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 전쟁, 이스라엘의 멸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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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후 70년 7월 하순, 유대인 달력으로 압월 8일, 유월절 직전부터 4개월 동안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있던 로마 황제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들 티투스는 다음날 새벽 성전을 공격할 것을 전 군대에 명령하였다.

그 다음날인 압월 9일은 약 650년전(BC587년)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을 파괴했던 바로 그날이다. 이제 바야흐로 로마군 총 6만 명과 현지 지원군으로 구성된 네 개 군단은 무너져가고 있는 이 도시에 최후의 일격을 가하려고 한다.

성벽 너머에는 50만명에 가까운 굶주린 유대인들이 생지옥 속에서 살고 있었다. 일부는 광신적인 종교적 열심당원이고 일부는 비적들이지만 대부분은 무고한 사람들이었다.

예루살렘 인구는 약 10만명을 웃돌았지만 로마군이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가두는 바람에 유다 바깥의 지중해와 근동 도처에서 유월절을 맞아 예루살렘에 찾아온 순례자들로 인하여 100만이 넘는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있었다.

로마군의 포위 속에 갇힌 넉 달 동안 이미 거의 절반의 사람이 굶어 죽었다. 죽은 사람의 시체는 성밖으로 던져졌는데 요세푸스에 의하면 그렇게 던져진 시체가 60만명이 넘는다고 한다.

그때 티투스를 돕는 사람 중에 갈릴리 전쟁에서 포로로 잡힌 유대인 장군 요세푸스가 있었다. 그는 티투스의 통역 역할을 하였으며, 이 전쟁의 모든 일을 기록한“유대전쟁사”를 남긴 사람이다.

요세푸스는 유다가 바벨론에게 멸망할 당시에 바벨론에게 대항하지 말고 항복하라고 말하던 선지자 예레미야처럼 유대인들에게 로마에게 저항하지 말라고 끊임없이 설득하고 설득했다. 반란군들은 도망자들을 철저히 감시하여 탈주하려는 낌새만 보여도 즉시 살해하였다.

그런 가운데 탈주한 사람들에 대하여 티투스는 그들이 원하는 곳에 살도록 허가하였다. 탈주자들은 전 재산을 팔거나 값진 보물을 헐값에 팔고 금화로 바꾸어 그것을 입으로 삼켜서 로마군에게 도망친 다음 용변을 보고 거기서 찾아낸 금화로 필요한 것을 구입하였다.

어느 날 로마군의 지원군으로 온 시리아군이 용변을 본 후 배설물에서 금화를 찾는 장면을 발견하였다. 이 광경을 본 지원군과 일부 로마군이 포로로 잡혀 보호되고 있던 탈주자들의 배를 가르고 금화를 찾는 바람에 하룻밤 새 2,000명이 살육 당했다. 티투스는 로마의 명예를 실추시킨 범죄자들을 처벌하려고 하였지만 연루된 사람이 너무 많아 포기하였다.

전쟁의 발단은 로마의 통치정책과 총독들의 부정과 탐욕 때문이었다. 로마제국은 기본적으로 피지배 민족의 문화를 존중하며 통치자로서 균형을 유지했으나, 다신교 문화인 지중해 세계 안에서 그리스나 에스파냐, 갈리아, 북아프리카와는 달리 유대 속주는 일신교라는 독특한 문화를 지닌 지역이었고, 이들은 일신교를 이유로 동화를 거부하며 로마와 끊임없이 마찰을 일으켰다.

39년경 로마의 황제 칼리굴라가 스스로 신을 자칭하며 제국 전역에 자신의 조각상을 성전에 세우게 한 사건이 있었고, 예루살렘 성전 안에 제우스 신상을 세우도록 한 사건이 있었다.

다행히 칼리굴라가 죽어서 황제의 명령은 시행되지 않아도 되었으나 유대인들의 로마에 대한 불복종과 유대인들에게 대한 로마의 반감이 제국 전체로 확대되어가고 있었다.

유대 속주의 총독 가운데 52~66년 사이에 총독이었던 펠릭스(벨릭스), 페스투스(베스도), 알비누스, 플로루스 등 4명의 총독이 착취가 심하였는데, 특별히 플로루스 때에 유대인들의 분노가 폭발하게 되었다.

플로루스는 체납된 속주세 대신 예루살렘 성전에서 금화 17탈렌트를 몰수하고 항의하는 유대인들을 강경하게 진압하였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1탈렌트는 노예 90명을 살 수 있는 값이며(마카베오 하 8:11), 서민 600명의 1년 수입을 합친 것에 해당한다고 한다.

물론 돈의 액수도 많았지만 그보다 더 큰 충격은 성전의 거룩한 보물을 로마가 강탈했다는 사실이었다. 유대인들은 조직적으로 시위하고 봉기하였다.

기원후 66년 시리아 총독 케스티우스 갈루스가 로마군 1개 군단과 아그리파 2세의 지원군을 이끌고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남하하여 예루살렘을 공격했으나, 유대인의 격렬하게 저항하여 로마군 보병 5300명, 기병 480기를 몰살시켰다.

유대인은 기세가 올랐으나 이 패전 소식을 들은 네로 황제는 베스파시우스를 총사령관으로 하여 3개 군단을 보낸다. 유대인들은 요세푸스를 지휘관으로 하는 대규모 병력으로 갈릴리에서 로마군을 맞아 싸웠으나 7개월을 버티다 결국 패배한다.

