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애초부터 좋은 엄마 될 자격이 없는 사람이었다. 이 글을 읽는다면 누구든지 좋은 엄마가 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듬뿍 가질 것이다.
고백하건대 나는 ‘아이는 왜 낳아. 우리나라에 인구가 이렇게 많은데’, ‘아이보다 강아지가 더 귀여워.’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그런 내가 육아서를 쓰고 있으니 세상은 참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아이의 사랑스러움과 고귀함을 알아보지 못한 과거의 나를 뉘우친다.
방이 고향인 나는 기차 탈 일이 잦았다. 아이들이 칭얼대거나 우는 소리가 들리면 흘깃 쳐다보곤 했다. 좀 조용히 해달라는 무언의 신호였다. 지금 생각하니 참 기가 막힌다. 그런 내가 지금은 칭얼대는 아이 때문에 복도에서 쩔쩔매는 엄마를 보면 아이 간식을 들고 가 응원한다.
게다가 나는 천성적으로 비위가 약한 사람이다. 한의원에서 꼭 듣는 소리가 비장 위장이 약하다는 것이다. 고기도 조금만 냄새가 나면 잘 먹지 못한다. 임신 후 나의 최대 걱정은 아이가 똥을 싸면 어떻게 하느냐는 것이었다.
지금 6살이 된 딸이 갓난아기였을 때, 나는 아기가 남편 퇴근 무렵 똥을 싸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똥 기저귀를 갈 자신이 없어서였다. 퇴근해 짜증 한 번 내지 않고 기쁘게 기저귀를 갈아준 남편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신통방통하게 저녁 무렵에만 똥을 싸던 은율이가 고마웠다.
그러던 어느 날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은율이의 똥 싼 엉덩이를 맨손으로 씻기고 있었다. 지금도 시어머니의 말씀이 귓전에 들리는 듯하다. “어머, 은율 애미 좀 봐라. 이제는 맨손으로 똥 닦일 줄도 아네.”
나는 손재주가 없다. 청년 시절 교회에서 살다시피 하며 청소년 부를 섬겼다. 어느 토요일, 교사들이 모여 선물 포장을 하고 있었다. “전 포장 같은 건 잘 못 해요.”하며 다른 일을 하려는데 다들 괜찮다며 같이 하자고 했다. 그 말에 자신감을 얻어 포장을 시작했다. 그때 내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던 부장 선생님의 놀란 표정이 떠오른다. “혜진 선생, 진짜 못 하는구나.”
아직도 종이비행기 접기가 헷갈리고 돛단배 접기는 배워도 배워도 내 머릿속의 지우개다. 조립은커녕 내 손에만 들어오면 멀쩡하던 것도 고장이 나고 만다. 그래서 친정 식구 중 가장 큰 피해를 본 사람은 물건 공유가 잦은 친정 언니였다. 언니 물건을 많이 고장 낸 데 대해 이 지면을 빌어 심심한 사과를 전한다.
아이의 믿음 앞에 엄마는 초능력을 발휘한다
임신임을 알았을 때, 여느 엄마들처럼 예쁜 요리, 블록 쌓기, 만들기를 할 수 없다는 데 대한 걱정이 앞섰다. 딸이라는 소식에 더욱 걱정되었다. 그런데 엄마는 뭐든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강한 믿음을 가진 딸 때문에 가끔 초능력을 발휘한다. 얼른 조립해달라는 눈빛을 쏘아대는 딸 앞에서 텐트형 침대를 조립하고 삼각대도 조립한다.
어느 날 빔 프로젝터용 특이한 삼각대를 주문한 적이 있다. 남편이 올 때까지 택배 박스를 숨겼어야 했는데 아이에게 그만 들키고 말았다. 얼른 조립하라고 성화인 아이 앞에서 나는 거실에 엎드려 10초간 간절히 기도했다. 그리고 기적처럼 조립을 하고 그날 아이와 신나게 주토피아를 보았다. 엄마에게 정말 불가능은 없는 것인가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나처럼 좋은 엄마 되기가 힘들 거라 걱정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릴 적을 떠올려 보면 어떨까. 손재주 없는 엄마 때문에 트라우마를 겪었다거나 비위가 약한 엄마 때문에 상처를 받은 경우는 드물 것이다. 하지만 엄마가 나의 말을 귀 기울이지 않아서, 남과 비교해서, 억울하게 야단을 맞아서 속상한 적은 있을 것이다.
