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에 네 번째로 남섬 넬슨에 처음 정착한 침례교

복음서 기자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전개하면서 도입 부분에 하나같이 세례 요한을 등장시키고 있다.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누가복음 3장4절).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 했기 때문이다.

뉴질랜드 침례교단의 역사에서도 요한과 같은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평신도인 헨리 쿠퍼 다니엘이었다. 그는 1841년 뉴질랜드 남섬인 넬슨에 정착했다. 그 후 넬슨에 이민자들이 늘자 1851년 교회가 세워졌는데 처음에는 교회 건물이 없어서 길 건너 학교(Campbell’s School, 지금은 The Suter Art Gallery – 초기 집회장소는 지금 신축공사 중이고 인도 한 켠에 조그만 표지석 하나만 남아있다)에서 예배를 시작했다.

두 달 후 최초의 뉴질랜드 침례교 목사인 데시뮤스 도라모아가 도착했다. 그리하여 뉴질랜드 최초의 침례교회는 193 Bridge St. Nelson에 1852년 10월 20일에 빌딩의 기초석을 놓지만 1854년 12월까지 지연된다. 그러나 침례의식은 교회 뒤 강에서 정기적으로 진행됐다.

뉴질랜드 최초의 침례교회 건축돼
점점 부흥되는 과정 가운데 1871년 교회건물 내부수리와 1890년 7월 신축건물을 위한 모금을 시작해서 3년후 205파운드를 모금하고 1896년 11월 18일 기공식 후 입당예배는 1897년 4월 25일 드렸다. 이것이 뉴질랜드 최초의 침례교 역사다.

지금은 건물 자체가 시티 카운슬 지정 보호건물로 지정되어 외부는 하얗게 페인트로 단장하고 넬슨 법원 건너편에 옛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채 서있다. 타운 중심에서는 도보로 5분 거리에 있다.

1880년에는 그 동안 뉴질랜드에 세워졌던 침례교회들이 크라이스트처치에 모여서 컨퍼런스를 하면서 찰스 달라스톤목사의 독려로 Baptist Union(침례교단)을 만들자는 제의를 찬성하게 된다. 이 회의는 1880년 9월 23일 8명의 목사와 7명의 성도가 모였는데 결의된 사항은 향후 정기적인 모임을 갖고 교회개척과 미자립교회 지원을 결정했다.

침례교회들이 정착되고 부흥하자 1882년 웰링턴 컨퍼런스에서 그 동안 성문화 되지 못했던 교단법을 문서화 시키고 총무에 윌리엄 스펜서목사 회장에 찰스 카터목사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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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복음화와 선교사역에 매진해
1932년에는 청소년 사역을 위해서 넬슨에서 최초로 Boys Brigade와 The Nelson Girls’Life Brigade를 조직해서 계속적인 부흥을 가져왔지만 1947년까지는 제2차대전으로 많은 젊은이들이 전장에 나가 교회가 젊은이들이 빠진 슬픈 역사가 있다.

이런 역사의 굴곡 속에서도 교회는 꾸준히 복음을 증거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찰스 달라스톤목사가 그의 목회인생 51년을 회상하며 1934년 강단에서 설교한 시편68편9절 “하나님이여 흡족한 비를 보내사 주의 산업이 곤핍할 때에 견고케 하셨고” 처럼, “처음에는 옥수수 한 웅큼의 미미한 시작이었지만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로 지금도 열매 맺고 있다”고 했듯이 침례교단은 지금 240여 개의 지역 교회와 약 33,000명의 성도로 성장한 교단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한가지 독특한 점이 있다면 지역복음화와 선교를 위해서 교단신학교의 이름까지도 선교사 윌리엄 케리의 이름을 따서 케리신학교라고 명명하고 선교사역에 오늘도 매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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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길
뉴질랜드 구세군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구세군오클랜드한인교회 담임사관.루터의 독일, 장 칼뱅, 츠빙글리의 프랑스와 스위스, 얀후스의 체코, 네덜란드와 벨기에, 존 낙스의 스코틀랜드, 감리교와 구세군의 부흥지 영국, 종교개혁이 넘지 못했던 스페인, 무슬림의 땅 아부다비와 두바이를 답사하여 그들의 사역을 전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