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목사가 성도의 집에 심방을 가서 예배를 드리면서 ‘성경책이 몇 권인지 아세요? ’질문하자 교회 출석을 잘 하지 않는 성도의 남편이 ‘선반 위에 한 권 있고, 집사람 가방에 한 권 들어 있고, 서너 권 되는 것 같다’고 대답했다. 신구약 성경 66권을 물었는데 이 남편은 그 말의 의미를 잘못 알아들었던 것이다.
요즘처럼 다양한 성경번역본이 있은 때도 일찍이 드문 것 같다. 우리말 성경, 쉬운 성경, 현대인의 성경, 공동번역, 새 번역, 개역 성경, 개역 개정 성경 등 열손가락에 꼽기도 힘들 지경이다.
어디 그뿐인가? 영어 성경도 아주 고전이라 할 수 있는 KJV을 비롯하여 NIV, NLT, NASB 등 정말 즐비하다. 물론 일본어 성경, 중국어 성경 등 각 나라 말로 번역된 성경이 허다한 세상이다.
1960년대 말, 성탄절 무렵 교회 가면 떡을 준다는 친구의 ‘거룩한 유혹’에 넘어가 교회 문턱을 넘었다. 거룩한 유혹은 대의 명분일 뿐 먹을 것이 생긴다는 황홀한 욕심에 넘어간 것이 더 제대로 된 핑계일 것이다.
그렇게 신앙 역정이 시작되어 50 중반, 희끗희끗한 새치 머리가 한 여름 외손주처럼 제 집인 양 오가는 벗이 되어가고 있다. 교회보다는 예배당이라는 말로 더 많이 회자되던 그 시절, 교회를 다니기는 했으나 내가 가진 성경책은 없었다. 책가방 없이 학교 가는 학생처럼 왔다 갔다 할 뿐 성경책의 필요성도, 들고 다닐 성경책을 지닐 형편도 못되었기 때문이다.
허름한 성경책
예배당에 다닌 지 2,3년쯤 지난 후로 기억된다. 함께 교회를 다니던 3살 많은 형이 보기에도 허름한 성경책 한 권을 가지라고 주었다. 하지만 주제도 모르고 너무 허접하다는 생각에 별로 달갑지는 않았다. 그래도 내 것이니까 하는 마음으로 성경책을 펼쳐보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글자의 배열이 지금처럼 가로 형이 아닌 세로 형이었다. 익숙하지 않은 글자 배열이라 읽다 보면 저절로 고개가 오르락 내리락 끄덕여졌다. 게다가 어디 그뿐인가. 드문드문 한자가 섞여 있었다.
초등학생의 실력(?)으로는 한자가 섞인 성경을 읽기는 무리였다. 그렇지 않아도 첫인상이 별로 좋지 않은지라 덮어버릴까 하다가 그 형의 성의를 생각해서 더듬더듬 읽었다. 당시의 성경책 표지는 천편일률적으로 검은 색 바탕의 딱딱한 재질에 겉은 한결같이 붉은 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그러다가 한자가 섞이지 않은 성경책이 나오고 표지 역시 특유의‘딱함’을 벗어버리고 비닐로 된 것이 눈에 띄더니 어느 새 인조 가죽에 지퍼가 달리고 글자 배열 역시 가로로 인쇄가 되고 형형색색의 칼라가 들어가기 시작했다. 요즘은 그야말로 보기만 해도 저절로 읽고 싶은 금박에 세련의 최첨단을 달리는 디자인 된 성경책들이 홍수처럼 쏟아지고 있다.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
성경책의 외형 변천사를 소개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보잘것없고 그 허름한 한 권의 성경책이 오늘 여기에 있게 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다. 물론 내 자신이 뭐 그리 대단한 사람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그 너덜너덜하고 딱딱한 성경책 한 권이 까마득한 옛날 하늘이 처음 열리는 듯한 촌락의 한 사람을, 아무도 주목하지 않고, 관심 두지 않던 한 사람을 그리스도인이 되게 했다는 것이다.
