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 기울이는 마음이 절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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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생활을 하다 보면 종종 인간관계에서 오는 어려움으로 힘들어하는 분들을 보게 된다. 나 자신도 예외가 아니다. 함께 신앙 생활하는 성도들 가운데서도 한국에서는 그렇지 않았던 것 같은데 이민을 오고 나서 인간관계에 어려움이 더 빈번하게 발생하게 되었다고 호소하는 이들이 있다. 삶의 터전만 바뀌었을 뿐 여전히 나로 살아가는데 왜 그런걸까 싶어 적잖이 고민(?)하기도 한다.

한국에 있을 때는 비교적 다양한 인간관계의 망이 있어서 내가 싫으면 피하면 되고 안 만나면 되었다. 그리고 맘에 맞는 사람, 다시 말해 코드가 맞는 사람하고만 교제하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이민 생활은 그 인간관계의 범위가 훨씬 줄어들 수 밖에 없다.

뉴질랜드에 이민을 간다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뉴질랜드의 도시환경, 교육, 복지 등 좋은 점을 중심으로 자료를 찾고 기대를 가지고 이민을 오게 되지만 정작 한인 이민자가 생활하게 되는 주 공간은 뉴질랜드에 있는 한인 커뮤니티에 국한되어지기 쉽다.

인간관계의 어려움은 전혀 모르는 낯선 이들과 겪기보다는 아주 가까운 관계에서 더 빈번히 발생한다. 대표적으로 가족 관계가 그것이다. 부부 사이, 부모와 자식 사이에도 관계의 어려움이 발생하고 그것은 곧 소통의 어려움 또는 단절이라 생각된다.

내가 쓰고 있는 안경으로만 보게 되면 상대방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아 나빠 보일 수 있다. 나에게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른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나쁜 감정을 갖게 되고, 사랑해야 할 사람들을 정작 사랑하지 못하고 살아가게 된다.

또 교회에서 다툼이나 논쟁이 생기면 늘 회피하려 하는 분들이 있다. 상대방의 말이나 행동에 대해 분명하게 자신의 뜻을 전달하지 못하고 회피하다가 나중에는 상처를 받았다고 불평을 늘어 놓는다. 무엇이 문제인가? 어디서부터 문제인가? 주목할 것은 이런 성향의 사람은 그곳을 피해 다른 곳에 가더라도 여전히 같은 일을 반복 경험한다는 것이다. 아직 자아가 미성숙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처음에는 좋아서 붙어 다니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오히려 손가락질하고 욕하는 사이가 되는 원수가 되어버린다. 이유는 지나친 자기 중심적 나눔이었기 때문이다. 자기 일방적인 사랑 방법이고 성숙하지 못한 사랑의 표현인 것이다. 내가 누군가에게 베풀었으면 반드시 그것에 대해 되돌려 받기를 원하는 마음이 작용하고 있었기에 상대방으로부터 내가 기대하는 반응이 나오지 않을 때는 서운해하고 섭섭해하는 것이다.

내가 하고 싶은 말과 사람들이 듣고 싶은 말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상대방은 듣고 싶은 말이 다를 수 있다. 내가 하고 싶다고 상대방이 다 좋아하는 것은 결코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정말 마음이 통하려면 서로를 배려하고 좋은 대화를 위해서는 소통이 필수적이다.