아이를 좋아하진 않았다. 그러나 어린 시절의 나, 지금의 나를 만든 가정 환경, 주변 사람들의 성장 배경과 그로 인한 정서와 인격 형성에는 늘 관심의 촉이 있었다. 그래서 서른이 넘어 대학생 때 몸담았던 선교 단체의 뉴질랜드 베이스에서 가족 상담학교 과정을 밟기도 했다.
누구나 좋은 엄마가 될 수 있을까 고민을 한다
내 육아관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이가 있다. 바로 ‘하은 맘’ 김선미 씨다. 동네 도서관에서 그녀의 저서『불량 육아』를 발견하기 전까지 육아서라고 하면 분유 먹이는 법이나 갑자기 아플 때의 대처법 등을 담은 것이 전부라고 생각했다. 두 돌이 안 된 아기를 키우며 쪽잠을 자느라 일분 일초의 잠이 귀했는데 그날 밤새워 그 책을 다 읽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그의 딸은 만 16세에 사교육 없이 명문대에 정시 합격했다. 그것도 중학교부터는 언스쿨링을 하면서. 하지만 내가 그의 육아관을 좋아하는 주된 이유는 자식을 명문대에 조기 입학 시켰기 때문이 아니다. 경쟁이 치열해 청소년 행복 지수가 낮은 한국에서 내면이 단단하고 행복한 아이로 키워냈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도 좋은 엄마가 될 수 있을까에 대해 큰 불안을 가졌다는 것을 보면 좋은 엄마가 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은 누구에게나 있음을 알 수 있다.
육아에 대한 본능적인 두려움
참 놀라웠던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하나 더 하려 한다. 응가 후 엉덩이를 씻겨주고 있었다. 배변 독립 과정에서 수치심이 동반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터라 씻길 때 포옹해 주는 등 애정표현을 많이 해주었다. 그날도 그렇게 씻기고 있는데 아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이었다. 신기해 메모까지 해 두었을 정도다.
“엄마, 나도 엄마처럼 나중에 이렇게 해줄 수 있을까? 아기 낳으면?”
씻기기를 멈추고 아이 눈을 바라보았다. 딸은 고작 45개월, 만 세 살이었다. 그 후 아이의 그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여자로서 장래에 어린 생명의 보호자가 된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깨닫고 있는 것일까?
본능인지 부모의 모습을 보며 학습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자녀를 돌본다는 것에 엄청난 헌신이 따른다는 데 대한 걱정을 아이도 막연하게나마 갖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이 보편적인 걱정이라는 것을 이보다 잘 보여줄 수 있을까. 그러니 걱정하는 자신을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조카 우는 소리만 들어도 스트레스 받는 사람도 괜찮다. 토끼 모양 쿠키를 구울 줄 몰라도 상관없다. 블록 같은 건 해본 적도 없는 엄마여도 안심해도 된다. 나만큼 신체적으로, 심적으로 좋은 엄마가 되지 못할 자격을 두루 갖춘 사람도 없을 것이다. 게다가 난 출산도 늦었다. 38살에 지금의 딸을 낳았으니 말이다. 달리기로 치자면 출발선 한참 뒤에서 뭉그적거리며 딴짓하다가 땅! 소리에 놀라 뒤늦게 출발한 케이스다.
아이를 가졌을 때 나는 늦깎이 대학원생이었다. 기독교 학교인지라 금요일마다 채플이 있었다. 시작 시간에 모두 일어나 찬송가를 불렀다. 임신을 확인한 그날의 기억이 또렷하다. 가을, 하늘색 카디건을 입고 나는 가사가 적힌 스크린 앞 중앙에 서 있었다. 찬송가를 부르며 난 많은 눈물을 흘렸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대가 없이 주시는 은총에 대한 영어 찬송가였다.
‘제가 좋은 엄마가 될 수 있을까요? 배 속의 이 생명을 잘 기를 수 있을까요?’, ‘나는 자격이 없는데 이렇게 귀한 생명을 맡겨 주셨네요.’ 감격과 걱정이 뒤섞인 눈물이었다. 아이를 가진 엄마의 마음이 다 이러하리라 생각한다.
태명을 미라클이라고 지었다. 기적은 나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내 배 속의 아이를 내 손으로 지은 것도 아니다. 기적은 나의 걱정으로 이루어진 일이 아니다. 기적은 그 자체로 완벽하다. 오늘부터 자격 없는 내게 주어진 아이라는 기적 앞에 걱정보다 그저 놀라워하고, 감탄하자. 기뻐하고 감사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