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일을 하시는 군요. 신문사를 운영하기 쉽지 않을 텐데 대단하시네요”
가끔 나 듣기 좋으라고 칭찬의 말씀을 해주시는 분들을 만나곤 합니다.
사실 나는 몇 년 동안 신문사를 운영해 오면서 ‘큰일’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거의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원래 신문쟁이도 아니요, 글쟁이도 아니요, 사업가는 더더구나 아니기에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지라 큰일은 하나님의 몫이요, 나는 그저 최선을 다하는 것 뿐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저 목회자 사모로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일들을 잘하든 못하든 최선을 다하면 된다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나름 아주 자유로운 영혼입니다.
나도 한때는 큰일을 해보려고 설치고 날뛸 때가 있었습니다. 원래 나의 꿈은 정치가였습니다. 웅변으로 잘 다져진 목소리와 담력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 앞에 서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장여인(?)의 기질따라 김두한이 국회에 똥 바가지를 쏟아 부었다면 나는 똥지게를 쏟아 부을 용기도 있다고 객기 어린 생각을 하기도 했었습니다.
국회에 금뺏지 달고 들어 가는 것을 이루기 위해 무던히도 날뛰던 세월들 속에서 그것이 나에게 주어진 사명이라 생각했고, 세상의 모든 불의와 맞서 싸워야 한다는 것이 저의 신조이기도 했습니다. 가난하고 억눌린 자들을 위해 앞장서서 저들을 대변하고 저들을 구원(?)해야 한다는 것이 삶의 지표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요. 우리 하나님께서는 나에 대한 다른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세상에서 정의를 외치고, 세상의 불의에 대적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을 전하고,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교회를 개척하시고, 교회를 지어 봉헌하셨던 나이드신 부모님과 많은 형제들 밑에서 막내로 자란 저는 유독 고집이 세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성격인지라 하나님이 잡아다 쓰시기에는 너무나도 천방지축 마골피, 고집불통, 꼴통이었나 봅니다. 결국 채찍을 드시고야 말았습니다. 황해도 씨름 선수셨던 건장한 아버지를 한방에 무너뜨리셨습니다.
그날은 몇 십 년 만에 엄청나게 많은 눈이 내린 날이라고 했습니다. 정말로 주먹만한 함박눈이 펑펑 내렸습니다. 온 세상이 온통 하얗게 눈으로 덮혔던 그날, 나는 아버지가 누우신 병실 구석 창가에서 그동안 멀리했던 성경책을 찾아 들고 무릎을 꿇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만 살려주시면 제가 서원했던 주의 종의 길을 가겠습니다.” 2차 서원이었습니다. 중학교때 했던 1차 서원은 옛적에 물 건너 갔고, 아버지의 병상에서 2차 서원을 다시 드렸습니다.
결국 아버지는 이십여 일 만에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본향으로 돌아 가셨고, 세상을 변화시켜 보겠다고 날뛰던 나는 아버지 가신 뒤 하나님의 낚시줄에 꿰어 주의 종의 길로 붙잡혀 돌아왔습니다. 안돌아오면 나도 죽을 것 같았습니다.
세상에서 내 나름대로 큰일을 해보겠다고 날뛰던 모태신앙이었던 나는 그렇게 하나님 앞에 순한 양(?)이 되어 오늘까지 오도가도 못하고, 도망도 못가고 은혜로 여기까지 왔습니다.
큰일이요? 이 우주만물에서 내가 살고 있는 지구 땅덩이는 먼지만도 못하고, 그 먼지만도 못한 지구 속에서 살고 있는 나라는 존재가 세상을 위해서 큰일을 하면 얼마나 큰일을 할것이며, 하나님을 위해서 큰일을 하면 얼마나 큰일을 하겠습니까?
이름을 날려본들, 커다란 프로젝트를 이뤄본들, 숫자에 묶여 있는 성공을 했다한들 그것이 하나님 앞에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진정한 큰일은 내가 있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을 최선을 다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큰일한다는 사람치고 여기저기 떠도는 나그네는 없습니다. 큰일한다고 유리방황하며 매일 헤매는 사람은 없습니다. 있는 내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사람, 그곳이 어떠한 곳이든, 상황이 어떠하든지 나에게 주어진 그 자리에서 견디고 이기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큰일을 하고 있는 사람아니겠습니까?
오늘 내가 서 있는 자리, 오늘 내가 앉아 있는 자리, 오늘 내가 머문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보십시오. 내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지, 어디를 가려고 방황하고 있는 지…
가던 길 멈추고 내가 있어야 할 그 자리를 지켜보셔요.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서는 나를 통해 큰일을 행하실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