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난 맛에 사는 인생

스티브 어윈, 그는 호주 퀸즈랜드 동물원의 악어 사육사였다. 그의 동물 사랑과 악어를 다루는 용감한 행동과 연기에 매료된 사람들은 그를 ‘크록커다일 헌터’라고 불렀고 그의 명성은 세계로 뻗어 나갔다.
자부심과 자랑이 대단했던 그는 활동영역을 정글이나 사막 등지를 넘어 드디어 바다 속까지 이르렀으며 잠수복도 입지 않고 동물원에서 일하던 반바지 작업복에 산소통도 없이 깔때기 하나 입에 물고 바다 속을 헤집고 다니는 장면을 연출하고 전 세계 시청자들의 호기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가 퀸즈랜드 앞 그레이트 베리어(Great Barrier)의 산호초 바다 속에서 한 마리 가오리 꼬리의 침에 가슴이 찔려 병원으로 후송되기도 전, 만 44세의 젊은 나이로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가고 말았을 때, 그의 안타까운 죽음에 세계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한국에서 상영된 한 소박하고 작은 영화 한 편이 전국에서 큰 화제를 불러온 적이 있었다. 대형 부록버스터 영화가 판치는 시대에 보잘것없는 짧은 다큐 영화,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가 그것이다. 98세의 할아버지와 89세 할머니의 부부 사랑, 먼저 떠난 할아버지의 죽음을 애통해하는 할머니의 모습을 담은 이 영화는 많은 사람의 눈시울을 적시게 한 감동적인 영화다. 누구나 이 영화를 감상하며 약하고 보잘것없는 작은 것이라도 세상에 큰 영향을 주고 많은 사람을 감동케 할 수 있음을 느끼게 했던 영화였다.

세상은 ‘제 잘난 맛에 사는 게 인생’이라고 노래하지만, 똑똑하고 권세까지 갖춘 잘난 사람들보다 약하고 못난 잊혀 진 사람들에게서 더 큰 감동과 삶의 생기를 얻을 수 있음은 삶의 오묘한 이치다. 사람들은 강함에 집착한다. 그러나 광장에 모인 숫자가 강함과 약함의 기준이 될 수 없고, 옳고 그름의 판단이 될 수 없듯이 크기가 품격을 결정할 수 없는 것이다. 왜 작은 것과 약함의 매력은 몰라주는 것일까 묻고 싶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아내와 나의 이민 체험은 두려움 그 자체였다. 연고자나 지인 한 사람도 없는 남미 안데스산맥 중턱, 백두산 높이의 한 도시에 도착하던 날부터 우리는 어린 두 아이와 함께 손을 잡고 울며 기도하기 시작했다. ‘하나님 지켜주소서’. 자연이 두려웠고, 사람이 두려웠고, 내일이 두려웠다. 내가 바보처럼 여겨졌다. 잘 나가던 서울의 대기업 직장을 팽개치고 꿈을 이루어 보겠다는 용기는 좋았지만, 그 꿈이 환상으로 끝나는 줄 알았고 나는 스스로 실패자로 여겼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여전히 내 곁에 계셨고 주님은 우리들의 선한 목자가 되어 주셨다.

뉴질랜드에서 신학교를 졸업하고 청빙 받은 교회에 부임하던 날, 나는 대학생이 된 두 자녀와 함께 네 식구가 고물이 된 소형승용차를 끌고 남섬의 더니든에서 출발하여 북섬의 해밀턴에 도착했다. 교회의 어린아이가 목사님 차는 왜 이리 작아요? 묻던 기억이 아직도 새롭다. 축복의 땅, 남섬과 북섬의 여러 도시를 옮겨 다니며 수십 번의 이사를 하며 살아 본 우리들의 뉴질랜드 생활은 한없는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의 세월이었음을 믿는다.

수도사가 되기를 원하는 한 젊은 지망생이 높은 산 위에 있는 수도원을 찾아 제자 되기를 원했을 때, 스승은 산 위에 오르는 동안 무엇을 보았느냐고 물었다. ‘산 위 높은 곳의 수도원만 바라보고 올라왔으며 다른 아무것도 보지 않았습니다.’ 그때, ‘네가 무심코 지나친 작은 한 송이 꽃이 주는 행복과 속삭이듯 흐르는 시냇물 소리를 듣지 못했다면 네가 어디서 무슨 행복을 찾을 것이며 무슨 진리를 발견한단 말인가’ 그리고 그 젊은이를 다시 돌려보냈다.

바울의 육체적 가시는 그의 간절한 기도 제목이었다. 그러나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라는 하나님의 응답에 얼마나 서운 했을까 싶다. 그는 살아계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신이 약한 그때에 강할 수 있고 자신의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해질 것임을 믿었던 사람이다. 참으로 우리를 흥분케 하는 표현이다. 그 약함의 매력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성경이 말하는 소수의 원칙, 약함의 원칙, 남은 자의 원칙을 우리는 기억했으면 좋겠다. 교회에서마저 세상의 강함의 자랑거리만이 여전히 인기를 끌고 있다면 성경의 참뜻을 왜곡시킬까 두렵다.

바울의 고백처럼 진정한 신앙인이란 못난 맛에 사는 사람이다. 신앙생활을 나의 못남과 나의 약함을 세상이 알아주는 잘남과 강함으로 바꾸기 위한 수단과 방법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참 신앙이 아니다.
내가 잘못되어도 내가 가난하고 병들고 실패해도 나의 좌절과 연약함으로 인해 고통받아도 구원은 오직 절대자 그분에게 달려있음을 믿는 것이 신앙이다. 참 신앙인은 나의 못남을, 나의 연약함을, 나의 부족함을 인정하며 겸손히 절대자의 구원의 손길을 기다리는 사람이다. 사울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지만 비참한 최후를 맞는 왕이 되고 말았다. 선지자 사무엘은 사울을 향해, ‘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그때에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되게 하신 하나님’을 기억하라고 충고한다.

포항에 한동대학교가 세워졌을 때 김영길 총장은 대학의 한 표어를 정했다고 한다. ‘공부해서 남 주자’. ‘공부해서 좋은데 취직하고 나 잘살고 돈 많이 벌어 부자 되자’가 아니고 공부해서 남을 더 행복하게 하며, 대학은 학생들에게 돈 잘 벌 수 있는 기술을 가르치는 곳이 아니라 성숙한 인간을 길러내는 곳이라는 말이었을 것이다. 성숙은 자기 낮춤과 자기 부인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내가 죽어야 진정 살고 또한 성숙한 신앙인이 된다는 말이다.
질그릇이 깨어질 수밖에 없는 것처럼 크리스천의 삶이 바로 이런 삶이 되어야 함을 의미하고 있다. 나는 깨어지고 내 속에 감추어져 있는 보배인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는 삶이 참 신앙인의 삶이란 뜻이다.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내가 살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내가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고린도후서 6장 9-10절)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린도전서 1;27-28)

‘목사는 은퇴 후에 철든다’는 누군가의 말이 지금의 나를 새삼 놀라게 한다. 혹시 나는 강함의 매력만을 추구하며 30년의 이민 생활을 살지 않았을까. 나의 목회 생활 중 나로 인해 상처받았을지 모르는 키위교회나 한인교회의 성도도 있을 것이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는 하나님의 음성 듣기보다 나의 강함을 인정받기 원했던 어리석었던 지난 세월이 아니었을까 오늘도 나는 깊은 생각에 잠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