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죽음을 슬퍼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

“당신을 믿는 자들이 영생을 한다는 것은 결코 죽지 않는다는 말인가, 아니면 죽었다가 음부에서 다시 부활한다는 뜻인가?”

“앞으로 나를 믿는 자들도 여전히 육신의 죽음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누구든 구원 받기 전에 죄 가운데 하나님이 정한 수명의 제한된 육신으로 태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나를 믿고 구원 받게 되면 육신의 죽음은 죄로 인한 대가가 아니며 영생으로 가는 시작이 될 것이다. 영생으로 가기 위해서 그들은 제한된 육신의 옷을 벗어 던져야 한다.

그러나 그들의 육신은 비록 죽어 썩어져도 영혼은 사망의 늪인 음부에 보내지지 않을 것이고 곧 바로 내가 있는 천국으로 건져질 것이다. 그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요한복음 11:25-26)”는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기독교의 논리가 예수를 믿으면 죽어서 천국에 가고 믿지 않으면 죽어서 지옥에 가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예수의 이런 설명을 들으니 그 의미가 전혀 다르게 느껴졌다. 즉 예수를 믿는 자들은 육신의 죽음이 영원한 생명의 시작이고 믿지 않는 자들은 육신의 죽음이 실제적 죽음의 시작이라는 말이 아닌가?

이는 로마서에서 바울이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로마서 5:21)” 고 한 말을 생각나게 한다.

“그렇다면 당신은 지금 당신을 믿는 자들은 육신의 죽음을 슬퍼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아야 하며 오히려 기뻐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인가?”

“하하, 그렇다. 진정으로 믿는 자들은 그렇게 될 것이다. 이제 곧 너희는 나를 믿는 자들이 나로 인해 핍박 받고 처형 당하게 될 때 기뻐하며 육신의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이들이 기뻐하는 것은 비록 죽임을 당할 때 육신의 고통이 따르고 사랑하는 가족과 이별의 슬픔이 있을 지라도 그것은 잠시의 괴로움이고 곧 영원한 생명 가운데 들어간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나는 초대교회 기독교인들이 로마제국으로부터 핍박 받아 때로는 사자 굴에 던져지고 화형 당하고 십자가형을 당해도 자신의 믿음을 지켜갔던 그 놀라운 힘이 어디서 나왔는지 이해가 되는 것 같았다.

“그럼, 3일 후 부활할 것을 알면서도 당신은 왜 십자가 죽음 앞에서 기뻐하지 않고 그토록 괴로워했는가?”

“하하, 마치 나를 겁쟁이처럼 말하는 구나. 이미 말했듯이 나의 십자가 죽음은 예정된 것이었고 그것을 아버지의 뜻에 따라 결정할 때 나는 기쁜 마음으로 순종하였다. 내가 기쁜 마음으로 그 일을 한다고 고통이 없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나를 믿는 자들 또한 죽음을 기쁘게 맞이한다고 그들이 고통을 느끼지 않게 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고통 후의 영광을 알기에 그것을 기쁜 마음으로 인내해 내는 것이다.

나는 인간으로서 십자가의 고통을 고스란히 받아내야 했기에 그것이 힘들기도 했지만 영적으로는 더 큰 고통을 겪어야 했다. 너희는 원래부터 존재했고 영원히 존재하는 생명의 존재가 아무리 짧은 3일간의 기간이라도 죽음이라는 단절의 과정을 경험해야 하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모를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와의 교제의 단절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상상할 수 있겠니? 원래 너희 인간의 육신은 흙에서 났으니 육신의 죽음이란 원래 상태인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라서 두려워할 것도 슬퍼할 것도 없어야 한다. 그런데도 너희 인간은 살아있는 동안 마치 원래부터 존재했고 영원히 살 존재처럼 스스로 착각하여 죽음을 앞두고는 공포와 슬픔에 빠지지 않느냐?

그렇다면 실제 원래부터 존재했고 영원히 존재하는 자가 그의 본래적 상태와 정반대인 죽음을 겪어야 할 때는 어떠하겠는가?”

“당신이 말한 부활이 영혼의 건져짐을 의미한다면 왜 당신이 부활하여 제자들에게 나타났을 때 그들이 영으로 생각하고 두려워하는 것을 보고 당신은 두려워 말라고 하면서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당신은 있다고 하며(누가복음 24:37-40) 손과 발을 보였는가? 그것은 부활을 육신의 부활임을 말하려고 한 것이 아닌가?”

