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기할 줄도 알아야지’

세살짜리 아이들을 가르치다 보면 아이들에게 가장 많이 듣는 말이 있다. 바로 “내 꺼야”라는 말이다. 국적을 불문하고 모든 아이들은 본인이 손에 쥔 것에 대해 ‘내 꺼’라고 외친다. 다른 친구들이 만지려고 들면 그것을 지켜내기 위해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때론 몸싸움을 시작하기도 한다.

그러나 아이들이 싸우며 지키려는 것들 중에 본인의 것이 있던가? 잠깐 유치원의 장난감을 빌려 가지고 노는 것일 뿐, 세상을 살아가면서 필요한 스킬들을 배우기 위해 이용하는 도구일 뿐, 사실상 아이들 자신의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자신의 손에 쥔 것을 놓지 않으려고 한다. 어른인 선생님이 놓아달라고 해도 종종 절대로 놓아주지 않는 경우도 있다. 겨우 겨우 놓게 된다면 아이는 울고 불고 세상이 끝난 것마냥 울기 시작한다.

종종 아이들을 보다 보면 나름 어른이라고 얘기하는 내가 비춰지는 것 같다. 그냥 나는 어른으로서의 세상이 좀 더 클 뿐이고, 아이들의 세상은 조금 작지만 어차피 사람이 살면서 그 안에서 계속 헤쳐나가야 하는 것들은 5살이나 25살이나 똑같다. 그래서 세 살짜리 아이들이 장난감을 놓지 않는 모습을 보고 내가 내 삶에서 꿋꿋이 놓지 않는 모습들이 보인 적이 있다.

둘 다 가지면 안될까요?
내가 처음 영국행을 택할 때도 그랬다. 부모님은 너무 일찍 독립하려 하는 내가 섭섭하기도 하고 걱정도 많이 되셨을 것이다. 그래서 ‘조금 더 있다 나가보는 것은 어떻겠니?’라고 권하신 적이 있었다.

이제껏 한번도 부모님을 떠나 살아보지 않았던 나는 내심 그냥 오클랜드에 좀 더 남아있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대학을 갓 졸업한 내가 경험도 더 쌓고, 좀 더 커리어가 안정을 찾아가면 나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반면에 한편에서는 ‘지금이 아니면 언제 나가?’ 하는 생각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영국은 늘 내가 좋아하던 나라였고, 런던은 늘 내가 꿈꾸던 도시였다. 기회가 주어진 그 때, 내가 움직이지 않으면 하지 못할 것 같았다. 왠지 편한 현실에 안주하다가 아예 독립을 뉴질랜드 내에서 하게 될 까봐 두려웠다.

조금 미뤘다가 혹여나 누군가를 만나면 어떡하나, 그렇게 누군가를 만나서 지내다가 혹시 내가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루기 시작하면 어떡하나, 터무니없게 들리지만 어떻게 될는지 모르는 게 사람 일인지라 지레 겁을 먹었었다. 그 이후엔 아무래도 책임질 것들도 많아지고, 원한다고 마음대로 할 수 없을테니.

이 두 마음 사이에서 나는 열심히 고민해야 했다. 가족들, 사랑하는 사람들, 나의 안정적인 상황들과 나의 새로운 도전과 꿈 사이에서 둘 다 놓고 싶지 않았던 나는 ‘왜 우리 부모님은 진작에 뉴질랜드가 아닌 영국으로 가시지 않은 걸까.’ 라는 생각을 한 적도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터무니없고 철없는 생각이었다. 욕심이 화를 불러 결국 내가 부모님께서 내게 부어주신 사랑과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든 것과 같은 셈이었다.

그렇듯 내가 돌아봐도 나는 모든 장난감을 원하는 아이와도 같았다. 두 손에 모든 것을 쥐기 원하는. 영국행뿐만이 아니라, 다른 하고 싶은 것에서도 그렇다. 나의 커리어에서도, 내가 떠나는 모든 여행에서도.

포기할 줄도 알아야지,
사람은 살아가면서 많은 것들을 결정하게 된다. 그리고 그 결정이 늘 순탄한 것만은 아니다. 한 아이에게 아이가 원하던 장난감 두 가지를 보여주고 하나만 골라보라고 한다면? 아이는 분명 손쉽게 고르지 못할 것이다. 나 또한 그랬다. 하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았고, 나는 그 모든 것들을 하고자 했다.

