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태초에∙∙∙”

고충근목사<해밀턴지구촌교회>

창세기1장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진화론이 옳은가? 창조론이 옳은가? 라는 오래된 논쟁을 증명하기보다는 ‘성경’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성경에서 제일 처음 등장하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베레쉬트’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태초에’라는 뜻입니다. 오늘은 이 단어가 의미하는 바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성경에서 제일 처음 등장하는 ‘태초에’라는 단어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1. 시간의 시작
‘태초에’라는 말은 ‘시작’, ‘근본’을 의미하는 말로서 ‘시초에’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시간의 시작’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시간의 시작’으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는 말씀은 시간의 시작과 함께 ‘천지’ 즉, ‘물질’도 만드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시간의 시작’은 우리가 보고, 만지는 물질의 시작이기도 합니다. 물질은 시간 속에만 존재하고, 시간이 없으면 물질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육체는 시간 속에서만 존재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는 말은 ‘시간과 물질이 없는 상태에서 시간과 물질이 있는 상태로 만들었다’라고 설명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무에서 유를 창조해내었다’라는 성경적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고, 만지고, 느끼면서 “무엇인가 존재한다.”라고 알게 되는 것은 시간 안에서의 물질의 존재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간을 벗어나면 세상과 물질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 라는 말씀은 시간과 물질이 존재하지 않는 무에서 물질이 존재하는 시간의 세상 즉 ‘무에서 유를 창조하셨다’라는 말이 성립이 되는 것입니다. 만일 성경이 다른 설화나 전설처럼 ‘태초에’라는 시간의 시작을 말하지 않고 ,‘아주 먼 옛날에’라든가‘ 옛날 옛적에’라는 표현을 쓰면서 ‘천지를 창조하셨다’라고 기록되어 있다고 가정을 해 봅시다. 이것은 논리적 모순이 됩니다.

왜냐하면 ‘아주 먼 옛날’이나, ‘옛날 옛적’은 과거의 시간 속에 존재하는 어느 시점입니다. 그러므로 과거의 어느 시간 속에서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것은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것이 아니라 시간 속에서 창조를 한 것이기에 ‘유에서 유를 만들어낸 것’이 됩니다. 이것은 엄밀히 말하자면 ‘창조’가 아니라 ‘변조’입니다. 그러므로 ‘태초에’라는 단어가 가리키는 바는 시간의 시작을 말하고, 무에서 유를 만들어낸 ‘창조’의 시작을 정확하게 드러내는 단어입니다.

2. 시간의 이전
태초에‘베레쉬트’라는 단어가 무에서 유를 창조해낸 창조의 시작이고, 시간의 시작을 나타낸다면, 이런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시간의 이전 상태 즉, 태초 이전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것인가?” 요한복음에 보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한복음 1:1)”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는데 그 말씀은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요한은 그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밝혀주고 있습니다(요한복음 1:14). 그런데 그 말씀이 태초에 계셨는데 ‘계시니라’라는 단어가 헬라어로 ‘미완료 시제’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헬라어에서 ‘미완료 시제’는‘과거에서부터 계속되어 오는 동작의 반복’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이 단어가 의미하는 바는 “말씀이 태초부터 계셨는데 그 말씀은 태초 이전부터 계속 계셔왔던 분이다.”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시간 이전부터 말씀(그리스도)이 계셨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1:1의 ‘태초에’는 시간의 시작을 말하는 것이고, 요한복음 1:1의 ‘태초에’는 시간 이전부터 이어져온 ‘태초에’를 말하고 있습니다. 창세 이전의 상태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17:5에서는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주님께서 ‘창세 전’부터 계셨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창세 전’은 ‘시간 이전’을 말하는 것이고, 주님은 시간이 창조되기 이전부터 계셨음을 알려주고 계십니다. 또한 에베소서 1:4에 보면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계속해서 ‘창세 전’, 시간 이전이 있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시간 이전’ 이것을 성경은 ‘영원’이라고 표현 합니다.

3. 시간의 마지막
‘시간의 시작’이 있다는 것은 ‘시간의 마지막’도 있음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시간은 ‘영원’과는 다르기 때문입니다. ‘태초’가 있다면, ‘세기말’도 있는 것입니다. 시간은 분명 ‘영원’에 비해 한계를 갖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시간의 끝은 어디일까요? 이것을 계시록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시간의 시작을 창세기에서 이 땅을 창조하시는 것으로 시작하셨다면 시간의 마지막은 계시록에서 이 땅이 아니라 전혀 다른 곳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계시록 21:1을 보면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계시록은 시간의 마지막에 들어가게 되는 곳을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새 하늘과 새 땅은 창세기 1장의 시간의 시작과 함께 창조된 이 땅과는 전혀 다른 곳입니다. 그곳은 말 그대로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시간의 지배를 받지 않는 곳입니다. 모든 것이 새로운 곳입니다. 그곳은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고 합니다. 즉, 처음 시간과 함께 만들어진 ‘물질’이 없는 전혀 다른 곳입니다. 그곳이 바로 영원 속에 거하게 되는‘천국’인 것입니다.

간혹 ‘에덴동산’으로 돌아가자! 라고 하면서 ‘에덴의 회귀’를 외치는 분들이 있습니다. 우리는‘에덴’으로 돌아가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에덴동산’은 분명히 ‘시간 속에’ 존재하는 땅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시간을 벗어난 ‘새 하늘과 새 땅’을 추구하는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이 시간 속에서 물질의 지배를 받고 있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우리는 ‘시간’속에서 ‘영원’이 있음을 알고, 믿음으로 ‘영원’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시간 속에서 물질로 우리의 배만 채우며 사는 것이 아니라, 물질을 사용하지만 얽매이지 않고, 영원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런 자들이 ‘내려놓음’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내려놓음’이란 ‘시간의 시작과 마지막’ 그리고 ‘영원’이 있음을 깨닫지 못하는 자들은 실천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시간의 세상이 전부이기에 시간 속에서 더 많이 누리고, 더 많이 쌓고, 더 많이 가져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영원’을 보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시간의 시작과 마지막’, ‘영원’이 있음을 아는 자들은 이 ‘시간’의 덧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시간’속에서 믿음으로 ‘영원’을 묵상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자꾸 ‘위의 것’을 찾게 되는 것이지요(골로새서 3:2). 그리고 그들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고백이 ‘마라나타’가 되는 것입니다.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