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

폭풍의 언덕(Wuthering Heights)은 영국의 여류작가인 에밀리 브론테(Emily Bronte)가 1847년에 발표한 첫 소설이자 마지막 소설이다. 이 소설을 출판한 후 그녀는 단번에 유명작가로 명성을 얻었으나 이듬해에 폐결핵으로 서른 살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에밀리는 《제인 에어 Jane Eyre》를 쓴 언니 샬롯(Charlotte)과 《애그니스 그레이 Agnes Grey》를 쓴 동생 앤(Anne)과 더불어 흔히 ‘브론테 자매’라고 불린다.

‘폭풍의 언덕’은 히스클리프(Heathcliff)라는 인물이 벌이는 복수극을 다루고 있다. 소설은 1인칭 내레이터인 록우드(Lockwood)가 캐서린 언쇼(Catherine Earnshaw)의 유령과 조우하는 장면을 계기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주인공 히스클리프를 중심으로 줄거리를 잡아보자. ‘폭풍의 언덕’ 저택의 주인 언쇼(Earnshaw)가 리버풀 여행 중에 길에 버려진 고아를 데려와 양자로 삼았다. 그 아이에게 죽은 아들의 이름인 히스클리프를 붙여주었다. 언쇼에겐 아들, 딸이 있었다. 딸 캐서린(Catherine)은 히스클리프를 좋아해 다정하게 지냈다. 반면, 아들 힌들리(Hindley)는 히스클리프를 학대하며 하인처럼 취급했다. 그럼에도 히스클리프는 캐서린과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 마냥 행복했다.

그러나 캐서린이 린턴가(Linton)의 아들인 에드가(Edgar)와 친해지자 히스클리프는 좌절 속에 빠져들었다. 캐서린은 에드가의 청혼을 받고 고민한다. 캐서린은 히스클리프를 사랑했다. 히스클리프와의 사랑은 그녀에게 ‘영원한 바위’ 같았고, 에드가와의 사랑은 ‘나무의 잎사귀’처럼 일시적인 것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이런 마음을 하녀 넬리에게 솔직히 털어놓았다. “넬리, 내가 바로 히스클리프야. 그는 언제나, 언제까지나 내 마음속에 있어.”(Nelly, I am Heathcliff! He’s always, always in my mind.) 그런데도 그녀는 갈등했다. 캐서린의 마음은 이중적이었다. 히스클리프와 자신이 하나라고 느끼면서도, 서로 섞일 수 없는 신분의 선을 긋고 있었다.

캐서린은 무엇보다 에드가와 결혼해 부유해지고 싶었다. 물론 여기엔, 그녀 나름대로 히스클리프를 위하는 마음의 배려가 없지 않았다. 캐서린은 자신이 재산을 가져야 오빠 힌들리의 학대로부터 히스클리프를 지킬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히스클리프로선 캐서린의 속마음까지 읽긴 힘든 노릇이었다. 결국 히스클리프는 떠나버리고, 캐서린은 에드가와 결혼하게 된다.

시간이 흘러 부자가 되어 돌아온 히스클리프는 복수극을 펼친다. 우선 자길 학대했던 힌들리에게 복수를 시작했다. 도박으로 파멸시켜 ‘폭풍의 언덕’ 집을 빼앗았다. 힌들리의 아들 헤어튼(Hareton)을 자기 집에 데려다가 무식한 하인처럼 키웠다. 자기에게 힌들리가 그랬던 것처럼.

다음은 사랑하는 캐서린을 데려간 린턴가에 대한 복수다. 히스클리프는 에드가의 동생 이사벨라(Isabella)를 유혹해 결혼한 후 학대를 일삼았다. 견디다 못해 런던으로 도망친 이사벨라는 거기서 아들 린턴(Linton)을 낳았다. 이사벨라가 죽자 린턴은 아버지 히스클리프의 손에서 자라게 된다.

한편, 캐서린은 딸 캐시(Cathy)를 낳다가 죽는다. 남편 에드가마저 죽게 되자 캐시는 졸지에 고아가 되었다. 히스클리프는 고아가 된 캐시를 강제로 병약한 자신의 아들 린턴과 결혼시켰다. 린턴이 얼마못가 죽자, 캐시가 물려받은 에드가의 재산이 히스클리프 손에 들어왔다. 마침내 언쇼가의 ‘폭풍의 언덕’ 저택과 린턴가의 저택, 그리고 두 가문의 모든 재산이 히스클리프 차지가 된 것이다.