“좋은 지적이다. 육신의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개인들과의 논쟁(마태복음 22:23-33)에서도 나는 그것에 대해 말한 바 있다. 사람들이 부활에 대해 오해하는 것은 부활을 죽었다가 그대로 살아나는 걸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생각해 보라. 그러면 그 죽은 자는 부활할 때 어느 때의 모습이 되어야 할까? 죽은 당시의 모습으로 부활한다면 늙어 죽은 사람은 늙은이로 부활하고 어린아이로 죽은 이는 어린아이로 부활해야 하지 않는가? 이 얼마나 우스운 부활인가?

내가 그때 그들에게 말한 바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라고 한 것은 바로 죽은 자 가운데 하나님을 믿는 자들의 영혼을 건져낼 것을 의미한 것이다. 또한 부활할 때는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을 것이라고 한 것은 육신이 부활할 때 그 육신은 죽기 전의 육신과는 전혀 다를 것을 의미한 것이다.

그런데 나의 부활은 너희의 이런 부활을 예시한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공통점을 내포하지만 현실적 필요에 의해 좀 다른 면을 갖고 있다. 앞서 말했듯이 내가 부활하여 제자들에게 나타난 것은 무엇보다 그들의 믿음을 확고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나의 십자가 죽음으로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날 때 그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십자가에 못박혔을 때의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아직도 부활을 단순히 죽은 자가 살아나는 걸로만 알고 있는 제자들에게 나의 부활을 확신시켜 주기 위해서이다. 나의 시신이 무덤에서 사라진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하면 된다. 시신이 그대로 있다면 부활했다고 믿지 못할 것이다. 물론 나의 육신은 썩지도 않았거니와 지금 네가 보듯 이렇게 다른 형태로 변화했지만 말이다.”

“당신의 설명이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부활의 본질은 영적인 것을 의미한다는 것인가, 아니면 육신의 부활을 의미한다는 말인가?”

“앞서 말했듯이 부활은 본질적으로 영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본래 인간의 생명은 육신에 하나님의 생기가 불어 넣어짐으로 생기지 않았느냐? 그리고 성경을 통해 사람은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고(신명기 8:3) 늘 강조했고 내가 곧 생명의 떡이요 영원한 생수임을 말하지 않았더냐? 이 모든 것이 생명의 본질은 영적인 것에 있음을 깨우쳐 주려 함이니라.

그렇다고 육신의 부활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그 육신의 부활이라는 것은 최후의 심판이 이루어지고 비로소 이 세상이 새 하늘 새 땅으로 재창조될 때 구원받은 영혼들에게 새로운 육신이 덧입혀 짐을 의미한다. 새로운 육신은 지금 너희가 갖고 있는 그런 육신과는 전혀 다른 완전한 육신일 것이다(고린도전서15: 49).”

“그렇다면 영혼이 음부로 가지 않고 건져져 영생을 누리면 되지 그런 육신의 부활은 왜 필요한가?”

“그것은 애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할 때 하늘 나라는 천사들과 같은 영적인 존재들로 구성하였지만 이 땅은 물질적 세계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우주 만물을 만드신 것은 이 물질 세계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너희 인간은 바로 이 물질 세계의 지배자로 하나님을 대신하여 그의 영광을 이 땅 가운데 가득히 드러낼 존재로 창조되었다.

비록 너희는 죄로 인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못했으나 하나님은 그의 뜻을 포기하지 않는다. 아니 이런 예정된 구원의 과정을 통해 이 땅을 보다 완벽하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세상으로 만드시고자 한다.

그래서 구원된 영혼들은 반드시 새로운 육신을 덧입게 되어있고 재창조된 이 땅에 하나님의 영광을 완전히 드러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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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웅
연세대 졸업. 한국 워킹우먼 전 편집장. 해밀턴 지구촌교회에서 집사로 섬기고 있는데, 2016년 대장암 판정을 받고 2년 여의 항암 투병기간을 보내던 중 자신이 만난 예수를 인터뷰 형식으로 쉽게 풀어 예수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복음의 핵심을 함께 나누고자 이 글을 썼다. 2018년 1월 22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그의 유고를 분재한다.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른 시각의 기사가 실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