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단을 내려 놓으면 하나님이 보인다

유명한 프렌치 베이커리 공장 두 곳을 3년 동안 청소한 적이 있었다. 시내에 있는 공장은 24시간 가동되었는데, 공장 앞면은 카페로 꾸몄고, 폰손비에 있는 공장에선 냉동 페스트리류를 만들어 오클랜드 전역에 납품했다. 시내에 있는 카페를 오픈해야 했기 때문에 나는 이른 아침부터 청소를 했다.

그 카페는 지역에서 유명했기에 5명의 스텝들은 이른 아침부터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그 직원들 중 사모아 출신의 중년 싱글 자매가 있었다. 그곳에서 일하기 시작한 후, 그 자매를 눈 여겨 보았는데, 그 이유는 그녀가 어디를 가든지 찬송가를 흥얼거리고 다녔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일을 하면서 그녀에 대해 조금 놀라게 되었다. 입으로는‘How great thou art’‘Amazing grace’를 흥얼거리지만, 그녀의 행동에선 그리스도의 모습을 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찬송가를 늘 흥얼거리는 사모안 자매
카페의 스텝들에게는 각자 맡은 담당역할이 있었다. 샌드위치와 롤세미지를 준비하고, 빵을 굽고, 그것을 디스플레이 하고, 페스트리와 여러 종류의 퀴쉬를 오클랜드 전역에 있는 카페에 배송하는 역할들을 나누어 맡았다. 그 카페에는 불문율이 있었는데, 자기 일이 일찍 끝나면 카페가 영업할 수 있도록 서로 서로 도와주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사모안 자매는 자기가 맡은 일을 마치면, 카페 한 구석에서 다리를 쭉 뻗고 휴식을 취하곤 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일하고 있는데 왜 저 자매만 쉴까? 그 이유를 아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 자매는 지독하게 이기적이고 게을렀다. 한 마디로 카페와 공장에선 눈 밖에 난 사람이었다. 아무도 그 자매에게 뭐라고 하지 않지만, 항상 가십의 대상이었다. 그 자매가 부르는 찬송은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되었다.

빵 공장을 청소할 때 순서가 있었다. 우선 사무실을 청소하고, 사무실과 카페 손님이 사용하는 화장실을 청소한다. 내가 사무실에서 청소를 하고 있으면, 사무실 직원이나, 카페 직원들은 내가 화장실 청소를 마칠 때까지 기다려주거나 공장 직원들이 이용하는 다른 화장실을 이용했다. 화장실 안에 환풍기가 없어서 고약한 냄새가 쉽게 빠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화장실을 청소하는 사람을 배려해 나름대로의 호의를 베풀어 주었다. 그런데 이런 암묵 간의 규칙을 깨는 사람이 바로 그 자매였다.

그녀가 부르는 찬송이 상한 마음 위로해
그러던 어느 날 아침, 마음에 너무 힘든 일이 생겼다. “난 여기서 지금 뭐하고 있는 것일까? 지금까지 어떤 인생을 산 것이지?”

아무런 의욕없이 대걸레질을 하고 있던 나의 귓가에 그녀가 지나가면서 부르는 ‘Amazing grace, how sweet the sound…”가사가 들려왔다.

그 자매가 부르는 찬송은 하나님의 위로의 손길로 나를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나의 무너졌던 마음에 하나님의 손길이 닿자 마음이 격해지기 시작했다.

눈물을 참지 않아도 되는 큰 쿨룸(냉장창고)으로 들어가, 나는 한동안 상한 마음을 만져주는 하나님을 경험했다.

예수님을 욕되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 자매의 찬송은 맥 빠진 나를 만지는 하나님의 위로의 손길이 되었다. 그 날의 경험 이후 사람을 바라보는 나의 기준은 변했다. 사람들은 비난할 만한 논리적 이유와 근거를 제시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비난에 관심을 갖지 않으셨다.

하나님의 관심은 상한 마음을 갖고 아파하는 사람들을 위로하는 것이었다. 한 영혼을 격려하기 위해 하나님은 그 누구라도 사용하셨다. 하나님이 사용할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던 그 자매의 찬송이 나를 일으키는 도구가 되었다.

내가 만든 잣대로 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판단하고 있었는가? 누가 한 사람의 성격과 기질을 비난할 수 있을까?

변해야 될 사람은 남이 아니라 바로 나
나를 격려했던 그 사모안 자매는 화장실 청소를 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 나를 밀치고 예전처럼 화장실로 들어가 한동안 나오지 않았다.

그 자매 때문에 나는 청소하는 스케줄을 바꿔야 했고, 시간도 더 걸렸기 때문에 짜증은 났다. 예전 같으면 속으로 욕하며 비난했을 텐데 화가 나지 않았다.

그 자매의 삶의 태도는 한결같았지만, 그 자매를 바라보던 나의 마음이 바뀌었다. 그 자매에 대한 나의 판단을 걷어내니, 그 자매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보였다. 변해야 할 사람은 판단의 대상이 되는 그녀가 아니라, 바로 나였다.

그 동안 그 사모안 자매의 찬송이 계속해서 나를 거슬리게 했던 이유는, 나도 모르는 사이 그녀를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구원받은 한 죄인으로서 주님을 따라가기보다, 목사라는 위치에서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며 그리스도를 따르고 있는 나의 모습이 보였다.

목사라는 직분 때문에 세상에서 비난을 받을 행동을 하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이 나도 모르는 사이, 그 자매에게 투사되었던 것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셨던‘내 눈의 들보(plank)’를 못 보았기에, 그 자매를 판단했던 것이다.

판단을 내려놓으니 하나님 사랑이 보여
그날 이후로 나는“그리스도인이라면 적어도 이런 삶을 살아야 해!”라는 나의 기준을 내려 놓기 시작했다. 가능한한 어떤 판단도 하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형제, 자매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자매를 향한 판단이 점점 멈춰졌고, 그 자매의 아름다운 내면이 보이기 시작했다. 사모아에 있는 가족과 부모님을 사랑하는 마음, 힘들게 번 돈으로 고향에 있는 가족들을 돕는 그 자매 속에 있는 마음이 그대로 나에게 전해졌다.

내 생각, 내 판단, 내 기준으로 쌓아 올린 마음의 벽은 점점 허물어지고, 세상을 ‘이처럼(so)’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보였다.

5년이란 시간이 흘러갔지만, 여전히 판단이란 괴물은 내 안에 꽈리를 틀고는 불쑥불쑥 튀어나오곤 한다. 지금도 나를 향한‘이처럼’의 사랑을 잊고, 간음하다 현장에 끌려온 여인을 향해 군중들과 함께 돌을 들고 서있곤 한다.

‘Amazing Grace, how sweet the sound…’ 흥얼거리는 그 자매의 콧소리가 내 귓가를 스치고 지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