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교회를 사랑합니다

비가 온종일 내린 길, 아직 낙엽이 피지도 않았는데 가을이 창가에 걸터 앉았다. 마음의 쉴 자리를 찾으려고 의자에도 앉고 넓은 일인용 카우치에도 앉아보지만 생각은 모일 뜻이 없는 것 처럼 흩어진 구슬같이 뒹구르고 있다.

생각의 꼬리를 물고 내 작은 방, 조그만 침대 위에 누워봐도 작은 일에 만가지 감정이 난리법석 떨며 일인용 침대, 한구석 공기 빠진 베게 보다 납작하고 작디 작은 내 마음을 긁어 덧나게 한다.

‘왜 그의 고통이 나의 아픔이 되는가?’ 같은 구질구질한 질문을 의미있어 뵈게 왜? 라는 철학기본으로 포장하고 멍청하게 먼산을 보며 사색하고 있는 것 따위는 사치다.

차라리 청년들과 함께 해야 할 진실한 고민은 세상의 어떤 복잡한 철학과 공식들과 신학적 풀이들을 모아봐도 말보다는 참 삶과 행동으로 옮기기가 힘든 말씀, 바로 ‘사.랑.하.기’ 가 아닌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구호로 외쳐봐도 난리 법석난 나의 마음은 원수된 이에게서 떠나 돌이킬 생각을 않는다.

이 진짜 고민은 우리 교회들이 지금도 하고 앞으로도 꾸준히 해야 할 용서, 사과, 배려, 인내와 같은 인품의 성장과 영성 훈련에 기반하는 것이니 10년 후에도 꾸준히 해야 할 고민이다.

교회 사랑하기
주님께서 요한복음의 기록을 통해 누누이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 믿는 자들이 먼저 사랑해야 할 이들이 있다면 주안에서 한 몸된 믿음의 ‘공동체’이다.

사실 10년 후 교회를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는 지금의 교회를 온 힘 다해 꾸준히 사랑하는 것이라 일찍이 답을 찾고, 지금 교회를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를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지금의 교회와 5년, 10년, 20년 후 교회를 동일하게 품는 것으로 사색하는 가을사치는 일단락 해야지 한다. 그러나 사치는 뒤로하고 ‘죽기까지 사랑하기’가 도대체 뭘 의미하는지, 그리고 청년들과 청소년들을 어떻게 하면 더 사랑하려나 하는 고민은 지금 당장 모든 것을 멈추고서라도 해야 할 매우 위급한 상태에 있다.

필자는 사실 이 긴박감을 조성하는 글짓기는 이쯤에서 그만하고 거리로 뛰쳐나가고 싶은 마음이 지금도 가득하다. 그들과 마주앉아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의 음악을 듣고 그들이 걷는 거리를 걷고 싶다.

무엇을 고민하는지. 이야기를 듣다가 빠르게 답 내리는 유치한 일들은 뒤로하고(잠언은 그런 사람을 미련하다 하지 않았는가! 18장) 그들의 고민에 나도 같이 뒹구르며 아파하고 눈물 흘리고 그들의 기쁨에 함께 환호하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싶다.

어쭙잖게 내리는 답들을 가만 들어보면 유치원에서 들었을 법한, ‘횡단보도 건널 때 오른손을 들어라’ 는 식의 변들이 많다. 그런 실수는 필자도 아직 종종 하는 편이다.

허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렇게 미안할 수가 없다. 아니 가만히 이야기를 조금만 더 들어도 이미 내가 내려줄 답들은 다 알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때론 내가 모르는 것들을 그들은 알고 있으며 뛰어난 감각과 실력들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성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말씀해석이 없어서 문제인가? 교회가 없어서 문제인가? 성직자와 청년. 청소년 사역자들이 없어서 문제인가? 도대체 무엇이 우리교회를 이렇게 고령화 시대로 접어들게 하는가?

무엇이 젊은이들로 교회를 떠나게 하는가? 무엇이 그들을 ‘교회를 나가지 않아도 좋다.’라고 생각하거나 ‘교회를 나가지 않으니 좋다.’라고 결론 짓게 하는가? 선악의 문제는 잠시 접어두더라도 이문제의 현실적인 문제는 공동체의 부재라고 진단하고 필자는 영적인 씨름을 해보려고 한다.

