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교만한 인간을 살리다

인간은 영생의 복보다는 죽기를 각오하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선택한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것보다 죽더라도 나 스스로 하나님처럼 선악을 판단하고 싶은 교만에서 비롯된 것이며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기 보다 자신의 뜻에 따라 살아갈 것을 작정한 것이다.

일단 자신의 뜻대로 살기로 결정한 인간과 하나님은 더 이상 영적인 교류를 할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만 드러내는 결과를 빚을 것이기 때문이다.

부모의 말을 듣지 않는 자식과 같이 살 때 부모의 심정이 어떠한지 잘 알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는 결코 인간이 감당치 못할 것이기에 하나님은 인간을 그냥 내버려 둔 것이다. 이것이 인간에게는 영적인 죽음을 의미하며 불순종에 대한 본질적인 형벌이다.

그리고 이렇게 된 인간을 육신적으로 영원히 살게 할 수는 없어 생명나무로부터 단절시키고자 에덴 동산으로부터 추방이 이루어진다(창세기 3:22-24).

이리하여 인간은 영적으로뿐만 아니라 육신적으로 죽음을 피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됨에 따라 그들의 자식들도 자연히 그런 상태에 놓일 수밖에 없게 되었고 이후 인간들은 하나님을 볼 수도 알 수도 없게 된 채 각자 자신의 뜻대로 살게 되어 하나님이 보실 때 죄와 사망 가운데 놓이게 된 것이다.”

이야기를 듣다 보니 아담과 하와 그리고 에덴 동산의 스토리는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듯 아이들 동화나 인간이 만들어낸 신화나 설화 같은 이야기가 아닌 것 같았다. 거기에는 인간과 신의 분리가 이루어졌던 핵심적 내용이 있었다.

그렇다. 인간이 자기 마음대로 자신의 뜻대로 산다는 것이 하나님과 멀어지게 된 죄의 근원이었고 그것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인간의 본질적인 상태를 규정하고 있다. 인간 사회 내에서도 모든 도덕과 법규를 위반하는 죄의 근원에는 인간의 이기심이 있지 않는가?

이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인간은 감히‘하나님이 어디 있는가?’라는 냉소적 질문을 던질 수 없다. 우리는 자신의 뜻대로 자신의 인생을 살려고 하는 한 하나님을 결코 만날 수 없을 것이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드는 것은 그런 죄 가운데 있는 인간을 왜 계속 존속하게 한 걸까였다. 그래서 물었다.

그럼 왜 하나님은 범죄한 아담과 하와를 즉각 죽여서 인간 자체를 없애지 않으셨는가?

“그것은 이들의 범죄가 사실은 사탄(뱀)의 유혹에 의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즉 이들의 범죄에는 정상 참작의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실제 아담을 만드실 때 하나님은 자신의 영을 불어넣어 그로 하여금 완전한 피조물 거룩한 존재로 만들었다.

이들의 마음 가운데는 스스로 하나님처럼 선악을 판단하고자 하는 교만한 마음이 있었기는 했지만 ‘너희는 결코 죽지 않을 것이며 하나님처럼 될 것’(창세기 3:4-5)이라는 사탄의 거짓된 유혹이 없었다면 그들의 마음을 행동으로 옮기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 있었다.

다시 말해 아담과 하와는 여전히 하나님께 순종할 마음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동산 가운데 두신 이유는 인간을 시험하기 위한 것이었다. 즉 인간 스스로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교만한 마음을 버리고 하나님 뜻에 따라 순종하는 자가 되길 바라신 것이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이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다고 이들을 즉시 죽이고 다른 제 2의 인간, 제 3의 인간을 만든다 해도 이들 또한 동일하게 선악과 시험을 통과할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고 인간을 만든 것은 이들을 죽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들에게 영생을 주어 영원한 복을 누리게 하고자 함이다.

따라서 비록 아담과 하와가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여 그로 인해 그들과 그들의 자손들이 죄와 사망의 지배 가운데 놓여 있더라도 언젠가는 이들을 구원하실 생각으로 이들을 즉각 죽이지 않았고 이들의 자손 또한 멸절시키지 않고 이어지게 하셨다.

애초부터 하나님은 인간이 이 선악과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고 죄 가운데 빠질 것을 아셨고 이들을 그 죄 가운데서 건져내실 계획도 갖고 계셨다. 하나님은 결코 인간의 죄로 인해 그 분의 뜻을 포기하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게 구원할 거라면 처음부터 그냥 용서하고 모든 인간이 영생하도록 은혜를 베풀면 되지 왜 죄와 사망 가운데 빠지도록 내버려 두었다가 건지는 식의 복잡한 과정을 거치는가?

