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조절훈련

오래 전 일입니다.

어느 날 아내가 한적한 골목길을 걷다가 누군가 격앙된 소리로 싸우는 듯한 소리를 들었답니다. 그러나 자신의 일이 아니기에 누가 굉장히 화가 났구나 생각하며 그냥 자기 갈 길을 가고 있었는데 그 골목을 다 지나 다른 길로 들어서려 할 때 그 싸우는 듯한 목소리가 분명히 이렇게 말하더라네요.

“너희 나라로 돌아가!”

이 인종차별적인 한마디는 아내로 하여금 그 소리의 출처를 보게 하였고, 아까부터 들려오던 화난 음성이 길가에 정차된 차 안 운전석에 앉은 한 젊은 청년으로부터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만들었죠.

이 일을 제 아내는 저에게 전했고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저도 그 젊은이의 무례함에 화가 났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이내 저는 그 영혼이 참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아내에게 이렇게 제안했습니다.

“우리 그 청년을 위해 기도해 줍시다.”

생각해보면, 그 청년이 얼마나 할 일이 없었고, 얼마나 세상에 불만이 많았으면, 얼마나 자신의 인생이 초라하다고 생각되었으면, 그 아침에 지나가는 힘없는 여인에게 욕을 쏟아 붓고 싶었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그 영혼이 불쌍했습니다.

또 그보다 더 불쌍한 것은 그 청년이 욕을 쏟아 부었던 그 수 분의 시간 동안 그가 내뱉었던 욕의 대부분을 제 아내는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 청년이 쏟아 부었던 그 욕을 오롯이 다 이해하고 머리에 사무치게 듣고 완벽하게 이해한 사람은 단 한 사람, 바로 그 청년 자신이었으니까요.

남을 욕하고 깎아 내리려 했지만 정작 그의 인격적 수준이 떨어졌을 뿐이었고, 욕을 해서라도 스트레스를 풀어보고자 했지만 정작 더 스트레스를 받게 되었을 그 청년이 정말 불쌍했습니다.

남을 욕하고 화를 내게 됨으로써 가장 큰 해를 입게 되는 것은 정작 화를 내는 당사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때문에 저는 매일 운전대를 잡기 전‘오늘도 무사히, 오늘도 차분히’를 위해 기도하며 운전대를 잡습니다. 다른 이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도 않을뿐더러 나 또한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에 분노함으로 하루를 망치고 싶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매일 매일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리라 다짐하며 운전대를 잡지만 뜻하지 않은 분노의 순간 앞에 나약해지는 자신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한번은 노선을 따라 시내버스를 몰고 한적한 거리를 지나가다 갓길에 정차한 소형물탱크 트럭을 발견했습니다. 무심코 그 트럭을 지나 가던 길을 가려는데 그 트럭이 갑자기 제 버스 바로 앞에서 급격한 유턴을 시도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트럭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 속도를 살짝 줄였기에 충돌을 피할 수는 있었지만 급제동은 피할 길이 없었습니다.

버스의 무게중심은 급격히 앞으로 쏠렸고 한 명뿐이었던 할머니 승객은 놀란 가슴을 쓸어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 트럭이 유턴하는 순간 제 버스와의 간격은 그야말로 수 센티미터 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아주 아슬아슬하게 충돌을 피했습니다.

그 트럭의 운전자도 놀랐는지 유턴하지 못하고 남의 집 진입로로 들어가 멈춰 섰습니다. 저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버스 창을 열고 그 운전자의 안전(?)을 묻는다는 것이,

“What the hell are you doing?”
이라고 외쳤습니다.

평소에 욕이라고는 입에 달지도 않을뿐더러 화를 표출하는 것 조차도 늘 조심하는 제 입에서 나온 말은 제 평소 언어습관과는 동떨어진 엉뚱한 욕설이었습니다.

게다가 잘 하지도 못하는 영어로 욕설이라니요? 평상시에는 내 의지로 나의 분을 잘 다스리며 평온을 유지하며 분쟁을 피할 줄 아는 피스메이커가 사명인 줄 알고 살았지만 정작 위기의 순간에서 내 인격의 밑바닥을 드러내는 나의 연약함을 발견하게 된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분노는 일을 망치는 지름길입니다. 특히나 저 같은 운전자에게는 더욱 그러합니다. 분노라는 것은 상당한 에너지가 있어서, 일단 분노가 일면 기쁨, 감사, 온유함 이런 것들은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습니다. 일단 분노를 한번 내고 나면 한동안 그 상태에서 벗어나기가 힘듭니다.