공동체는 듣는다
공동체로서의 몸된 오늘날의 그리스도의 교회는 젊은이들에게 듣는다는 이미지보다는 빨리 답을 내리려 한다는 이미지가 더 강하다고 한다. 왜 그런가를 생각해보니 그럴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길과 진리가 되신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로서 우리는 확실한 길을 가진 자들이다. 내가 아는 것에 확신이 차 있으니 내 확신 있는 말을 들어보라는 식의 답변들이 많다는 것이다. 모두가 말은 하지만 듣지는 않으니 말하는 교회에는 듣는 공동체성이 사라져 버린다는 것이다.

교회는 공동체로서 몸으로, 지체로 부르셨다. 그러나 이는 균형이 필요한 매우 심오한 일이다. 사도 야고보는 우리에게 말하기를 더디 하라고 야보고서 1장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필자는 이를 말을 하지 않는 것으로가 아닌 ‘잘 듣기’ 로 해석해야 문맥이 맞는다고 보고 우리의 입장을 분명히 해야 한다. ‘나는 공동체의 눈물을 듣겠습니다.’ ‘나는 형제의 어려움을 내 마음 깊은 곳까지 끌어당겨서 듣겠습니다.’ ‘한 시간이든 두 시간이든 당신의 이야기만을 들어보겠습니다.’ 하는 이들을 찾기가 참 어렵다. 공동체라는 이름은 많지만 듣는 공동체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또 다른 한 그룹은 말하는 것이 익숙한 사회에게 경쟁하다 온 이들이다. 그들에게 이해관계가 생기기전 나의 확신 있는 목소리를 들려주면 자신의 죄가 아무리 주홍 같더라도 진심 어린 회개와 회심을 이루는 발판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교회는 죄인들이 와서 기도하는 하나님 아버지의 집인데 시장바닥 같이 듣는 이 없이 이기적인 자기 얘기만 떠들어대는 장터로 만들어 버린다면 기도하는 여린 마음들, 눈물로 간구하는 간절한 영혼과 그 마음 마음 모아 회심으로 이끄는 영혼 구원의 장은 온데간데 없을 것이다.

야고보서 1장 19절은 그래서 들으라고 한다. 성내지도 말고 말하기는 아끼고 ‘잘 듣자’고 한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그때에 우리는 이러한 공동체를 넘어 진정으로 이사회를 품을 수 있는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글을 급히 바꾸어 달리 써보면 이렇다. 세계는 꾸준히 변화하여 성장해 왔고 지난 어떤 세기보다 지금 더욱 빠르게 성장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특히 글로벌 하게 변하고 있는 시대에 살면서 사도들 이후로 복음은 가장 왕성하게 서 있는 동시에 문명의 위협도 매우 급박하게 도발하여 교회의 담을 넘어 다가오고 있다.

이제 신앙의 순수함을 지키고 복음의 생명력을 나누고 전하기 위해 이러한 21세기 국제상황은 젊은 신앙인들의 도전 과제이다. 다양한 과제들이 있겠지만 몇몇 주요 관점들로 이 시대를 그려가는 근본적인 세계 흐름들을 진지하게 살펴보아야만 한다.

이슬람은 결국 현대화 될 것인가? 다시 말해 표현의 자유를 받아 들이고 시대의 관대하게 받아 들일 것인가? 20세기 중국을 이끌어온 공산주의를 대체 할 사상개념은 무엇이 될까? 자본은 중국을 변화시킬까? 결국 기독교는 중국의 대표 종교가 될 것인가? 같은 질문들이다. 위 질문들은 한 변증가가 필자가 참여한 강연회에서 던져준 질문들이다.

젊은이 교회는 먼저 자신의 공동체의 공동의식을 살피고 그 내면으로 걸어 들어가지 않는다면 흩어진 구슬처럼 구석에서 먼지만 쌓여 밖의 일을 돌볼 힘을 잃고 말 것이다.

오, 우리는 사도의 말씀과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말씀을 듣고 가슴을 치며 우리의 이기적인 생활 습관을 뿌리부터 바꾸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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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운
레이드로칼리지와 감신대 신대원을 졸업하고 세인트폴 교회에서 지원사역하며, 연재하는 상반기 동안에는 세계의 다음세대 리더 만나 선교와 교회에 대한 주제를 나누고, 하반기에는 한인 차세대 리더 만나 한인사회와 다민족 사역 동기와 환경 그리고 어려움과 열매에 대한 생생한 이야기를 듣고 독자들과 진솔하게 나누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