“그것은 무엇보다 하나님의 공의의 측면에서 그냥 용서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너는 네 자식이 잘못을 저지르고 나서 잘못했음을 깨닫고 깊이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지도 않는데 그냥 용서할 수 있는가? 용서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우선 죄에 대한 깊은 회개가 있어야 하고 그에 대해 책임 있는 징벌을 받아야 한다.

회개 없이 징벌만 가해진다면 죄인의 마음은 그대로이기 때문에 용서를 할 수 없다. 회개만 하고 징벌이 따르지 않는다면 그 회개는 단순한 후회에 그치는 것이기에 이 또한 죄를 사해줄 수가 없다. 하나님이 죄 지은 인간을 내치시고 그들을 죄와 사망 가운데 놔둔 것은 하나님이 징벌하기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통해 인간의 마음을 진심으로 돌이키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죄 가운데 있는 인간이 깊은 회개를 하였는가?

“그렇지 않았다. 하나님과 분리된 인간은 더욱 타락하였고 마침내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되어 대홍수의 심판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도 여전히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고자 방주를 통해 노아와 그 가족을 살리셨다. 물론 그 이후에도 인간은 하나님께로 마음을 돌이키지 않고 바벨탑을 쌓는 등의 죄악만 저질렀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를 통해 이스라엘 나라를 세우시고 이들에게 율법을 줌으로써 자신들의 죄를 깨닫게 하셨다. 율법을 통해서 인간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고 그대로 살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 속에서 죄인임을 깨닫게 되었다. 물론 모든 인간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럼, 그렇게 스스로 죄인임을 깨닫고 깊이 회개한 인물들은 사망이라는 형벌을 그대로 받음으로 용서 받게 되었는가? 그래서 그들은 구원되어 영생을 누리는가?

“그렇지는 않다. 그들이 비록 마음을 돌이켜 깊이 회개하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고자 애썼으며 육신의 죽음으로 죄에 대한 형벌 또한 그대로 받아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고 구원과 영생에 대한 약속은 받았지만 아직 구원되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그들이 사망으로부터 건져져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그들의 죄를 원천적으로 없앨만한 대가가 치러져야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들이 겪는 죽음은 그들의 죄에 대한 당연한 형벌이기 때문에 그들은 그 사망의 상태에서 그대로 있어야만 한다. 그들을 그 사망의 상태에서 다시 살리려면 그들을 사망을 경험하지 않아도 되는 무죄한 상태로 만들어야 한다. 그들의 죄를 완전히 사하는 일이 있기 전에는 그 누구도 사망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성경(구약)에 아브라함부터 하나님을 경외하고 따르는 어떤 이스라엘 백성들도 죽었을 때 숨을 거두었다든가 열조에게로 돌아갔다는 표현을 쓰지 천국으로 가서 영원히 살았다고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들을 무죄한 상태로 만들 수 있는가?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흠 없는 양이나 소에게 자신의 죄를 전가시켜 속죄 제물로 삼는 속죄 제사의 과정을 통해 이미 그 방법을 예시하였다. 즉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완전히 죄가 없는 제물이 인간의 죄를 전가 받아 피 흘려 죽음으로써 인간의 죄가 사해지는 그 모형을 보여주신 것이다. 생각해 보라. 하나님이 정말 제물로 바쳐진 짐승의 피와 살이 타는 그 냄새를 즐겼을 것 같은가?

하나님이 무엇이 부족하여 그런 짐승들의 제물을 바치게 하셨겠는가? 그것은 어떻게 해서든 인간의 죄를 덜어주고자 하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며 이런 짐승의 제물은 죄 지을 때마다 바쳐져야 하는 것이지만 이런 과정을 통해 마침내 인간의 죄를 완전히 사할 수 있는 완전한 제물을 하나님 스스로 준비하였음을 보고 깨닫게 하고자 함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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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웅
연세대 졸업. 한국 워킹우먼 전 편집장. 해밀턴 지구촌교회에서 집사로 섬기고 있는데, 2016년 대장암 판정을 받고 2년 여의 항암 투병기간을 보내던 중 자신이 만난 예수를 인터뷰 형식으로 쉽게 풀어 예수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복음의 핵심을 함께 나누고자 이 글을 썼다. 2018년 1월 22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그의 유고를 분재한다.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른 시각의 기사가 실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