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18일부터 20일까지 70시간에 걸친 이스라엘 독립 70주년 기념행사가 열렸다. 이스라엘은 히브리 달력에 따라서 독립기념일을 지켜서 그 날짜가 양력으로는 해마다 변동하지만, 독립선언을 한 날은 1948년 5월 14일이다.
그날 오후 4시 텔아비브 박물관(지금은 독립기념관)에서 다비드 벤 구리온은 250여명의 인사들을 불러놓고 이스라엘의 독립을 선언하였다. 팔레스타인 땅을 이스라엘의 영토(에레츠 이스라엘)이자 고대 이스라엘 왕국과 유다 왕국을 계승한 국가 이스라엘로 선포한 것이다.
연설대 뒤 벽에는 근대 시오니즘의 창시자 테오도르 헤르츨의 사진이 걸려 있었으며, 양쪽에는 ‘다비드의 별’이 걸려 있었는데, 오늘날 이스라엘 국기가 되었다.
그러나 이 날은 그 땅에서 살던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는 삶의 터전을 빼앗기는 재앙의 시작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해마다 5월 15일을 “재앙(나크바)의 날”로 기념하고 있다.
원래 이 날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이 땅을 다스려온 영국이 위임 통치를 끝내는 날이었다. 앞서 영국은 팔레스틴 땅에서의 유대인들과 아랍인 사이의 충돌과 갈등을 해결하지 못하고 유엔으로 넘겼다.
그 결과 1947년 11월 29일 유엔 총회는 팔레스타인 땅에 두 개의 나라를 분할하여 세우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결의안(유엔총회 결의 제181호)을 통과했다.
2000여년을 살아온 원주민이었던 아랍인들은 유엔이 팔레스타인을 분할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당시 120만명의 팔레스타인인들이 그 땅의 약 94%를 소유하고 있었고, 유대인들은 60만 명이었다.
그런데 유엔의 분할 안은 토지의 56%를 유대인의 몫으로 돌렸으며, 특히 올리브 농장과 곡창 지대의 80%, 아랍인 공장의 40%가 유대인의 땅으로 배정되었다. 유대인들은 즉각 환영하였으나 아랍인들은 자기들에게 일방적으로 불리한 유엔 결의안을 거부하였다.
유대인과 아랍인들의 대립이 첨예한 상태에서 영국은 위임통치를 끝내고 철수하기로 결정하였고,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의 독립을 선언한 것이다.
그날 5월 15일, 이스라엘의 독립을 인정할 수 없었던 레바논, 시리아, 요르단, 이라크, 이집트 등 팔레스타인 땅을 둘러싸고 있는 아랍국가들이 일제히 그 땅으로 침공하였다. 예상과 달리 이스라엘은 아랍 연합군들을 물리치고 1949년 4월에 휴전을 하였다.
이 전쟁의 결과 이스라엘은 유엔결의안에서 분할된 영토보다 22%나 더 넓은 땅을 차지하여 오늘날 이스라엘의 경계선을 이루었다.
땅을 차지하기 위한 전쟁
유대인들과 아랍인들의 충돌은 테오도르 헤르츨을 비롯한 시오니스트들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유대인들은 팔레스틴 지역의 농토를 매입하고 이민을 시작하면서 충분히 예견되었었다.
사실 유대인들이 안정된 삶을 버리고 척박한 팔레스틴 지역으로 이주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19세기 이래 유럽 각 지역의 반 유대주의가 점차 심해지면서 박해를 피해 팔레스틴으로 이주(알리야)가 점차 늘어났다.
대표적인 사건은 제정 러시아 시대 포그롬(반 유대인 박해)인데, 1891년 모스크바 총독 세르게이는 모스크바에서 2만명의 유대인을 추방하였다.
이후 1914년까지 200만명의 유대인이 러시아를 탈출하여 85퍼센트는 아메리카로 갔고 나머지는 유럽 각국으로 들어갔으며 오스만투르크의 이민 금지정책에도 불구하고 수 만명이 팔레스틴으로 이주하였다.
특별히 독일의 히틀러가 집권한 후 유대인들에 대한 인종청소를 하면서 600만명이 살해를 당하였고, 살기 좋은 곳을 찾아 이민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이민을 해야 하는 절박한 이민자들이 늘었다.
헤르츨을 이은 시오니스트의 지도자 벤 구리온 등은 일찌감치 이스라엘 국가 설립을 염두에 두고 체계적이고 조직적으로 유대인들의 이민을 유도하였다.
1928년 영국은 팔레스타인을 식민지가 아니라 영국의 세력권 아래 있는 하나의 국가로 간주하고 의회를 구성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당시 인구의 90%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아랍인들과 10%에도 못 미치는 유대인들을 대등하게 구성하였다.
영국의 부당한 처사에 반발한 팔레스타인인들이 봉기를 하였다. 1936년에도 봉기가 다시 일어났다. 결국 영국정부는 인도보다 더 많은 군대를 팔레스타인에 주둔시키며, 3년 뒤 팔레스타인 농촌을 무자비한 공격과 함께 진압하였다.
팔레스타인 지도부는 망명길에 올랐고, 영국군에 맞서 게릴라전을 하던 팔레스타인 민병대 부대들은 해산을 당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체포되고, 부상을 입거나 살해당하였다. 팔레스타인 지도부와 전투조직이 대부분 와해된 상태에서 유대 군대가 팔레스타인 농촌지역을 장악해 갔다.
반면에 영국군 장교 윙게이트는 유대인 민병대 하가나를 영국군에 배속시켜 정규군의 군사훈련을 받게 하였다. 이것은 이스라엘 독립을 전후한 전쟁에서 이스라엘의 승리를 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이스라엘 건국은 예언의 성취인가?
최근 기독교 단체들의 대규모 집회에 이스라엘 기가 등장하였다. 이 현상에는 이스라엘 건국이 성경에 기록된 예언의 성취라는 믿음과 연관이 있다.
사실 이스라엘 독립선언서를 작성할 때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과 관련한 논쟁이 있어서 결국은 타협 책으로 “이스라엘의 바위”라는 말을 넣었다. 이스라엘 독립을 선포한 사람도 예언의 성취라는 자각은 없었다.
이러한 예언 성취 주장은 소위 메시아닉 쥬의 영향이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메시아닉 쥬는 원래 유대인 가운데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는데, 최근에는 그들의 사고를 받아들이는 그리스도인들의 부류를 일컫는 말로 확대되었다.
메시아닉 쥬는 이스라엘 건국은 이스라엘의 회복의 증거이며, 그것은 에스겔서에서 예언된 마른뼈가 살아나 군대가 되는 예언의 성취라고 한다. 이스라엘이 이미 건국되었고 제3성전의 건축계획이 비밀리에 추진되고 있는 것은 바로 이스라엘의 회복을 약속하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결과라고 한다.
그렇게 온 세계에 흩어져 있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한 자리에 모일 때, 오순절 때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한꺼번에 3000명, 5000명이 회심하는 역사와 같은 일이 일어나 모든 유대인들이 구원받게 될 것이라고 한다. 이스라엘의 구원은 마지막 때의 증거라고 한다.
과연 이스라엘의 건국과 오늘날의 이스라엘 모습은 성경 예언의 성취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