이로써 히스클리프는 복수에 성공했다. 그러나 죽은 캐서린의 유령이 나타나 그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그는 점차 정신 이상이 되어갔다. 마침내 그는 눈도 감지 못한 채 복수와 야망으로 뒤엉킨 생을 마감했다. 이제 이 비극적 스토리에서 남은 자는 둘 뿐이다. 히스클리프의 며느리로서 과부가 된 캐시와 히스클리프의 학대를 받고 자란 힌들리의 아들 헤어튼. 둘은 서로를 사랑하게 되었으며 히스클리프의 장례를 마치고 결혼함으로써 처절한 복수극 끝에 새로운 희망을 싹틔운다.

이렇듯 소설은 언쇼가에 들어온 한 이방인, 즉 히스클리프를 비극의 씨앗으로 설정하고 있다. 이를 우리 교회에 적용해보면 어떨까.

어느날 새신자가 교회에 들어왔다고 가정해보자. 그는 모든 면에서 기존 신자들과는 격이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다. 사람들의 반응이 나뉜다. 어떤 이는 힌들리처럼 그를 거부하고, 어떤 이는 캐서린처럼 따뜻하게 맞이한다. 새신자는 갈등한다. 캐서린류의 환대 덕분에 교회를 나오고는 있지만, 그 캐서린 역시 마음의 선을 긋고 거리를 두고 있음을 직감한 탓이다.

만약 그러한 교회의 모습으로 인해 새신자의 마음에 분노가 잉태되고 마침내 교회를 떠나고 만다면? 또 다른 ‘폭풍의 언덕’ 스토리가 실제 교회에서 벌어지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성경의 교훈은 어떠한가? 예수님 당시 유대인은 사마리아인을 앗수르와의 혼혈이라는 이유로 이방인 취급을 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달랐다. 일부러라도 사마리아인을 더 존중하셨다. 누가복음 10장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그러하고, 요한복음 4장에선 유대에서 갈릴리로 향하실 때 사마리아 지방을 일부러 통과하며 우물가에서 만난 사마리아 여인의 회심을 이끌어내셨다.

주님이 기대하시는 우리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외인을 배척하는 힌들리는 결단코 아닐 것이고, 캐서린 역시 부족할 것이다. 주님은 제자들이 그 누구보다 주님 자신을 닮길 원하실 것이다. 이 글을 쓰는 나부터 주님과 너무 동떨어진 자화상에 부끄러울 뿐이지만, 그래도 주님을 따르고 닮아가는 그 여정을 벗어나지 않게 되길 기도한다.

히스클리프로 돌아가보자. 성경은 그가 벌인 복수극을 결코 용인하지 않는다. 성경의 핵심 주제 중 하나가 용서다. 용서란 과연 무엇일까? 하나님의 용서가 아니라면, 인간의 용서는 동병상련의 다른 표현일 것 같다. 나 역시 너처럼 불쌍한 죄인일 뿐이란 사실을 인정하는 마음. 그 마음이 흘러나올 때 서로를 향한 용서의 문이 열리지 않을까 싶다.

나는 이 작품에서 캐서린이 가졌던 사랑의 한계를 비난할 자격이 없다. 캐서린은 히스클리프를 사랑했다. 그런데도 히스클리프와 하나가 될 순 없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둘 사이에 마음의 벽을 세워두고 있었다.

내가 그렇다. 이웃을 주님의 마음으로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내 삶 속으로까진 받아들이지 못한다. 헤롯성전의 입구에 위치해 있었던 ‘이방인의 뜰’처럼, 내게 있어 이웃은 언제나 거기까지만이었다.

선교사의 간증을 보니 그분들에게서도 그런 고민이 엿보여 위로 아닌 위로를 느꼈다. 선교지의 백성들을 사랑한다면서도, 그들보다 내가 우월하단 교만을 벗지 못하는 물과 기름같은 이중적 모습. 그 교만이 구한말 조선에 왔던 선교사에게도 있었고, 그 벽을 깰 때에야 1907년의 평양대부흥이 찾아올 수 있었다.

사랑과 교만은 상극이다. 사랑은 오직 겸손과만 동행한다. 하나님이시면서 종된 인간의 형체로 오셨던 주님(빌립보서 2:5-8). 그분의 끝없는 겸손. 나도 교만의 찌꺼기를 체로 걸러내며 예수님의 사랑을 더 배워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