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공간의 기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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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5일은 광복절(1945년)이며 대한민국 정부수립일(1948년)이다. 최근 건국절 논란이 있는 바, 북한은 확실히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새로이 건국한 것이 사실이지만, 남한은 1919년에 세워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잇는다는 점에서 ‘광복’과 ‘정부 수립’이 국가의 정통성을 확고하게 하는 개념이다.

그래서 정부에서는 올해를 정부수립 70주년으로, 내년을 건국 100주년으로 기념한다고 한다. 광복으로부터 정부수립까지 3년간은 실제로 북한을 점령한 소련군과 남한을 점령한 미군이 통치한 기간이지만, 독립국가로서의 정부 수립을 약속하고 준비해 간 기간이므로 우리는 이 기간을 해방공간이라 부른다. 이 해방 공간에 어떤 일이 있었으며, 그 때 기독교는 어떤 역할을 하였을까?

제2차 세계대전은 1945년 5월 9일 독일이 항복하고 8월 15일 일본이 항복을 선언함으로써 드디어 끝났다. 온 세계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전사자가 2천5백만명, 민간인 사망자가 3천만명에 달하는 비극적인 전쟁이 끝났다. 이 전쟁이 끝남에 따라 우리 조국도 패전국인 일본의 서른일곱 해(만35년)동안 온갖 수탈과 억압을 받던 식민지 상태로부터 벗어났다.

5월 독일이 항복할 당시 일본과의 전쟁에 참전을 독려 받은 소련은 3개월 간의 준비기간 후에 8월 초일 대일전에 참전하였다. 태평양전쟁에서 이미 패색이 짙어졌던 일본에게 미국은 마지막 타격으로 8월 6일과 9일 히로시마와 나가사끼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였다.

8월 9일에 참전한 소련은 파죽지세로 만주국을 점령하고, 곧 북한으로 진주하여, 8월 15일에는 청진에서 전투가 벌어졌고 8월 22일에 일본군은 소련군에 항복하였다.

소련군의 급속한 진격에 놀란 미국은 황급히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한 남북 분할 안을 제의하였고 소련군이 이를 수락하여 38선이 그어졌다. 잠정적으로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한 분할점령으로 그어진 38선은 그 후 남북에 각각 이질적인 정부가 수립되고 전쟁을 거치면서 위치와 모양도 바뀌고 이름도 휴전선으로 바뀌어서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위험하고 적대적으로 대치하는 국경선으로 되었다.

9월7일 인천으로 상륙한 미군은 9월9일자로 맥아더 포고령 제1호를 발표하였다. 그런데 미군은 해방군이 아니라 점령군으로서 직접 통치하겠다는 것을 선언하였다. 미군정 3년 동안 모든 행정조직과 공공기관은 일제시대 총독부의 것을 그대로 유지하고 계승하였다.

미군은 남한에 대하여 너무나 모르는 상태에서 통치권을 행사했다. 이로서 해방 이후 일제잔재의 청산은 거의 불가능하게 되었다.

소련이 진주한 북한에서는 소련이 치밀하게 준비한 계획에 따라 공산주의 국가를 세워가고 있었던 반면에, 남한에서는 미군이 비교적 민주적으로 독립국가를 세우도록 하는 가운데 다양한 정파들이 나타나 활동하기 시작했다.

국내 지하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조직을 중심으로 한 건준이 있었고, 미군이 진주한 이후 송진우 김성수 등 우파 진영에서도 한국민주당(한민당) 결성하였다. 노동운동을 비롯한 무력투쟁을 주도해온 좌익은 조선노동당을 결성하였다.

해외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 세력도 귀국하기 시작하였는데 10월 16일 이승만이 귀국하였고, 중국에서 활동하던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1월 12월에 각각 개인자격으로 귀국하였다.

한민당, 국민당, 조선공산당, 건국동맹 등 다양한 정당과 사회단체들이 함께 모여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결성하였는데, 이 조직은 이승만을 지지하는 세력이 되었고 나중에 자유당으로 바뀌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출신 인사들은 한국독립당(한독당)으로 결집하였다.

1945년 말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결과로 신탁통치안이 발표되자 이를 계기로 국내 정치집단간 갈등과 반목이 극심하게 되었다. 이승만, 김구, 김규식 등 우익 인사들은 신탁통치를 적극 반대하였다. 그러나 좌익은 적극적으로 신탁통치를 찬성하였다.