‘소통’이란 단어는 한자로 트일 소(疏), 통할 통(通)으로‘막히지 않고 뜻이 서로 잘 통하는 것’을 의미한다. 영어의 communication은 둘 또는 그 이상의 존재들 사이에 무엇인가 오고 가는 것을 일컫는다. 그래서 사람들이 말이나 정보를 주고 받는 것을‘의사 소통’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딥마인드가 개발한 다층 신경망(Deep Neural Network)과 큐 러닝(Q-Learning)을 조합한 심층 큐 네트워크로 무장한 인공지능(AI) 알파고와 인간을 대표하는 이세돌 9단과의 세기적 바둑 대결이 얼마 전 있었다. 이세돌 9단의 다섯 차례 대국에서 초읽기를 맡아 가까이서 지켜본 경력 7년차 계시원 정유정씨는 이번 대국에서 이세돌 9단이 다른 때와 다른 특이한 점을 발견하였다고 어느 인터뷰 기사에서 전하고 있다.
인공지능과의 대국에서 이세돌 9단은 유난히 혼잣말을 많이 하고 놀라거나 화난 표정을 자주 지었다. 이 9단은 알파고가 강한 수를 두면 ‘까시다(가시처럼 어려운 수라는 뜻의 바둑용어)’‘아이고’‘참’이란 혼잣말을 하곤 하였다는 것이다. 바둑 대국에서는 상대방과의 기세 싸움이 관전의 묘미인데 상대가 기계니 그런 걸 하지 못하고 혼자 말만 중얼거렸으니 가히 힘든 대국이었던 것이다.

소통을 잘 하려면 경청이 필요하다
소통이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통하지 않으면 고통이 오고, 통하지 않으면 분통이 터진다”는 말이 있듯이 우리는 통할 때 유쾌해진다. 통함을 통해 숨통이 트이는 것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인간관계의 문제 역시 소통의 문제인 경우가 많다. 소통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가면을 벗고 진실하여야 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진실할 때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누군가와 소통하기를 원한다면 무엇보다 마음을 열어야만 한다. 소통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너와 내가 하는 것이 소통이기에 먼저 상대방을 인정해야 한다. 소통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갈등이 심화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서로 담을 쌓고 있고 서로가 오고 갈 수 있는 다리를 태워 버린 상태인 것이다. 그런 면에서 소통은 무너진 다리를 다시 세우는 것과 같다. 소통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마음을 읽어야 가능하다. 상대방의 마음이 닫혀 있으면 아무리 좋은 말도 들리지 않는다.

또한 상처가 많으면 누구도 신뢰하기가 쉽지 않다. 그 상처로 얼마나 아팠을지 가늠하며 위로해 주어야 한다. 그것이 상처를 이해하고 보듬어 주어야 하는 이유이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소통을 잘 하려면 경청이 필요하다. 경청이란 귀 기울여 듣는 것이다. 상대방의 언어를, 상대방의 마음의 언어를 경청할 때 잘 소통할 수 있다. 경청의 본질은 사랑과 애정에서 가능하다. 사랑과 애정이 없이 상대방의 마음을 잘 경청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소통의 반대말은 불통이다. 어떤 말을 해도 일방적이 되고 위에서 언급한 것들과는 반대되는 상황이다. 성도, 목회자 모두 분별력이 필요하다.

열왕기상 3장에는 기브온에서 일천 번제를 드리는 솔로몬이 꿈에서 하나님께 한가지 구하는 기도가 나온다. 바로‘듣는 마음’이었다.“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9절) 하는 소원에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에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신다.

노아의 방주는 오늘날 교회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다. 제한된 공간에서 서로 다른 동물들과 가축들이 뒤섞여 내는 소리와 냄새는 가히 상상을 불허할 정도였을 것이다. 각자의 소리만 지른다면 우리의 가정과 교회는 정말 고통스러운 불통의 공간이 될 수 있다. 오늘날은 지혜로운 마음이 그 어느 때보다도 필요하다. 경청이 필요하다. 이웃의 소리에 귀 기울여 듣는 지혜가 필요한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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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봉학
서울신학대학교 및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졸. 크라이스트처치 로고스교회 담임목사. 이민 교회 목회자로, 교회 연합사역과 하나됨을 소중히 여기며 평신도 사역자와 더불어 건강한 교회를 꿈꾸며 목회하고 있다. 또한 교회 밖의 잃어버린 영혼들을 위해 코리안 헬프 라인 상담위원으로 섬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