운전 중에 분노하면 또 다른 실수를 유발시키는 원인이 되어 안전을 위협하곤 하기 때문에 저는 되도록이면 분을 다스리려 노력하는 편입니다. 그런데도 갑작스런 위험들 앞에서 이 노력이 허사가 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운전을 하며 길에서 알게 된 사실인데, 뉴질랜드에서는 운전자들이 ‘실수’했을 때에는 대부분 사과를 잘 하는 편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의도적 혹은 습관적 공격’일 경우에는 절대 사과하는 법이 없습니다.

쉽게 말해, 실수로 버스를 보지 못하고 끼어든 경우, 손을 들거나 비상등을 켜고 사과를 하곤 하지만, 끼어들 틈이 없는데도 방향 지시 등도 없이 갑자기 의도적으로 끼어든 차량은 사과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위험을 알리는 신호에 가운데 손가락으로 화답하는 경우가 다반사이죠. 이 가운데 손가락 공격은 심성 착한(?) 저로 하여금 평정심을 잃게 만듭니다. 그 의미가 무엇인지 잘 알기 때문이지요.

그래서인지 처음엔 그 가운데 손가락 하나면 제 하루를 쉽게 망치곤 했는데, 이제는 하도 많은 가운데 손가락을 구경하다 보니 이제 이런 노하우가 생겼습니다.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게 된 것이죠.

“하나님, 저 사람이 지금 저를 모욕하기 위해 그의 가운데 손가락을 제게 보였습니다. 저는 공공재산인 시내버스를 모는 운전자이므로 그들에게 맞중지공격(?)을 하지 않겠습니다. 대신 저의 기도를 들어주세요. 저들이 지금은 저 손가락을 세워 상대를 모욕하고 사람을 죽이는데 사용하고 있지만 멀지 않은 미래에 저들의 저 손가락을 사람을 세워주고 사랑하며 살리는데 사용할 수 있도록 해 주세요.”

중지공격을 당하면 순간적으로 분노가 일지만 이렇게 기도하고 나면 그들의 손가락이 새로워 보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들의 손가락에 저만의 별명을 붙여주었습니다. 복 복(福), 짧은 막대기 규(圭) 자를 써서 ‘복규(福圭, 복을 부르는 막대기)’라고 별명을 지어 부르며 분노를 자제하고는 합니다.

사실 인생사에 사랑하는 이들과 편을 나누고 얼굴을 붉히거나 의절할 정도로 심각한 문제는 별로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역정을 내시고 편을 가르고 남을 깎아 내리는 일을 하신 일이 없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시간이 지나고 보면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일이었는데도) 고집을 피우고 화를 내고 파괴적 행동을 한 적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우리는 영혼구령에 직접적으로 관련 없는 일에 너무나 쉽게 분노하고 화를 냅니다. 영혼구령과 관련된 일에는 관심조차 없으면서 영혼을 살리는 일과 전혀 상관없는 일에 온 힘을 다해 격한 감정들을 쏟아내고 있지는 않은가요?

사람의 마음은 무언가 가득 차면 반드시 넘치게 되는데, 사랑이 가득 차면 사랑이 넘치게 될 것이고, 미움이 가득 차면 미움이 넘치게 됩니다. 내 마음에 미움이 가득 차면 내가 나타내려 하지 않아도 자연히 미움이 드러나게 되더군요. 그러나 내 마음에 사랑과 자비와 이해와 용서가 가득하다면 굳이 드러내려 하지 않아도 사랑이 드러나지 않을까요?

버스기사로서 운전을 계속 하다 보니 시내버스 운전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분노조절훈련’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불특정다수의 사람들을 반복적으로 만나며 다양한 경험들을 하면서 내 감정들을 다스리고 사람들을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기 때문입니다.

내가 만약 다른 사람들처럼 쉬이 화내고 분을 발하면 주변 사람들이 나를 대할 때 조금 더 조심하고 신경을 더 써줄 수는 있겠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랑의 전령은 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주시는 분노조절훈련을 조금 더 받아야겠습니다. 거룩한 분노 외에는, 영혼구원과 관련된 일이 아니라면, 인내함으로 이겨내고 사랑함으로 용서하는 주의 백성이 되고 싶습니다. 그렇게 너그러운 사람, 하나님의 사람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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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진
침례신학대학교 졸업. 크라이스트처치 한인장로교회 교육부서 담당 및 문화사역. 2014년부터 레드버스에서 드라이버로 일하고. 영상편집자로 활동하면서 현재는 성가대지휘자로 섬기고 있다. 사역자와 이민자로서 삶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일들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말씀을 적용하며, 겪었던 일들을 함께 나누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