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같은 크로아티아

고등학교 다닐 때인가 싶은데요. 중간고사 기말고사 그런 시험이 끝나면 단체로 영화를 보던 시절이 있었지요. 그때쯤 인가 봐요. 영화 록키를 보고 자리에서 한참을 앉아있었습니다. 아니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우르르 몰려나가면서 영화에 대해 이러고 저러고 얘기하고 싶지 않아서요.

그리고 나서 그런 일은 자주 있었습니다. 좋은 연극이나 영화는 물론이고 책도 그렇습니다. 진짜 좋을 때는요. 같이 보러 간 사람한테도 말하지 말아달라 합니다. 그래서 혼자 많이 다니기도 했지요. 영화를 보고 나서의 오랜 침묵은 섣불리 말로 그 감동을 담고 싶지 않은 이유이고, 어느 것으로도 표현하지 않은 채로의 뜨거움을 가슴에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은 나의 마음입니다.

크로아티아와 이탈리아 여행을 하고 뉴질랜드로 돌아와 Lock down 기간이 길어지면서 자연스럽게 갖게 된 긴 침묵의 시간을 갖고 보니 이제는 오히려 말하고 싶어지게 되었습니다. 크로아티아 여행이 얼마나 근사했는지, 그 바다가, 그 마을이, 그 폭포와 호수들이 나한테 얼마나 심하게 부딪혀 와 닿았는지를요.

자그레브에서 차로 두 시간 정도 가면 도착할 수 있는 국립공원 플리트 비체는 거의 비어있었습니다. 계절도 비수기라 그렇지만 코로나 정국이 막 시작될 때라 평소엔 관광객들이 바글바글 하다던 그 어마어마하게 큰 공원엔 나 혼자만 있는 느낌입니다.

처음 걷기 시작할 땐 괜찮았던 날씨는 좁은 산책로에 들어서니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합니다. 물안개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갈수록 굵어지고 우산도 우비도 없는데 점퍼에 달린 모자를 쓰고 홀딱 젖으면서 걸어갑니다.

그 공원은 산 위에서부터 계곡을 따라 물이 흘러 내리다가 호수를 만들고 어떨 땐 한 계단 내려오듯이 내려와 또 호수를 만들고 어떨 땐 급하게 떨어져 폭포가 되고 그렇게 흐르다가 또 호수가 되곤 하는 곳입니다.

그 길을 아래에서부터 물길을 따라 만들어진 좁은 산책로를 걷습니다. 물을 내려다보는 높이가 아니라 물이랑 거의 같은 높이의 길이라 한 걸음만 옆으로 디디면 물에 발을 담글 수 있을 정도입니다.

아주 위험한 곳 몇 구간을 제외하면 난간이나 펜스도 없어서 비까지 내리는 그날 나는 물을 첨벙첨벙 걷는 듯했습니다. 끝도 안 보일 만큼 커다란 호수에서는 배를 타고 건너갑니다.

크고 작은 호수들이 100여 개나 된다는 그 공원은 산세도 웅장해서 영화 아바타의 배경 이미지의 모티브가 되었다고 해서 유명한데요. 국립공원 플리트 비체는 이름이나 유명세보다 훨씬 아름답고 더 많이 근사합니다. 물소리, 빗소리에 머릿속도 단순해지고 오롯이 내 앞으로 난 좁은 길을 따라 걸으면서 무척 행복했습니다.

무엇이 나를 이곳으로 데려왔는가, 무엇이 이 고즈넉하면서도 고독한 이 길로 밀고 왔는가 생각도 잠깐 합니다. 그리곤 곧 금방 벅차게 행복해집니다.

영화 ‘록키’의 마지막은 무명의 권투선수 록키가 경기는 졌지만 너무 잘 싸운 경기를 끝내고, 링에서 상대 선수에게 많이 맞아서 퉁퉁 부어 잘 떠지지도 않는 눈에 여자 친구의 모습이 보이니까 이름을 마구 불러댑니다. 아드리안 아드리안!

이번엔 아드리아해를 보러 두브로브니크로 떠납니다. 비행기를 타려고 간 자그레브 공항은 휴양지 카페 같은 곳이었어요. 화창해진 날씨에 노천카페에 앉아 여유 있게 브런치를 먹습니다.
혼자서 여행을 하게 된다면 처음으로 가보고 싶은 데가 지금 내가 가려는 크로아티아의 남쪽 바닷가 도시 두브로브니크였습니다.