중학교 1학년때 요한복음을 읽으면서 적어도 내게만큼은 기막힌 깨달음의 사건이 있었다. 1:1절에“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는 말씀으로 시작되어 14절에 가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는 말씀을 읽으면서 그 말씀이 그대로 믿어졌고 이해되어졌다.
‘그렇구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구나,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시구나’하는 사실이 깨달아졌다. 놀랍고 흥분과 감동의 순간이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한 베드로의 마음이 이랬을까? 아무도 모르는 사실을 혼자서만 알게 된 것처럼 기뻐 어쩔 줄 몰랐다.
지금 생각해보면 철부지 시절에 그 사실을 깨달아진 것이 참 대견스럽고 기특하게 여겨진다. 물론 성령께서 그 깨달음을 주셨음은 지극히 당연하다. 이후로 그 말씀은 내게서 떠나지 않았음은 말 할 것도 없고 내 신앙의 기초요 자양분이 되었다.
그 말씀이 오늘 여기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 서 있게 했다. 지금도 종종 그때가 떠오르기만 하면 감격스럽고 감사하다.
한 가지 아쉬움은 그 허름한 성경책을 간직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내게 있는 가장 오래된 성경책은 1964년 개정된 대한 성서 공회가 발행한‘관주 성경 전서 국한문 개역’으로 1983년도에 인쇄된 여백 성경책이다. 여백 성경책이라 함은 말씀을 묵상하다가 하나님이 주시는 메시지를 적을 수 있도록 책이름처럼 여백이 많은 것이 특징인 성경책이다.
자녀들에게 신앙의 흔적으로 물려주고 싶은 마음 간절하나 요즘 세대들이 한자를 모를뿐더러 세로로 된 책을 읽어보지 않아서 행여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밟히는 소금처럼 천덕꾸러기가 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스러운 마음이 드는 게 사실이다.
IT 발달의 유감
한편, 현대는 IT의 발달로 컴퓨터나 핸드폰에 성경책과 관련된 앱을 다운 받을 수 있어서 언제, 어디서나 누구나 원하기만 하면 성경을 들을 수도 읽을 수도 있다. 심지어 전자 성경책도 있다.
참 편리한 세상이다. 이러다 보니 교회를 오면서도 아예 성경책을 가지고 오지 않는다. 젊은이들에게는 이미 평범한 예삿일이 되었고 기성세대들조차도 여기에 편승해가는 모양이다.
하지만 다른 때는 몰라도, 예배 시간에 성경책이 아닌 핸드폰으로 말씀을 찾아서 보고 읽는 것은 하나님께 불경스럽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찜일까? 너무 시대에 뒤떨어진 구태에 젖은 비약적인 생각일까?
성경책을 너무 쉽게 그리고 편하게 어디서든 보고 들을 수 있다 보니 성경책의 소중함을 모르는 것은 물론 소홀히 여기는 현상이 초래되고, 이 현상은 성경을 읽지 않는 결과를 낳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대동강변에서 죽어가면서 던져진 토마스 선교사의 쪽 복음 한 권이 구 한말 가난과 망국의 한을 품고 술과 도박으로 살아가던 젊은이들에게 상전벽해의 삶을 가져오게 하여 조선을 변화 시켰고, 대한민국이 되게 했고 오늘 우리들에게 그들은 믿음의 선배, 위대한 신앙의 조상으로 우뚝 서 있다.
다 성경말씀의 능력이 아니든가? 그렇다면, 성경은 나를, 우리를, 나라를 바꾸는 힘이라는 진리를 증명하고 있는 셈이다. 이것을 알리고 깨닫게 하는 삶이 목사에게 주어진 사명이 아닐까?
요한복음의 한 구절이 그리스도인으로 또 어설픈 목사로 지금 여기에 자리매김을 하게 만들었다. 지금, 어디선가 누구에게 성경이 말씀하게 하여 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는 데 목사에게 맡겨진 성경의 힘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