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에 협력할 일이 있어 지역 어느 한 교회를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는 희한하게 가는 곳마다 애완동물의 변 냄새가 진동하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엔 제가 앉은 소파에 누가 변을 묻혀 놓았나 생각해서 자리를 옮겨보았지만 여전히 고약한 냄새는 계속되었습니다.
저는 그 교회의 청소상태가 불량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들고나니 그럴 수 있겠다 생각이 들었지만 찝찝한 기분이 사그라지지는 않았었죠. 특히 프로그램을 위해 아이들이 학교를 마치고 바로 오다 보면 미처 신발바닥을 깨끗이 할 겨를이 없었을 테니 누군가 잔디에 숨겨진 응가를 밟고도 모르는 체 교회까지 왔나 보다 여겼습니다.
그 교회에 한 두 시간 머물다 모임이 파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도 그 변 냄새는, 교회에 머무는 동안 배었는지, 계속 저를 괴롭혔습니다. 누가 묻혀놓은 오물에 내가 앉았었는지 내 옷에서 냄새가 나는 것 같았고 급기야 이젠 바로 코 밑에서 냄새가 나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집에 돌아오자마자 제 신발을 확인해 보았더니 글쎄 제 신발바닥에 변이 묻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아, 그 교회의 청소상태가 문제가 아니라 신발에 변을 묻혀 온 제가 문제였던 것이었죠.
그 교회를 방문하기 전에 잠시 시간이 남아 집 잔디를 깎았었는데 아마도 그 때 옆집 고양이의 변을 제가 밟았던 모양입니다. 그것도 모르고 그 교회 사람들의 매너가 어떻네, 청소상태가 어떻네 투덜댔었던 것을 생각하니 갑자기 얼굴이 화끈거렸습니다.
사실 내가 속한 공동체, 혹은 내가 만나는 사람들이 나를 짜증나게 하고 괴롭히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더러 있습니다. 그런데 그 원인을 찾아보면 그 짜증의 단초를 내가 제공했거나 나에게 개인적인 문제가 있어 그렇게 느낄 때가 생각보다 많습니다. 즉 내가 속한 공동체, 혹은 이 사회가 문제라기보다는 내가 문제였던 경우가 생각보다 많더라는 것이지요.
운전을 하다 보면 유난히 짜증나는 날이 있습니다. 운전자들이 운전을 난폭하게 하거나 서툴게 하고 매너 없이 운전할 때가 있어 짜증나는 날 말이지요. 그런데 종점에 차를 세우고 잠시 마음을 누그러뜨린 후 지난 운행을 되짚어보면 나의 운전습관이 문제였던 경우가 많았습니다.
난폭운전을 하는 사람이 많은 날은 내가 운행시간에 쫓겨 마음 급하게 운전했던 날이었고 누군가 서툴게 운전해 내 앞길을 막는 날은 내가 길이 익숙지 않아 헤매었던 날이었으며 누군가 매너 없이 운전하는 날은 내가 피곤해 신경이 날카로워진 채 운전하는 날이었더라구요.
결국 내게 문제가 있었음에도 남에게 문제를 전가하며 상대방을 무작정 미워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미워하게 되면 그 미움에는 끝이 없더군요
한번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이 꽂히면 그 어떤 상황에도 미움이 우선 적용되는 마법(?)을 경험하게 됩니다.
누군가를 미워하면 그 사람이 우로 앉아 있어도 밉고 좌로 앉아 있어도 밉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나가주기를 바라는데, 정작 그 사람이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가도 밉습니다. 심지어 자리에 앉아 있어도 밉고 서 있어도 미우며 여기 있어도 밉고 나가도 밉습니다. 웃어도 밉고 울어도 밉고 무표정이어도 밉습니다.
