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 3월 11일, NZ 첫 한인연합교회 설립의 산 증인

1960년대부터 한국 원양어선 선원들을 위한 선교가 웰링턴의 선원회관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다. 1971년 7월1일에 한국대사관이 개설되었다.

1979년에는 한국수산청에서 김경용 수산관을 웰링턴에 파견하여 한국 원양어선의 뉴질랜드어장 조업과 선원의 안전관리를 했다. 그는 1982년 임기를 마치고 한국으로 귀국할 때까지 매주 주일 오후 3시 웰링턴 항의 국제선원 회관 예배실에서 한국 선원들을 위한 예배를 드렸다.

1952년과 53년에 한국전에 군목으로 종군했던 구세군의 퍼시 스미스 사관이 선원회관의 원목으로 한인예배를 인도했다. 통역은 김수산관이 해주었다. 김수산관이 귀국을 하고 나서는 고금숙 씨가 맡아주었다.

뉴질랜드 최초의 한인연합교회 설립을 도와
뉴질랜드의 최초 한인교회는 1984년 3월 11일(주일)오후 3시에 퍼시 스미스 사관을 중심으로 웰링턴에 거주하고 있는 한국인 4명과 다문화 가족 3명, 뉴질랜드 사람 2명이 웰링턴 국제선원회관에서 웰링턴한인연합교회(Korean United Chuch of Wellington) 를 설립하게 되었다.

그 후 매 주일 오후 3시에 국제 선원회관 예배실에서 한국인(교민과 선원)을 위한 예배를 정기적으로 드리게 되었다. 1985년 5월에는 20명의 교인이 서명(서명자: 퍼시 스미스 담임목사, 장경립, 강휘자, 장향순, 김진영, 안산분, 변경숙, R Wilon, D Cambell, G Garlic, R Lain, 삼원27호 일기사 송문호 외 8명)하여 뉴질랜드한인교회(Korean Church of New Zealand Incorporated)가 법인 단체로 등록을 했다.

1985년 8월 16일 자로 뉴질랜드 한인교회에서 한국의 장로회 소속 방파(방글라데시, 파키스탄)선교회의 김용환 목사를 스미스사관의 후임으로 초청(서명자: 퍼시 스미스 담임목사, 김진영 총무, 장경립 집사)을 하게 되었다.

김용환 목사는 뉴질랜드 한인연합교회의 초청장에 의해 비자를 발급받아 1985년 10월 11일 웰링턴에 도착했다. 스미스 담임목사는 “웰링턴 한인연합교회는 한국인을 위한 교회이므로 한국 목사가 인도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고 하여 1985년 10월 13일 오후3시 주일예배부터 김용환 목사가 웰링턴 한인교회를 담임하게 되었다.

약 1개월 후, 김 목사는 예배처소를 세인트 앤드류장로교회의 부속 건물로 옮기고 1985년 12월 8일 웰링턴 한인(Korean Church in Wellington)를 설립하여 뉴질랜드에서 두 번째 한인교회를 세웠다. 최초로 세워진 한인교회인 웰링턴 한인연합교회는 창립한 지 2년도 되지 않아 사라지게 되었다.

신앙적 공허를 이겨내려고 신학 공부하게 돼
원양어선 선원들과 대화를 나누며 그들의 여러 가지 힘들고 어렵고 외롭고 위험한 생업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듣게 되었다. 보합제라는 조건으로 2년간의 고용계약을 맺었기 때문에 어획량을 많이 올려야 한다는 일념으로 무리한 작업에 매여있는 선원들을 위로하고 용기를 주기 위해 대화를 나누면 나눌수록 나 자신의 부족함만 드러날 뿐이며 신앙적으로 공허한 상태가 되었다. 속이 완전히 비어있는 것 같았다.

호주를 꿈꾸며 살았다. 호주에는 야간 신학대학이 있다는데 뉴질랜드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1987년 10월에 하나님의 말씀을 체계적으로 공부를 해야겠다는 마음이 굳어져 짧은 시간에 집과 가재도구를 모두 정리하고 호주의 시드니로 이사하여 마스터 신학교에서 공부했다.

1989년 시드니의 마스터 신학교에서 서울 서초구 방배동에 있는 총회 신학대학(현 합동정통)으로 전학을 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사도바울처럼 동족에게 전도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사도바울은 그토록 설움을 받았으면서도 이스라엘 백성의 회당을 찾아가지 않았던가?

나는 한국사람이기 때문에 한 사람이라도 같은 민족에게 예수님을 전하고 싶은 마음뿐이다. 특히 선원들에게. 왜냐하면 나 자신이 외항선 선원이었으며 선원들에 대한 향수 같은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학하고 약 한 달이 지난 다음, 감기 비슷한 증상으로 자리에 눕게 되었으나 눕지 않고 견디어 하루 이틀 지나갔다. 이를 악물고 감기약을 지어 먹었으나 별 차이가 없었으며 주사를 맞아도 별 효력이 없었다. 그러나 신학대학은 결석할 수가 없었다.

뉴질랜드에 이민을 와서 15년 동안 살다가 예수님께서 다시 불러주시고, 호주에 있는 마스터 신학교에 입학하여 일 년 동안 신학공부를 하였으며, 한국사람들에게 전도를 하기 위해서 한국에 있는 신학교에서 공부를 하는 것이 아닌가? 집사람은 봉제공장에서 내가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일했기 때문에 더욱더 결석은 할 수가 없었다.

한 달이 지났다. 그러나 감기 증상은 사라지지 않았으며 음식은 전혀 먹을 수가 없게 되어 체중은 점점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오직 음식은 오렌지 주스밖에 마실 수가 없게 되었으며 다른 음식은 목구멍에서 넘어 가지를 않았다.

이전과 같이 두 번째 지하철인 방배동에서 내려 지하철역에서 계단을 오르지 못하고 주저앉아 “하나님 이제는 더 할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하나님께 호소했다.

바로 이때 모세가 보였다. 불붙은 떨기나무 앞에 서 있는 모세는 80세에 부름을 받았다. 그러나 나는 52세가 아닌가? 80세에 비교하면 52세야말로 어린아이와 같은 때이다.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날 이태원에 있는 병원을 찾아갔다. 여러 가지 검사를 받고 난 다음 의사가 한국을 떠난 지 얼마나 되었느냐고 물었다. 15년이라고 하자, 한국의 풍토병인 것 같다고 했다. 그날부터 풍토병으로 치료를 받게 되었으며 질병은 그날부터 치유가 되기 시작한 것이다. 약 한 달 후에는 정상으로 고침 받게 되었다. 나는 기적을 체험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1990년 목사되어 타우랑가에서 선원선교와 교민 섬겨
53세가 되는 1990년 기독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환원총회의 5명과 함께 목사안수를 받았다. 뉴질랜드로 다시 돌아와 세인트 앤드루 장로교회와 연합하여 1990년 2월 16일 마운트 망가누이의 부두 중앙에 갈릴리 선교회를 설립하여 선원선교와 교민, 유학생, 소수민족을 대상으로 선교를 하게 되었다.

한인을 위한 타우랑가 갈릴리교회를 개척하여 선교회에서 매 주일 정기적으로 예배를 드리게 되었으며, 1993년에는 로토루아와 네이피어에 각각 갈릴리교회를 개척하여 설립했고, 국제선원 선교와 교민목회를 함께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