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퀴엠, 누구를 위한 진혼곡인가?

음악사상 제일의 천재 모차르트에 관한 일화는 지나칠 정도로 많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이 그의 죽음과 끝내 완성하지 못하고 남겨놓은 레퀴엠(requiem)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진혼곡을 레퀴엠이라고 하는데 레퀴엠은 죽은 이를 위한 미사곡입니다. 그런데 제일 처음에 나오는 입당송(introtitus) 가사의 첫 마디가 라틴어인‘Requiem aeternam(영원한 안식을)’으로 시작되기 때문에 이렇게 부르게 된 것입니다.

죽음은 인간의 삶에 있어서 언제나 가장 엄숙한 그리고 신비스러운 수수께끼입니다. 누군가는 죽음을 삶의 끝으로 보고 누군가는 삶의 새로운 시작, 또는 연장으로 봅니다. 그렇기에 죽음은 많은 예술가들이 가장 많이 다루는 주제이고 음악가들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가톨릭교회의 미사 음악 장르가 쇠퇴한 뒤에도 작곡가들은 많은 레퀴엠을 내놓았습니다.

죽음은 심각한 주제이기도 하지만 음악가들의 낭만적 감성을 아편처럼 집요하게 사로잡았기 때문입니다. 모차르트를 필두로 케루비니, 베를리오즈, 베르디, 포레의 레퀴엠이 유명하며 흔히‘5대 레퀴엠’이라고도 합니다. 그 밖에도 드보르작, 생상스, 브루크너의 레퀴엠도 걸작들이며 루터의 독일어 성서에서 가사를 발췌해 작곡한 브람스의‘독일 레퀴엠’도 아주 유명한 곡입니다.

영화 ‘아마데우스(Amadeus)에서의 레퀴엠
종교 음악이나 진혼곡 즉 레퀴엠을 잘 안 듣던 분들 중 많은 분들이 영화‘아마데우스’를 본 뒤에 레퀴엠을 좋아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영화에서 살리에르는 자신이 모차르트를 죽였다고 고백합니다.

생활고와 병으로 극도로 쇠약해진 모차르트에게 살리에르가 이름을 밝히지 않는 사내를 보냅니다. 그 사내는 모차르트에게 큰 돈을 제시하며 레퀴엠을 기한 내에 작곡해달라고 주문하고 모차르트는 그걸 작곡하다가 힘에 겨워 그만 서른다섯이라는 나이로 쓸쓸히 죽어갑니다.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레퀴엠이 완성되지 못한 채 모차르트는 죽고 이름도 모르는 사내를 위해 만든 곡이 그의 장송곡으로 흘러나옵니다. 참으로 극적인 장면입니다. 영화에서처럼 모차르트의 죽음이 살리에르의 의도에 의한 것이라면 이는 음악적인 살인입니다만 이건 작가가 지어낸 극 중 설정에 불과하고 실제로 그에게 장송곡을 의뢰한 사람은 프란츠 폰 발제크(ranz von Walsegg)라는 백작이었습니다.

백작은 자기 아내의 일주기 기일(忌日)에 자기의 곡으로 발표하기 위해 심부름꾼을 시켜 자기 이름을 밝히지 않고 작곡을 의뢰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심부름꾼의 잿빛 옷차림과 이상한 용모에다 이름도 밝히지 않는 의뢰인으로 인해 모차르트도 썩 내키지 않았지만 곤궁한 살림에 거액을 거절할 수 없어 작곡을 맡았습니다.

자신의 죽음을 위한 레퀴엠
그러나 그 때 마침 오페라 ‘요술피리’를 완성시키느라고 무척 바쁜데다가 건강도 좋지 않던 모차르트는 ‘레퀴엠’ 작곡을 시작하면서 자꾸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또 그를 찾아왔던 심부름꾼의 음산한 옷차림과 익명의 의뢰인 생각을 하면서 우울증에 빠져들었습니다.