두 차례에 걸친 미소공동위원회(1946년 3~5월, 1947년 5~10월)는 미국과 소련의 냉전이 점점 극한으로 치달아 가는 과정에서 실패하였다. 동유럽을 소비에트화 하는 소련의 팽창정책이 노골화 됨에 따라 미국은 트루먼 독트린으로 대표되는 반소정책을 펼쳤고, 미소의 대립은 점점 커져만 가고 냉전은 굳어졌다.

미소공동위원회가 실패하자, 미국은 한국 문제를 유엔에 넘겼으며(1947. 9.17), 유엔은 유엔의 감시하에 총선거를 실시하고 독립정부를 세우도록 결정하였다(1947.11.14).

신탁통치에 대한 좌우익의 견해차는 대체로 단독정부 수립에 대한 견해차이로 변화되어 갔다. 그러나 우파에 속한 김구, 김규식 등도 단독정부는 민족상잔의 전쟁을 예상되어 적극 반대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압제에서 겨우 벗어난 상태에서 다시 신탁통치를 받아들이는 것은 민족의 정서에 맞지 않아 찬탁을 주장하는 세력은 그 명분의 타당성과 무관하게 민중의 지지를 잃어갔다.

이처럼 다양한 정치 집단들과 세력들이 갈등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교회지도자들도 독립국가 수립을 위한 정치 참여에 대한 다양한 견해를 내놓았다.

해방 후 기독교의 국가 재건운동은 복잡하게 얽혀 있으나 대체로 세 개의 노선으로 나뉜다. 김규식이 중심이 된 조선기독교청년회(YMCA)전국연합회가 중도파, 삼일 독립선언에 참여한 바 있는 김창준을 중심으로 한 기독교민주동맹이 좌파, 이승만이 중심이 된 우파이다. 이들은 신탁통치 찬성 여부를 두고 갈등을 빚는다. 좌파는 신탁통치를 지지한 반면 우파는 강력하게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하였다. 이 노선간의 대립은 남한 내 단독정부 수립에 대한 의견대립으로 확대된다.

이승만을 지지하는 우파 세력은 단독정부 수립에 찬성한 반면, 좌파와 중도파는 반대하는 입장에 있었다. 남한의 교회는 단독정부와 남북협상 노선의 갈등 국면에서 이승만의 단독정부 노선을 지지하였고 중도파와 좌파의 교회 내 입지는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단독정부 수립에 강하게 반대하던 김구와 김규식을 중심으로 하는 중도파는 남북협상의 실패와 김구의 암살로 소멸되고 만다. 결국 남한의 교회는 우파로 편향된다.

일제로부터 해방되고 새로운 독립 정부를 꿈꿀 때 민족의 지도자들 중에 다수가 기독교인이었다. 이승만은 물론이고 김구, 김규식, 조만식 등이 기독교 인사이다.

당시 인구가 남북한 합쳐 약 3천만명 정도였는데 기독교 인구는 46만 명이었다. 전체 인구의 약 1.5%에 불과하다. 그러나 초대 제헌의회의 의원 가운데 20% 이상이 기독교인이었던 점에서 보듯이 기독교는 사회 지도층의 영향력이 있는 종교였다.

기독교를 믿는 민족지도자들은 우리 역사에 불교국가 유교국가이던 때가 있었듯이 지금은 기독교국가가 되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기독교국가를 세우기를 소망했다.

교회 지도자들도 이런 입장이었으니, 1947년 한 설교에서 한경직은 “해방된 오늘날 나라를 다시 찾아 나라의 주인공이 된 우리로서는 누구나 다 정치에 관여하여 국가의 흥륭을 기대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런 입장은 조선민주주의임시위원회 서기장이 된 강양묵 목사도 “이제는 민주국가의 모든 시민과 조직은 좋은 법안의 통과를 추진하는 일에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적극적인 정치참여 의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의 정서는 종교와 정치는 분리되어야 한다는 일제시대 선교사들의 방침의 영향으로 교회가 정치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하는 것을 반대하였다.

그 결과 기독교인 정치가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반면 교회는 소극적으로 반응하여, 정치에 간여하지 않는 부 작위의 정치행위를 한 결과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