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인과 마오리가 함께 예배했던 첫 마음 잊지 말아야

쿤타킨테의 7대손인 알렉스 헤일리가 쓴 책 ‘뿌리’는 한 흑인 노예와 그 후손의 파란만장한 삶을 다룬 이야기로 이것은 200년 만에 한 가계의 뿌리를 찾아가는 개인사를 넘어 아메리카로 잡혀온 흑인노예들의 총체적 삶을 되돌려 보는 계기가 되었다.

이처럼 역사 속에서는 인간의 어리석음과 힘있는 자들의 잔학상이 있었지만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는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기 위하여 장막을 치고 휘장을 넓히며 믿음의 말뚝을 견고하게 박는 사람들이 늘 함께 존재해왔다.

2016년에 새로운 연재를 시작하면서 이 땅의 기독교 역사의 뿌리를 찾아간다는 것이 미천한 나에게 개인적으로는 많은 부담이었지만 한편으론 사명을 가지고 이 땅에서 살고 갔던 믿음의 선배들을 찾아내서 다시 만난다는 것은 실로 가슴 벅찬 일이고 도전이었다.

그래서 작년 말부터 책을 구입하고 각종 사이트와 도서관을 찾아 봤지만 아쉽게도 한국말로 번역된 사이트나 참고 글은 한군데도 찾지를 못해서 원문을 번역하는데 많은 시간이 소요됐다. 그렇지만 저들이 불모의 땅에 복음의 씨를 뿌렸듯이 나 또한 선구자적인 거룩한 부담감이 끝까지 나의 등을 떠밀었다.

이번 호에는 간단한 개요를 쓰고 다음 호부터는 처음 선교사의 들어옴과 마오리 글을 만들어서 성서번역과 보급 그리고 각 교단 별 선교현황을 소개하면서 남북 섬 전국에 흩어져 있는 역사적인 교회와 현장들을 방문해서 소개하고자 한다.

기독교의 필요한 부분을 빨리 받아들여
이 땅에 기독교가 뿌리 내린 것은 영국 성공회 출신 사무엘 마스든(Samuel Marsden)이 마오리 Nga Puhi부족의 추장 Ruatara의 도움으로 선교를 시작한지 202년이 흘렀다.

물론 사무엘이 들어오기 전 1642년 네덜란드의 아벨 타스만이 뉴질랜드 탐사를 하고 간 뒤 1640년대부터는 뉴질랜드가 유럽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고, 그 후 1769년 영국의 캡틴 쿡이 들어온 다음부터 삶의 변화를 가져온 역동적인 시기였다. 감자를 가져와서 재배법을 알려주자 나중엔 주식으로 까지 발전시켰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 동안 부족간의 전쟁 시 나무나 돌로 된 무기로 싸우던 마오리들은 마스켓트(Musket)총이 들어오자 더욱 많은 인명 살상을 자행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과 함께 들어온 각종 질병으로 인해서 인구가 40% 급감하게 되었다.

유럽인들이 들어오기 전 마오리들은 이미 오래 전 남태평양에서 이주해올 때 함께 들여온 폴리네시안 종교를 약간 변형시킨 Mauri(모든 자연은 생명이 있다)라는 종교가 있었다. 예를 들면 Tane(숲의 신), Tangaroa(바다의 신), Rongo(농사의 신), 그리고 우리의 십계명처럼 2가지 계명이 있었다. Tapu(개인과 공공 장소에서 하지 말아야 할 규칙들)는 개인적으로 자기보다 많은 마나(Mana)를 가진 상위 계급의 사람을 못 만지는 것, 회당 같은 곳에서 만지지 못할 물건 등. 그리고 다른 하나는 마나이다.

이것은 영적 힘이다(Spiritual Power). 추장 등 마나가 많은 사람을 주려고 만든 음식을 마나가 적은 사람이 먹으면 안되고 죽음의 장소인 공동묘지 같은 곳에 가면 안되는 이 계명 때문에 Ruatara추장의 임종 시 사무엘 선교사가 만나지 못할 뻔 했었다.

그러나 19세기 초(1800년대)에 처음 복음이 전해 졌을 때 비교적 쉽게 전파 된 것은 기독교와 유사점이 있는 부분이 있어서 자기들 나름대로 필요한 부분만은 빨리 받아 들였다. 그것은 그들도 죽을 때 기도(Karakia)를 했었고, 성호같이 같은 말을 계속 반복해서 중얼거리는 의식이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기독교와 기독교의 컨셉은 받아 들였다. 마오리들은 독자적으로 아카로아 마오리 크리스천처치를 세웠다.

1880년도에는 Church of England 나 Roman Catholic의 마오리 등용의 영향으로 많이 개종을 하게 되었다. 심지어는 몰몬까지도 4,000명에 육박한 멤버를 만들었다. 아무튼 이 시기가 가장 뉴질랜드의 선교가 무르익은 시기다. 처음 뉴질랜드 선교에 첫발을 내디딘 사무엘 선교사는 그에게 허가된 4개월이 끝나 호주로 귀임 했지만 토마스 캔들 등 여러 명의 번역선교사들의 수고로 번역된 성경 덕분이다.

뉴질랜드에 찾아온 부흥과 더불어 불화의 역사도 있어
뉴질랜드 기독교 역사를 공부 하면서 한국에 토마스, 로스선교사와 이응찬, 백홍준, 서상륜 등이 있었다면 이곳 뉴질랜드에는 사무엘 마스든, 루아타라 추장 등이 있었다. 초창기 선교는 사무엘 선교사의 열정과 마오리와 함께한 동역선교가 주효해서 많은 결실을 거두었지만 지금은 풍요로움 속에서 그 빛을 잃어가고 있는 게 아쉽다.

나중에 더 자세히 다루겠지만 뉴질랜드선교 200년 동안 많은 부흥도 있었지만 각 선교 단체들 간에 알력과 선교사들간의 불화도 함께 있었음을 보면서 죠지 산타야나가 한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과거의 잘못을 반복할 수 밖에 없다”는 말을 다시 한번 떠올려 본다.

그리고 다시 한번 기대 해본다. 1814년 12월 25일 뉴질랜드 첫 공식예배가 드려질 때 루아타라 추장이 마련해준 예배처소에 25명의 백인들과 300명의 마오리들은 시편101편을 부르면서 그들은 하나가 되었고, 비록 의자가 없어서 카누를 엎어놓고 의자로 사용하면서도 사무엘 선교사가 설교한 누가복음 2장 10절 “Be hold, I bring you glad tiding of great joy”을 통해서 은혜가 넘쳐났다. 이 복음이 이들에게서 떠나지 않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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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길
뉴질랜드 구세군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구세군오클랜드한인교회 담임사관.루터의 독일, 장 칼뱅, 츠빙글리의 프랑스와 스위스, 얀후스의 체코, 네덜란드와 벨기에, 존 낙스의 스코틀랜드, 감리교와 구세군의 부흥지 영국, 종교개혁이 넘지 못했던 스페인, 무슬림의 땅 아부다비와 두바이를 답사하여 그들의 사역을 전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