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을 얻는 것은 총을 얻는 것보다 중요하다

뉴질랜드 원주민인 마오리들의 초창기 교역품은 이불과 무기였다. 그래서 북섬에서 가장 먼저 총을 확보한 나푸이 부족은 당시 최고의 막강한 힘을 가질 수 있었고 오늘날까지 가장 세력이 큰 부족으로 남아있다.

복음은 여러 부족에게 서로 평화롭게 사는데 기여
그러나 복음은 여러 부족으로 나누어진 그들이 서로 평화를 유지할 수 있게 했다. 그 당시 추장들은 성경을 보물처럼 여기고 사람들에게 가져오라고 시켰다.“내가 원하는 것은 이불이 아니라 없어지지 않는 물건, 바로 성경이다. 이것은 총을 얻는 것보다 중요하다.”라고 선포할 정도였다. 어떤 사람은 Rotongia에서 와이카토까지 400km를 걸어서 12일 동안 성경을 구하러 갔다는 기록이 있다. 그 후 2명 중에 한 명이 성경을 소유하게 되었다.

추장과 많은 마오리들은 성경을 귀한 것이라 생각해서 소유만이 아니라 읽는 일에 열심을 내 틈만 나면 읽을 뿐만 아니라 밤새 읽고 토론 하느라 잠잘 시간이 없어 다음날 지장을 줄 정도였다고 선교사 윌리암 예트는 기록하고 있다.

너무 많이 읽어서 틀린 것을 지적하기도 해서 때론 선교사들을 곤란하게도 했다고 한다. 심지어 글을 모르는 부모들을 위해서 낮에 아이들이 배워서 밤에 들려줄 정도였다고 한다. 성경을 통한 글읽기는 무엇보다도 실질적으로 경제에 발전을 가져왔다.

왜냐하면 그들은 책을 읽고 농사에 적용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해방된 노예들까지도 글을 읽고 복음을 전할 정도여서 삶의 질을 향상시켰다. 복음을 들은 이들은 다혼과 식인풍습을 없애고 다른 부족의 음식을 태우던 전통까지도 중단했다.

무엇보다도 폭력이 감소하고 모코가 감소했다. 백인들은 모코를 볼 때 사탄의 도장(Devil’s Thumbprint)이라고 했다. 적극적인 면에서는 사회적으로는 여성역할이 활발해지고 전도로 종족간에 싸움보다는 서로 화해가 이루어져 북섬에서 시작된 선교가 온 나라에 꽃피우게 되었다.

나푸이 부족의 노예에서 해방된 마타하우가 남섬에 복음 전해
그 당시 선교사들은 북섬을 중요하게 생각해서 1839년 타미하나가 해밀턴에 가서 선교사를 보내달라고 했으나 지원하지 않다가 나중에 온 오테비어스 헤드필드를 남섬에 보냈다. 그가 오자 타미하나는 마오리어를 가르쳤다.

이처럼 복음은 중단되지 않고 역사했다. 하나님께서는 타미하나를 나푸히 부족의 노예에서 해방되어 미션스쿨에서 배웠던 마타하우에게 복음을 듣게 하시고 그를 세우셔서 또 다른 부족을 위해서 사용하셨다.
그래서 그는 회심 후 1842년 뉴질랜드 가장 남쪽섬 스튜어트 아일랜드까지 혼자 가서 복음을 전했다.

타 부족들은 그가 오자 싸우러 온 줄 알았다가 그가 “I bring peace from the Word of the Lord”라고 외치자 그들은 서로 화해 뿐만 아니라 복음을 받아 드리게 되었다. 그 후 그는 웰링턴을 평화지역으로 삼고 남북섬 온 나라가 복음화될 것을 선포하고 1943년 Bishop Selwyn이 오자 자기가 간 남섬을 안내했다.

와이탕이조약과 마오리전쟁은 마오리 선교에 나쁜 영향 줘
1840년까지는 신약이 번역되고 인쇄되어 성공적으로 생각하고 고무되었지만 역사를 보면 또 한번의 선교적 시련이 찾아왔다. 그것은 셀윈이 CMS와 마찰을 빚으면서 시작돼 1860년대 와서는 미션스쿨이 거의 닫히거나 방치수준까지 갔다.

가장 큰 위기는 와이탕이조약 후 토지를 둘러싼 1843부터 1870년 사이에 12년 동안 치뤄진 마오리 전쟁을 통해서 마오리들은 선교사들도 똑같은 백인으로 생각해서 선교가 힘들었다.
성경보급은 8년(1837-1845)만에 4판을 인쇄했으나 인쇄비 부담으로 많이 찍지 못했다. 그래서 영국 성공회에서 만부를 찍어 보내 주었다. 그 중에 처음 5천권은 와이카토 지역에 보급 되었다. 두 번째 만부가 왔을 때는 읽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 공급 되었다.

구약 전체가 번역되었으나 신구약 합본인 Holy Bible(Paipera tapu)이 나온 것은 3년 뒤인 1865년 4월이다 그것은 교정 시간이 소요됐을 뿐만아니라 마오리 전쟁 때문이었다. 첫 3년 동안은 700부가 판매되었지만 점차 수요가 급감했다. 원인은 구약에 있는 기적들을 마오리 토속신앙과 접목시키길 바랐으나 선교사들이 만류하자 흥미가 급감했기 때문이다.

성경은 마오리 부흥운동에 불씨가 돼
그러나 중요한 것은 신학자들이 얘기한 것처럼 해석의 완벽성을 떠나서 그들에겐 하나의 보물처럼 여겨서 많은 마오리 성경이 보급되어 그들의 회당(Marae)에까지 비치되었고, 또 그들의 문화, 사회 전반에 많은 영향을 끼친 것은 사실이다.

마오리전쟁 패배로 자존심이 강한 그들은 마음에 상처를 입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었지만 1880년대의 마오리 부흥운동은 그들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 무기보다도 강한 성경 한 권이 마치 산불처럼 번져서 마른 숲을 태웠다고 선교사들은 기록하고 있다.

첫 예배를 드리고 사무엘 마스든 선교사가 일기장에“감격으로 가슴이 녹는 느낌을 받고 나는 성도들을 보면서 선교의 결의를 다진다.”고 적었던 내용처럼 또 그가 설교한 “Be hold, I bring you glad things of great joy..” 처럼 복음은 많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가져다 주었다.
그래서 우리의 사역도 기록되고 또 누군가에게 희망을 담은 메세지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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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길
뉴질랜드 구세군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구세군오클랜드한인교회 담임사관.루터의 독일, 장 칼뱅, 츠빙글리의 프랑스와 스위스, 얀후스의 체코, 네덜란드와 벨기에, 존 낙스의 스코틀랜드, 감리교와 구세군의 부흥지 영국, 종교개혁이 넘지 못했던 스페인, 무슬림의 땅 아부다비와 두바이를 답사하여 그들의 사역을 전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