이때 유대군 사망자가 40,000명, 포로가 1,200명이고, 사령관이었던 요세푸스가 항복하였다. 68년에 네로가 죽고 다음 황제가 갈바, 오토, 비텔리우스로 짧은 기간에 급하게 바뀌면서 전쟁은 중단상태가 되었고, 69년 7월에 베시파시우스가 황제가 된다.

베스파시우스는 유대전쟁의 총사령관으로 아들 티투스를 임명하였고, 70년 봄 티투스가 로마군 4개 군단을 이끌고 예루살렘을 포위하게 된 것이다.

아브월 9일 새벽 로마군이 던진 횃불에 성전이 불타자 유대인들은 목숨보다 소중한 성전이 불타는 모습을 보고 탄식하며 불길 속으로 뛰어들어가 끄려고 하였다. 로마군은 불타는 성전에서 살육을 하면서 그곳에 있던 금붙이를 약탈하였다.

로마의 콜로세움 옆 포로 로마노에 있는 티투스의 개선문에 유대인 포로와 노획물로 황금촛대(메노아)가 부조로 새겨져 있다. 그렇게 성전이 무너졌고, 예루살렘은 로마군에게 점령되고 파괴되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게(마태복음 24:2, 마가복음 13:2, 누가복음 21:6) 철저하게 파괴되고 말았다. 6세기 반 전에 바벨론에 의해 성전이 파괴되었을 때는 50년 후에 다시 재건되었다. 그러나 이 때 무너진 성전은 오늘날까지 재건되지 못하였으며, 유대인들은 잠깐을 제외하고는 거의 1,900년동안 예루살렘을 다시 차지하지 못하다가 1948년에 이스라엘 정부를 세웠다.

로마인 역사가 타키투스는 예루살렘 전쟁에서 사망자와 포로가 모두 6만명이라고 썼다. 한편 요세푸스의 기록에 따르면 사망자가 11만명, 포로가 9만 7,000명이라고 한다.

예루살렘이 함락된 뒤에 예루살렘을 탈출한 유대 저항군은 예루살렘 서남쪽 30km 거리에 있는 헤로디온과 사해 동쪽에 있는 마카이로스, 사해 서쪽에 위치한 마다사 요새로 들어가 농성을 하였다.

로마군은 예루살렘을 공격한 4개군단 중 1개 군단을 보내어 요새들을 차례로 공략하였다. 이중 마사다는 깎아지른 절벽 위에 구축된 천혜의 요새로 3년간이나 항전하였다. 로마군은 절벽을 오를 수 있도록 산을 쌓았다.

마사다에는 2중의 성벽이 있었는데 바깥은 돌로 쌓았고 안쪽은 흙과 나무로 쌓았다. 로마군은 공성 무기로 바깥 성벽을 무너뜨린 후 화공으로 안쪽 성벽에 불을 질렀는데, 바람 방향이 갑자기 변하면서 성벽 전체가 불길에 휩싸이게 되었다.

저항군 지도자 엘르아자르는 이것은“하나님이 의인을 죽인 우리를 벌하는 것이다”고 말하고, 살아서 로마군에게 능욕을 당하고 노예로 사느니보다 자유롭게 기꺼이 죽자고 하여, 남은 사람 모두 자살을 한다. 가장이 가족을 죽이고 남은 가장들이 조를 나누어서 죽여주고, 마지막으로 남은 사람이 스스로 죽었다.

유대인들은 그 요새 안에 1년 이상 버틸 식량과 물과 전쟁물자를 그대로 남겨놓았는데, 그것은 그들이 죽는 이유가 물자가 부족해서가 아니라는 것을 밝히기 위해서였다.

로마의 유대정책은 대체로 관용노선이었으나 이 사건을 계기로 크게 바뀌었다. 예루살렘에 존재하던 대제사장 제도도 폐지되고, 산헤드린공의회도 해산되고, 사두개인은 몰락했다. 군대를 상주시키지 않았던 예루살렘에는 1개 군단과 그 보조병을 합쳐 1만명이 상주하게 되었다.

유대전쟁에서 하나의 특징은 그리스도인들이 전혀 참여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는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과 성전의 철저한 파괴를 예언하였고, 무너진 유대인의 도시가 아닌 새로운 천상의 예루살렘을 그렸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이 군대에 포위되거든 멸망이 가까운 줄 알고 산으로 도망가라는(누가복음 21:20~21)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리스도인들은 예루살렘을 탈출하였다.

620년대에 무함마드가 새로운 종교를 창시했을 때 그는 예루살렘을 향해 예배하고 유대인의 예언자들을 경배하는 유대인의 전통을 가장 먼저 받아들였다. 그 이유는 무함마드에게도 성전의 파괴는 신이 유대인들에게서 축복을 거두어 이슬람에게 하사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이렇게 예루살렘은 그 참화의 잿더미 속에서 현대 유대교뿐 아니라 그리스도교와 이슬람을 위한 예루살렘 성소의 씨앗으로 자리잡았다.

참고자료 1. 사이먼 시백 몬티피오리,“예루살렘 전기”, 시공사 2. 요세푸스,“유대 전쟁사 I, II”, 도서출판 달산 3. 위키백과, 제1차 유대-로마 전쟁 4. 카톨릭신문, 유대인의 이야기(45), (46), (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