그런데 이 미움은 그 대상이 눈 앞에 없는데도 그 미움의 마음은 남아 내 영혼까지도 좀 먹게 만들어 하나님께서도 소중하게 여기시는 나의 존재를 하찮게 만들게 됩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 나를 빚으실 때에 누군가를 미워하고 정죄하라고 나를 빚으시지는 않으셨을 텐데 말입니다. 결국 누군가를 미워하는 것은 그 미움의 상대에게 피해가 간다기 보다는 나에게 더 손해가 되는 일입니다. 어차피 상대방은 내가 미워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있을 텐데 말이지요.
가만 보면 우리에게는 정말 많은 미움의 표현들이 있습니다
이건 저 사람 탓이야, 네가 하는 일이 그렇지, 네가 하는 일은 모두가 잘못되어 있어, 네가 하는 일을 내가 공정하게 심판해서 너의 잘못을 꼭 밝혀줄 것이야, 넌 악의 중심이야, 이 잘못된 모든 일의 원인은 바로 당신이야, 당신이 사라져야 비로소 평화가 찾아올 거야, 정말 잘 할 수 있는지 두고 보겠어, 네 앞가림이나 잘 하지, 네 주제에, 자기가 뭐라고, 말이라도 못하면 밉지나 않지…… 등등.
글로 써놓으니 참 무서운 말들이네요. 하지만 정작 우리 삶 속에서는, 우리 공동체 안에서, 가정 안에서 이런 표현들을 얼마나 자주 씁니까? 부끄럽지만 겉으로 웃으면서 저도 자주 이런 마음을 품었던 것 같아요. 그러면서 늘 나는 정의롭게 살고 있으니 공정하다고 자부했던 것 같습니다.
그 미움의 표현들 대부분은 내 기준으로 누군가를 정죄한 결과입니다. 절대 하나님의 기준으로 본 것이 아닙니다.
만약 하나님의 기준으로 보았다면 미움의 마음보다 긍휼의 마음이 앞섰을 것입니다. 이해하고 불쌍히 여기며 중보의 마음을 품었을 것입니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은 내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자리할 곳이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아니던가요? 내 뒤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께서 상대방을 위해서도 일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긍휼히 여김과 중보가 우선이어야 합니다. 정죄와 미움이 그보다 앞선다면 분명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마음이 아닙니다.
선과 악의 정확한 기준은 오로지 하나님 한 분 밖에 없습니다
선악을 내가 결정짓고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은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상당히 위험한 교만의 모습입니다. 안 그러려고 애쓰지만 아차 하는 순간에 또 정죄하고 판단합니다. 우리는 자꾸 무의식적으로 정의로운 심판관이 되려 합니다. 하나님이 되려 합니다.
분명히 악취는 나에게서 시작되었는데 다른 사람 때문에 이곳에 악취가 가득하게 되었다고 탓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무서운 습관인가요?
믿는 사람이라면,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군가를 평가하고 정죄하며 깎아 내리는 자리보다는 남을 세워주고 칭찬하며 격려하는 자리에 서는 것이 마땅하다 여겨집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약한 자들에게 하셨던 것처럼 말이지요.
세상 사람들이 화를 잘 내는 것 같고 세상이 나를 부당하게 대하며 심성 착한(?) 나를 자꾸 시험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 저는 분변 사건을 다시 되새깁니다.
나를 분노케 하는 원인은 세상이나 상대방보다 나에게 있는 경우가 더 많다는 것을 잊지 않으려고 하지요. 그래서 판단하지 않고 나에게 어떤 문제가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려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교만한 죄인이 되지 않기 위해서지요.
음……
저기 또 이상하게 주차를 해서 지나가는 모두를 불편하게 하는 차가 있네요. 버스정류장에 무식하게 주차한 운전자가 있네요. 어쩜 저리 몰상식할 수 있을까요? 왜 자기만 생각하고 다른 이를 배려하지 않을까요? 저런 차는 주차단속요원에게 딱지를 받게 해서 공권력의 힘으로 정의를 실현해야……
음……
제가 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