마치 그들이 죽음의 세계에서 자기를 맞으러 온 사자(使者)라는 생각도 들고 자기가 작곡하는 레퀴엠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의 죽음을 위한 곡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그 해 9월에 이태리의 대본 작가 다 폰테(오페라 돈 조반니의 대본 작가)에게 쓴 편지에서 ‘그 낯선 사나이의 모습이 자꾸 떠올라와 작곡을 독촉합니다…이제 내 목숨도 다 되었다고 깨닫습니다…이것이 운명이라면 체념해야겠지요. 이것은 내 장례의 노래입니다’라고 썼습니다.

하지만 음악학자이자 모차르트 연구에 일생을 바친 알프레드 아인슈타인(Alfred Einstein)은 이 편지는 사실이 아니라고 그의 저서 음악 에세이에서 밝혔습니다. 그러나 이 편지가 사실이든 아니던 우리가 더 관심이 있는 것은 이 천재 음악가가 과연 자기 죽음을 예감했을까 하는 사실입니다.

제 생각에는 틀림없이 그는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느꼈을 것 같습니다. 그때 극도로 쇠약해진 그가 오페라 ‘요술 피리’를 마치느라 몇 번씩 혼절한 적이 있었지만 미친 듯이 레퀴엠의 작곡에 매달린 것을 보면 그는 다가오는 죽음과 숨바꼭질을 했던 것 같습니다.

마지막에는 펜을 들 힘조차 없어 제자인 쥐스 마이어에게 악보를 받아 적도록 하면서 작곡을 계속했습니다.

라크리모자(Lacrymosa, 눈물의 날) 8소절에서 멈춘 모차르트의 펜
안동림 교수의 ‘이 한 장의 명반(2)’에 보면 죽기 전날인 12월 4일에 친구들이 왔을 때 같이 ‘레퀴엠’을 노래했는데 그때 곡은 겨우 반쯤만 작곡된 채 제3부의 제6곡 라크리모자(Lacrymosa, 눈물의 날) 8소절로 그쳐 있었습니다.

그는 이 부분에 이르자 울음을 터뜨렸는데 스스로의 죽음이 눈앞에 닥쳐와 더 이상 곡을 쓸 수 없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친구들이 돌아가자 쥐스 마이어를 머리맡에 불러 남은 부분을 어떻게 쓸 것인가를 자세히 지시하고 몇 시간 뒤인 5일 새벽 0시55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결국 남을 위해 쓰려던 레퀴엠은 그의 말대로 자기 자신의 죽음을 위한 레퀴엠이 되고 말았습니다.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모차르트의 상여가 나갈 때 웅장한 레퀴엠이 울려 퍼지는데 이 부분이 바로 모차르트가 작곡한 마지막 부분인 라크리모자(눈물의 날)입니다. 레퀴엠 중에서도 가장 아름답고 또한 찬송가같이 경건한 느낌과 신비로운 감상을 불러일으키는 선율입니다.

레퀴엠, 죽은 이를 위한 미사곡이라는 이 곡은 그러나 사실 죽은 이는 듣지 못합니다. 이 곡을 듣는 이는 남아있는 사람들 즉 살아있는 사람들입니다. 결국 살아있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격려하여 남은 삶을 더 열심히 살라는 곡이 아마도 진혼곡, 레퀴엠의 참 목적이 아닌가 합니다.

모차르트의 레퀴엠은 그의 단명한 삶으로 인해 불행히도 미완성으로 끝났지만 그 힘들고 어려운 가운데서도 맑고 아름다운 울림을 들려주는 이 곡은 모든 레퀴엠 중 최고 걸작의 하나로 우리 곁에 남아있습니다.

Bruno Walter가 지휘한 뉴욕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와 웨스트민스터 합창단의 연주가 아주 명연이지만 녹음이 모노인 것이 아깝습니다. 이를 보완한 스테레오의 명연주가 칼 뵘이 지휘한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빈 국립 가극장 합창단이 노래한 연주입니다.

이 날 본 하나님의 말씀은 데살로니가 전서 4장 16-18절입니다

  1.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17.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18. 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 죽은 뒤에 아무리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하여도 죽은 이에게도 살아남은 이에게도 별 유익이 없습니다. 살아서 우리 주님의 말씀과 약속을 믿음으로써 나팔 소리 들릴 때 일어나 주를 영접할 수 있습니다. 레퀴엠은 그냥 음악으로 즐기고 우리가 서로 위로할 말은 주님의 약속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