그 모든 욕심을 붙잡고 있다가 깨달은 것이 있다. 하고 싶었던 것들이 너무 많았는데, 그 모든 것들을 한번에 붙잡고 갈팡질팡하다 보니 결국 하게 되는 것이 없었던 것이다. 이것 조금, 저것 조금, 작게 작게 움직이다 보니 완성이 되어가는 것은 없었다.

결국 하고자 했던 것들이 하나도 제대로 완성되지 못한 채 하나씩 무너져 내렸다. 그 때 알았다. 아, 한가지에 이제껏 작게 작게 쏟아온 신경과 열심을 다했다면 이미 완성이 되었을 텐데. 사람이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하는구나.

때론 경제적인 이유로 원하던 것을 내려 놓아야 했고, 시간적인 이유로, 육체적인 이유로 한가지를 포기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한가지를 내려놓고 나면 종종 남들과 나를 비교하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은 정말 모든 것을 다 하면서 사는 것 같아 보이고 나는 어떠한 것이 부족해서 하지 못하는 것 같은 그런 자격지심 말이다.

‘포기’라는 말이 듣기엔 굉장히 부정적인 말이다. 사실상 사전적 정의로도 ‘자기의 권리나 자격, 물건 따위를 내던져 버리는 것, 하려던 일을 도중에 그만두어 버리는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무엇을 ‘포기한다’라고 얘기하면 마치 책임감이 없으며, 다른 사람들보다 뒤쳐진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포기한다는 것은 지는 것이 아니다. 가끔은 ‘용기 있는 포기’가 필요하다. 하나를 위해 하나를 과감히 포기하고 나의 선택에 온 마음과 신경을 쏟는 것. 그래서 나의 포기가 옳았다는 것을 보여준다면 나는 그 ‘포기’를 존중하며, 그 용기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나 또한 그랬다. 남들과 같이 가고 싶지만 그렇게 할 수 없을 때, 그래서 그것을 포기해야 할 때, 마치 남들과 비교해보면 나는 그들 뒤에 멈춰있는 것만 같았다. 사실 지금도 종종 그렇게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내가 또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본다면 반대로 남들 또한 내 뒤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한편으로는 또 내가 살짝 뒤에서 걸으면 어떤가 싶기도 하다. 남들과 굳이 같이 갈 필요는 없으니까.

그러나 후회하지는 말자.
두 가지 장난감 중에 한가지를 선택했던 아이는 장난감을 가지고 놀다가 문득 이런 생각을 한다. ‘아, 이거 말고 다른 거 고를걸.’

그렇지만 이미 때는 늦어버렸다. 아이는 이미 선택을 했고 그 선택은 되돌릴 수가 없다. 분명 둘 중에 ‘하나’만 선택하기로 한 것이니까.

우리도 많은 선택을 하고, 또 잠시 뒤를 돌아보며 ‘괜히……’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나 또한 내가 가졌던 고민들 사이에서, 내가 내려야 했던 결정들 사이에서 당당한 때도 있었지만 때론 서럽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 돌아보며 생각했을 때, 어차피 지난 일이며 어떠한 일에서도 나는 후회가 없다. 그 땐 그랬지만, 나의 현재는 또 지금 이대로 멋있게 흘러가고 있으니.

‘괜히……’라고 생각한 적 없다면 거짓말이다. 그러나 혹여 ‘괜히’라는 생각이 들었다면 나는 그냥 거기서 또 하나를 배웠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후회하지 않는다. 사람이 결정하는 것에 늘 맞는 방향만 있는 것은 아니니까. 되려 늘 맞는 방향만 있으면 그것도 재미가 없을 것 같다.

내가 선택하는 것에 있어서 다 맞는 방향인 줄 알았다면, 굳이 ‘선택’이라는 것을 하고 ‘고민’이라는 것을 하는 자유가 주어지지 않았을 테니까.

누군가는 지금도 선택의 기로에 서 있을 것이고, 누군가는 지금도 본인이 원하는 것을 단 하나라도 놓고 싶지 않아, 아주 꽉 붙잡고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본인이 내린 결정이 맞는 길인지 고민할 수도 있고, 아예 본인의 인생이 잘못 흘러가고 있다고 가장 절망적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람은 어차피 모든 것을 다 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배워야 한다. 멋있게 포기할 줄 아는 방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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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수민
12살 때 가족과 함께 뉴질랜드로 이민, 오클랜드대학교 유아교육과 졸업, 킹스크로스교회 출석, 런던에서 유치원 교사로 일하고 있다. 20대에 처음으로 아무도 없는 곳에서 홀로 적응해가면서 보고 느낀 많은 것들을 나누고, 영국이란 나라, 런던이란 도시는 어떤 곳인지 조금이나마 소개하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