기대한 만큼 실망도 크다고 하니 그렇다고 기대를 하지 말까요? 그럴 순 없잖아요.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실망할지도 모르니까 겁이 나기도 했습니다.

드디어 두브로브니크 공항에 내려 숙소로 가는 길은 해변 도로 같이 왼쪽으로는 아드리아 바다가 그야말로 파랗게 펼쳐있고 바닷가에는 너무나 인상적인 빨간 지붕의 집들이 그림엽서처럼 보입니다.

도착한 숙소는 앱에서 예약한 건데 사진으로 본 것만큼 따뜻하고 깨끗하고 무엇보다 창으로 바다가 보입니다. 그 창으로 밤바다도 보고 비 내리는 바다도 보고 환해지는 아침 바다도 창에 턱을 괴고 서서 보았습니다. 이른 저녁도 먹고 시내 구경도 할 요량으로 바닷가 쪽으로 내려갑니다.

두브로브니크

그 도시는 여느 유럽의 도시처럼 오랜 역사가 있는 곳입니다. 건축물이나 성당 그리고 성벽으로 둘러싸인 올드타운은 아무렇게나 사진을 찍어도 근사한 중세도시의 느낌이 나는 너무 멋진 곳입니다.

올드타운을 둘러싸고 있는 뉴타운도 너무 잘 어우러지게 조성이 되어서 돌계단, 커다란 문, 성 같은 담장, 빨간 지붕으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도시 전체가 하나의 커다란 영화 세트장 같습니다. 실제로 미드 ‘왕좌의 게임’ 촬영지로도 유명하답니다.

올드타운으로 들어가는 문이 필라 게이트인데 그곳에 3일 지내는 동안 그 문을 열두 번도 넘게 드나든것 같네요. 필라 게이트 근처에 바다가 보이는 노천카페에서 오래 앉아 있습니다. 절대 잊을 수 없는 순간을 길게 늘여볼 소망으로요. 숨이 턱 막히고 코끝이 찡해서 선글라스를 씁니다. 눈시울이 뜨거워지도록 너무 좋습니다.

올드타운의 메인 도로는 플라차 거리입니다. 대로변에는 각종 상점과 카페 식당들이 있지만 골목골목 빨래가 널리고 가로등에 불이 켜지는 걸 보며 그저 관광의 대상이 아니라 그들의 삶의 주체로서의 사람이 보입니다.

성벽으로 문이 나 있는 집도 있고 농구 코트가 바닥에 그려져 있고 광장에서 공 가지고 노는 어린이들이 보입니다. 앙증맞은 가방을 메고 엄마랑 하교하는 여자아이는 돌담으로 된 어느 골목 담처럼 있는 커다란 철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갑니다.

올드타운을 둘러싸고 있는 성벽을 투어 하는 입장권을 사서 올라가 두 시간 정도를 걸으면서 그 오래된 도시를 구경합니다. 안쪽으로는 도시가, 바깥쪽으로는 아드리아 바다가 보이는 성벽 좁은 길을 따라 걸으면서 보이는 이 멋진 풍광을 한 번만 보기는 너무 아까워 사진을 연신 찍어댑니다.

그러다 문득 그들의 오랜 두려움을 느낍니다. 바다가 바로 앞인데 그래서 얼마나 무서운지요. 이렇게 견고하고 두꺼운 성벽을 쌓고 바다를 감시하던 그 시절의 사람들이 영화처럼 보이는 듯했습니다.

이제는 관광지가 된 이 도시는 더 이상 바다를 통해 침략하는 적은 없지만 여전히 바다로 내려가는 길은 좁고 꼬불꼬불하고 단단한 돌길입니다. 이 작고 슬픈 도시는 기대한 것 보다 백만 배는 훨씬 더 아름답고 근사했습니다.

바다는 넘치고 흐르다가
집에 돌아와 부서지고 그제야 안심한다
집에 오는 길은 좁고도 어려워
두려워 넘실대지만
불안해 흔들리지만
집에 돌아와 하얗게 부서지고 나서야
그제야 쉰다

세상에 많은 아름다운 곳을 가보고 싶습니다. 여기만큼 아름다운. 이탈리아로 넘어가면서 또 기대하고 설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