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산에서 있었던 일

김 현목사<왕가누이한인교회>

누가복음 9장28절-36

“이 말씀을 하신 후 팔 일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예수님이 기도하러 산으로 갈 때마다 제자들은 왜 그리도 잠을 자는 걸까요? 오늘 말씀에서도 제자들은 잠을 자고 있습니다. 그것도 예수님의 제자들 중 최 측근이라 할 수 있는 베드로, 요한, 야고보가 말입니다.

오늘 본문의 앞 부분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고난과 죽음, 부활에 대해 언급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십자가를 지고 인자를 따를 것을 상당히 강한 어조로 말씀하셨습니다(누가복음 9:22-27). 그런데 십자가의 죽음을 미리 준비하고 있는 예수님과 달리 제자들은 그 의미를 전혀 실감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다른 곳(마가복음 10:35-45)에서도 보여졌던 바 그들에게는 예수님의 능력에 기대어 한 자리 차지할 생각이 예수님의 죽음보다 훨씬 더 현실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었을까요?

오늘 말씀에 나타난 산상 변모의 사건은 예수님에게는‘별세(exodus)’를 준비하는 사건이었지만, 역설적으로 제자들에게는 자신들의 ‘처세(處世)’의 욕망이 은연중에 드러나는 사건이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의 사명을 이해하지 못했던 제자들은 오늘 본문 뿐만이 아니라 끝까지(겟세마네) 예수님의 기도에 동참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제자 3인방은 기도도 하지 않고 졸고 있는 통에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의 삼자 대화의 핵심을 놓치고 모세와 엘리야가 떠날때 쯤 정신을 차리게 됩니다. 그러니 베드로와 요한, 야고보에게는 자기들의 눈에 보인 것만이 다였던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 역사 상 최고의 인물 중의 하나인 모세와 엘리야가 자기들의 스승인 예수님과 함께 있는 모습이었지요. 그 놀라운 모습을 본 것만으로 그들은 정신을 잃을 지경이었습니다.

누가복음 기자도 베드로가 제 정신이 아닌 이 상황을 놓치지 않고 기록해두었습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33). 아마 ‘우리 선생님이 저 정도였어? 저 분과 함께 있으면 이제 곧 최고의 자리에 올라갈 수 있겠지?.’ 이런 류의 이야기도 정신없이 주고 받았을 듯 합니다. 누가복음 기자는 베드로가 흥분하여 하는 말을 이렇게 전해줍니다.

“선생님, 우리가 여기서 지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우리가 초막 셋을 지어서, 하나에는 선생님을, 하나에는 모세를, 하나에는 엘리야를 모시겠습니다”(33, 새번역).

별세(別世)를 준비하는 예수님 앞에서 처세(處世)를 이야기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황당한 말이었을까요? 모세, 엘리야와 함께 앞으로 닥칠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이스라엘을 출애굽(exodus) 시켰던 것처럼 온 인류를 하나님의 나라로 진입시킬 계획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는데, 그것도 예수님 자신이 유월절 어린양처럼 십자가에 달려 온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피흘려 죽어야 하는 일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는데, 그저 모세와 엘리야가 자기 스승과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 이렇게 좋아하고 있다니요.. 게다가 예수님은 다시 산 아래로 내려가서 구원 사역을 계속해야하는데 여기서 살자니요…

이런 어처구니 없는 상황 속으로 하나님이 개입하십니다. 제자들의 헛소리를 잠재우고 정신을 차리게 하십니다. 산 위에 갑자기 구름이 덮입니다. 갑자기 산에 구름이 덮이는 것만 해도 무서운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납니다. “이는 내 아들이요, 내가 택한 자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35, 새번역). 보이는 것에만 정신 팔려있었던 제자들이 정신을 차릴 수 있도록 해주는 말입니다. 그들 눈에는 자신들의 스승 예수보다 모세와 엘리야가 더 크게 보였던 것입니다. 늘 자기들과 동고동락하며 함께 지냈던 예수님보다 이스라엘의 영웅들이 더 그럴 듯하게 보였던 것이지요. 예수님이 아니라 모세와 엘리야에게 정신이 팔려 있으면 어떡합니까? 실제 중요한 인물은 예수님인데 말입니다.

누가복음 기자는 36절에서 이들이 모세와 엘리야에게 정신이 팔려 있었음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소리가 그치매 오직 예수만 보이더라.” 정신차리고 보니 예수님만 보이더랍니다. ‘우리가 뭘 잘 못 보았나?’ 제자 3인방은 이렇게 생각했을까요? 그 당시에는 아마 그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경험한 후 그들은 자기들이 경험한 사건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른바 변화산 사건이라 불리는 이 기사가 마태, 마가, 누가 복음에 전부 기록이 되어서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는 것이겠지요.

우리는 어떤가요? 우리는 제자들보다 나을까요? 우리는 예수님의 고뇌를 이해하고 있을까요? 피조물의 구원을 위해 지금도 애쓰시고 계시는 예수님의 탄식을 듣고 있나요? 우리를 위해 유월절 어린양의 역할을 감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형벌을 받으셨던 주님의 뜻대로 살고 있나요?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진 채 주님을 따르는 대신, 율법적 신앙(모세)으로 회귀하거나 이적과 기적(엘리야)에 열광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제자 3인방처럼 예수님의 사랑을 이미 받고 있으면서도 예수님보다 예수님으로 얻게 될 물질적 축복이나 세상에서의 지위에 더 관심을 쏟고 있는 건 아닌가요?

하나님은 구름으로 제자들의 시야를 가리셨습니다. 세속에 오염된 눈을 가리셨습니다. 욕심과 욕망의 눈을 가리셨습니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자 하는 그들의 눈을 가리셨습니다. 화려한 광채와 위대한 인물들로부터 그들의 눈을 가리셨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눈을 감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두려움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35).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우리에게 바르게 볼 수 있는 눈을 허락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후 제자들의 눈에 예수님만 보였던 것처럼 말입니다.

이제 어느 덧 대림절의 기다림과, 성탄의 기쁨, 주현절의 광채가 사순절의 수난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사순절의 끝에 부활절이 있음을 압니다. 그 순서를 압니다. 그런데도 가끔 그 순서를 ‘내 삶으로’ 따르고 싶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이 약한 마음을 버리고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내 욕심을 죽이고 내 뜻을 하나님의 뜻에 굴복시키는 십자가의 길이 없이 어찌 부활의 영광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온 몸으로 고난을 끌어안고 십자가로 향했던 주님곁에 잠들어 있던 제자들의 모습은 우리의 모습과 얼마나 다를까요? 세상의 왕으로 우뚝 서신 주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힘있게 펼쳐야 할 우리가 지금도 주님과 한 마음으로 기도하지 못하고 잠을 자고 있다면, 지금도 주님만을 바라보지 못하고 모세와 엘리야를 바라보고 있다면, 지금도 주님의 말을 듣지 못하고 제 욕심의 말만 듣고 있다면, 2천년 전 변화산 위에서 있었던 영광스러운 장면과 함께 자신들의 부끄러운 모습까지 참회하듯 우리에게 전해준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에게 우린 과연 뭐라 말할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