애들 다 데리고 남편이랑 갈 거예요. 그러니까 제 자리 찜 해주세요. 제가 목사님 새로 개척하는 교회에 첫 번째 성도에요. 아셨죠?”
나는 새로운 교회를 개척하기도 전에 그 교회의 첫 번째 성도를 잃었다. 세상에 이렇게 재수없고 운 없는 목사가 또 있을까?
고 차윤경자매는 내가 방문하고 돌아간 후 얼마 후에 하나님 품으로 떠나갔다. 윤경자매 장례식에서 나는 너무 혼란스러웠다. 하나님은 내가 개척하는 것을 싫어하시나? 이렇게 든든하고 이렇게 자랑스런 자매를 꼭 먼저 데려가셔야 했을까?
이제 몇 개월이 지나고, 난 그날 아침 윤경자매와 이야기를 나누던 그 비전대로 웰링턴으로 내려간다.
이 땅의 젊은이들이 비록 사는 것 같아도 영적으로 죽어가고 있다고 목사님이 버스라도 타고 빨리 내려오라고 윤경이가 말해주는 것 같았다.
내가 그들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아직도 내 맘속에 남아 있지만 그래도 그곳에서 손을 잡고 얼굴을 보고 기도하고 함께 꿈을 꾸기 위해 결국 결단을 내리고 말았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한복음1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