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이 있는 자리

희망찬 새해가 시작되었는가?
희망. 우리가 말하는 희망은 막연한 기대나 즐거운 감정, 낙천주의가 아니다. 희망은 방향이자 이유이며, 강한 투지와 열정 끈기를 동반한다.

6.25 전쟁을 통해 국가분단과 가족의 헤어짐을 경험한 세대에게 희망이란 안정과 평안일 것이다. 글로벌화가 되며 여러 나라를 여행하고 다양한 사람들과 소통하며 새로운 지식과 경험을 배워가는 것이 그 다음 세대에게 희망이었다면 과연 예상치 못한 걱정이 없고, 이미 주어진 안정 속에서 어디든 연결된 온라인 시대에 살고 있는 다음세대에게 희망이란 전혀 다른 모습일 것이다.

평균기대 수명의 증가와 함께 시간과 공간적 제약의 압박이 현저하게 줄어든, 언제든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게 된 다음세대에게 과연 희망이란 어떤 의미일까?

다음세대와의 대화 속에서 자주 발견하는 것은 ‘하고 싶은 것이 별로 없다.’, ‘해야할 이유를 못 찾겠다.’ 등 일상에 동기부여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필자는 다음세대 사역을 하면서 어떤 것이 이들에게 동기를 부여해 줄 수 있는지 고민해 왔다. 의미 없는 것들에 시간을 쏟으며 시간을 낭비하는 듯 보여 무언가 의미 있는 것을 찾게 해주고 싶었지만, 그들에게는 꽤 많은 시간이 있다.

여러 경험을 하며 성장하기를 권했지만, 이미 간접적으로 경험해 보면서 필요나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미디어로, 게임으로, 쏟아지는 온라인 콘텐츠로 인해 도전을 받고 열정을 가지는 경우보다는 도리어 끈기가 사라지고, 무슨 일을 해도 즐거움을 찾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어느 때보다도 여유롭고 안정적이며,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는 시대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희망은 도리어 사라져가고 있다. 어쩌면, 공동체적 희망이 흔들리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라가 힘들 때는 나라를 위해 마음을 모으고, 더 나아지기를 바라며, 가족이 어려울 때는 함께 뜻을 모아 가족의 안녕을 위해 열심을 내었고, 자녀 양육과 교육에 힘써야 할 시기에는 자녀를 지원하기 위해 헌신했다면. 지금은 개인의 안녕에 관심이 쏟아지면서, 무엇을 위해 사는지 그 목표나 희망이 흐려진 것이 아닐까.

희망은 그 방향이 정확하고 목적이 정확하다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에서의 생존자로서 심리학자이자 치료사인 빅토르 프랑클은 우울증과 자살, 불안과 관련한 주제를 깊이 이해하고 심리학계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는 전쟁이 끝나자마자 ’죽음의 수용소‘라는 책을 저술했는데 그 책에는 강제 수용소에서 동료들이 희망과 목적을 잃어가는 것을 몸소 느끼며, 그것이 실제 신체 면역력에 얼마나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지, 정신적으로 얼마나 치명적인지를 글로 남겼다.

희망이 없어진 수용소에서는 어차피 곧 죽을 상황에서 도려 빵 조각 조차도 나눠 먹지 않으며 다른 사람들과 단절했고, 고통에서 자신을 분리시키기 위해 충동적으로 단기 도파민을 찾았다고 한다.

살아야 할 이유와 방향, 미래에 대한 믿음이 무너지자 즉, 희망이 사라지자 나타난 증상이다. 목적이 흐려진 다음세대에서도 점점 다른 사람들과 단절하고, 나누지 않으며, 단기 도파민에 노출되어 있는 비슷한 양상을 볼 수 있다. 강제 수용소가 아닌, 고통이나 걱정이 없는 평안함에도 불구하고, 외로움과 불안에 심각하게 노출되어 있는 등 그 유사점을 볼 때 다음세대가 희망을 잃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 실태를 깊이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이전 세대는 고통(살아남기 위한 경쟁 포함)에서 삶의 이유와 의미를 찾았다면, 다음세대는 고통이라고 표현할 만한 눈에 띄는 어려움이 없을 뿐 아니라 고통을 이겨내며 앞으로 나아갈 힘이 필요 없고, 할 수 있는 것이 많지만 도리어 목적도 희미해진다.

고통이나 견뎌내야만 하는 상황에서 삶의 목적은 수동적이었다. 이에 반해 지금 이 세대에게 필요한 것은 능동적으로 목적을 찾아나서야 하는 방식이 필요하다. 하지만 말처럼 쉽지 않다. 이전 세대도 경험해 보지 않은 것이며 사실은 편안해진 우리 모두가 겪고 있는 현실이지 않을까.

온 삶을 다한 ‘예수’라는 모델
이를 위해 기독교만큼 완벽한 것이 없다. 신의 눈치를 보는 것도 아니고, 스스로를 단련하는 것도 아니며, 능동적으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십자가와 부활의 목적을 위해 온 삶을 다한 ‘예수’라는 모델이 있다. 그 목적이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는 사랑을 실현하는 것임이 뚜렷하다.

예수는 능동적으로 우리 가운데 찾아와 이웃들을 직접 찾아가고,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에게도, 반대하는 사람들에게도, 외면하는 사람들에게도, 악하게 살아온 사람들에게도 적극적으로 다가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전하고 생명을 전해 주었다.

청년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 조사에서 ‘다른 사람을 돕는 가장 영향력 있거나 의미있는 방법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에 대한 질문에 가장 많은 답을 받은 것은 바로 “volunteer work to help others with hands” 자발적인 참여와 적극적인 봉사로 도움을 주는 것이었다.

뉴질랜드의 교육은 어려서부터 volunteer work 를 지향한다. 무엇을 잘해서가 또는 여유가 있어서 돕는 것이 아니라 도움을 줄 수 있는 마음이 있다면 무엇이든 가서 손을 얹는 마음이다.

내 가까운 이웃이 아니라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도 누구에게든 적극적으로 다가가 돕는 자세가 문화 전반적으로 스며들어있다. 어릴 때부터 이러한 교육 속에서 자란 아이들은 volunteer work 를 통해 이기적이지 않고, 이유없이 다른 사람들을 도우며, 자신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것을 배운다.

이는 매우 훌륭한 교육 방식으로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다른 사람을 위할 줄 아는 사람으로 성장할 뿐만 아니라 작은 일도 그저 지나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나서는 삶의 방식으로 자리잡는다. 어떠한 목적을 이루어야만 성공한 것이 아니라 삶의 작은 부분에서부터 때로는 내 삶 전체를 던질 수 있는 용기. 바로 희망이 생기는 또는 희망이 이루어지는 시간일 것이다.

volunteer work
새로운 해가 시작되며 새로운 계획이나 결의가 있을 것이다. 올 한 해 다음세대와 함께 volunteer work에 참여해 보면 어떨까. 큰 결의나 의미나 결과를 가져오지 않더라도, 이웃을 위한 적극적인 움직임 속에 하나님이 주시는 희망이 생기는 자리가 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시작해 보기를 권한다.

교회 역시 이를 위해 적극적으로 움직여야 한다. 주변을 둘러보면 나와 연관이 없을지라도 하나님의 마음이 있는 곳이 있다. 우리는 적극적으로 다음세대와 함께 그 자리에 찾아가 물고기 2마리와 보리떡 5개로 5천명을 먹이고도 남으시는 예수님의 희망을 경험하는 한 해가 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