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하네스 브람스, 가을에 듣는 음악가

올 3월에도 어김없이 예전 버릇이 도져서 고국의 가을을 생각하며 오래 전 추억을 더듬을 때 문득 튀어나오는 시(詩) 한 편이 릴케의 <가을>입니다.

<가 을>
나뭇잎이 떨어진다,
하늘나라 먼 정원이 시든 듯
저기 아득한 곳에서 떨어진다
거부하는 몸짓으로 떨어진다

그리고 밤이 되면 이 무거운 지구가
모든 별들로부터 떨어져 고독 속으로 잠긴다

우리 모두가 떨어진다 여기 이 손도 떨어진다
다른 모든 것을 보라 떨어짐은 어디에나 있다

하지만 이 떨어짐을 한없이 부드럽게
두 손으로 받아주시는 어느 한 분이 계신다.

릴케는 가을을 떨어짐의 계절로 느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떨어지는 계절 속에서 그 떨어짐을 받아주시는 어느 한 분의 손길을 느낄 수 있기에 이렇게 아름다운 시를 썼습니다.
가을 하면 떠오르는 시인이 릴케이듯 가을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음악가는 브람스입니다. 릴케보다 한 세대 먼저 태어난 브람스는 릴케만큼이나 가을을 많이 타는 음악가였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가을에 어울리는 음악을 많이 남겼고 우리는 그를 가을이면 듣고 싶은 음악가로 손꼽습니다.

요하네스 브람스(Johannes Brahms)
흔히 바흐와 베토벤, 그리고 브람스를 지칭하여 ‘독일 음악의 위대한 3B’라고 합니다. 하지만 결코 그가 하루아침에 위대해진 것은 아닙니다. 독일 함부르크에서 가난한 음악가의 아들로 태어난 브람스는 음악적 재능은 있었지만 어려운 유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10대 초기에는 술집을 돌아다니며 피아노를 칠 수밖에 없었다고 과묵한 브람스 스스로 이야기했으니 그의 어린 시절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던 그가 스무 살 되던 때에 슈만(Robert Schumann) 부부를 만나게 된 것은 행운이자 운명의 갈림길이었습니다.

슈만 부부와 브람스
문학수는 그의 책 ‘아다지오 소스테누토’에서 브람스와 슈만 부부의 만남을 이렇게 소개했습니다.
‘슈만을 찾아간 브람스는 자신이 직접 쓴 피아노 소나타 C 장조를 연주했다. 1악장이 끝냈을 때 슈만은 ‘잠깐 연주를 멈춰주게’라고 말하고 아내 클라라를 불렀다. 슈만은 젊은 친구의 연주에 감탄했다. 클라라도 마찬가지였다. 마침내 슈만은 자신이 창간했던 ‘음악 신보’에 <새로운 길>이라는 제목으로 한 편의 글을 게재한다. 가난한 음악가 지망생 브람스는 그렇게 해서 독일 음악계에 신성(新星)으로 떠오른다’.

이후 브람스는 슈만 부부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훌륭한 작품을 계속 내어놓았습니다. 또한 슈만이 라인강에 몸을 던졌다가 정신병원에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슈만을 돌보았고 슈만이 죽은 뒤에는 지순(至純)한 사랑으로 클라라를 지켰습니다.

클라리넷과 브람스
흔히 브람스를 가리켜 고독한 음악가라고 합니다. 그의 사진에서는 항시 깊은 우수와 고독이 물씬 풍겨납니다. 삶도, 그리고 그 삶 속에서 혼신을 다해 추구했던 음악도 브람스에게는 고독이었습니다. 그렇기에 그의 음악에는 다른 음악가와는 다른 무엇인가가 있습니다.

그 무엇인가를 가장 잘 표현해낸 악기가 브람스가 말년에 사랑에 빠졌던 클라리넷일 것입니다.
클라리넷의 음색에는 가을의 서늘함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겉모습이 발하는 은(銀)빛이 소리로 묻어나옵니다. 아마도 브람스가 클라리넷을 사랑한 이유가 그 서늘한 음색과 화려하지만 금(金)빛의 찬란한 화려함이 아닌 은은한 은(銀)빛의 서러운 화려함 때문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그래서 클라리넷은 고독과 우수의 작곡가 브람스에게 가장 어울리는 악기였습니다.

가을이면 들어야 하는 곡, 브람스 클라리넷 5중주 Op. 115
1890년 57살이 된 브람스는 G 장조의 현악 5중주 작품 111을 완성한 후 자신의 창작력이 전만큼 못한 것을 느끼고 당분간 작곡을 중단하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러나 이듬해 3월 마이닝겐 공작 궁전에서 뮐펠트(Richard Muhlfeld 1856-1907)의 클라리넷 연주를 듣고 크게 감동했습니다.

뮐펠트의 뛰어난 연주와 깊은 정서를 자아내는 클라리넷의 음색에 심취한 브람스는 새로운 작품을 쓰고 싶었습니다. 창작의 영감이 되살아난 브람스는 뮐펠트와 클라리넷을 위하여 4편의 작품을 작곡하였습니다.

두 개의 클라리넷 소나타(작품 120)와 클라리넷 3중주(작품 114), 그리고 이날 들은 클라리넷 오중주(작품 115)입니다. 이 모두가 걸작이지만 이 중에서도 으뜸가는 곡이 클라리넷 오중주입니다.

브람스 만년의 심오한 분위기와 함께 지나간 삶을 뒤돌아보는 감상, 아름답던 젊은 날의 추억과 체념, 가슴을 파고드는 슬픔과 고독이 곡 전체를 통해 담담하게 흘러나옵니다. 형식적인 면에서도 잘 다듬어져 악장 간의 연관도 다채롭고 긴밀합니다.

누군가의 말대로 이 곡은 결코 혼자 들으면 안 되는 곡입니다. 누군가 당신을 붙들어 줄 사람과 함께 들어야 하는 곡이지만 여자라면 낯선 남자의 곁에서 들어서는 안 되는 곡이기도 합니다. 너무도 슬프고 애절한 이 곡을 들을 때 그만 무심코 옆 사람의 품에 쓰러져버릴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곡은 모두 4악장으로 되어있습니다. 턴테이블에 판을 올리고 바늘을 내린 뒤 서둘러 자리에 앉으면 1악장이 시작되고 곧바로 스피커를 통해 전해오는 단조(短調)의 현악 울림은 스산한 가을바람입니다.

아! 하는 탄성이 입에서 나오려 할 때 곧이어 들려오는 클라리넷 소리는 색 바랜 낙엽을 실어와 여러분의 가슴속 한 귀퉁이에 쌓습니다. 그때 여러분이 앉아있는 자리는 이미 집안이 아니고 키 큰 나무들이 잎사귀를 떨구며 클라리넷의 목쉰 음성으로 웅성거리고 있는 가을 숲속입니다.

좋은 곡인 만큼 명연주가 많지만 화요음악회에서는 헤르베르트 스타르(Herbert Stahr)가 클라리넷을 맡은 베를린 필하모닉 팔중주단 단원의 연주로 들었습니다.

음악 감상 뒤에 같이 본 하나님 말씀은 히브리서 1장 2-3절입니다
모든 것이 떨어져 내리는 가을에도 그 떨어짐을 받아주시는 한 분이 계신다고 노래한 시인이 반드시 읽었을 성경 구절이기 때문입니다.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는 분을 이 떨어짐의 계절에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