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첫째 주 찬송 <8장 거룩 거룩 거룩>
꽤 오래된 이야기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미국에 유학을 가 신학교에 입학을 했습니다. 매일 예배를 드리며 찬송을 부르는데 본인이 아는 찬송을 한 장도 안 부르더라는 거 예요. 그가 아는 찬송도 거의 미국 곡인데 말이죠.
하도 궁금해서 룸메이트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이 학교에선 내가 아는 찬송을 왜 한 장도 안 부르지?”라고요. 그랬더니 친구가 되물었습니다. “너희 한국에선 무슨 찬송을 부르는데?” 그래서 이렇게 대답했다죠. “‘주 안에 있는 나에게’,‘태산을 넘어 험곡에 가도’,‘울어도 못하네’ …” 그랬더니 그는 껄껄대고 웃으면서 이렇게 말해주었습니다.
“그 건 찬송(hymn)이 아니고 복음가(gospel song)야.”라고요. 갑자기 헷갈리죠? 우리가 잘 아는 찬송들이 찬송가에 다 들어있는데 찬송이 아니라니요?
초기 기독교의 지도자인 어거스틴(St. Augustine, 354-430)이 말한 찬송의 정의를 소개하겠습니다. 그는 찬송이란 찬미하는 노래로서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인데 그중 한 가지만 빠져도 찬송이 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찬미’,‘노래’,‘하나님께 드려짐’을 가리켜 흔히 ‘찬송의 3요소’라 일컫습니다.
오늘은 어거스틴의 찬송의 3요소 중 첫 번째 요소인 ‘찬미’를 중심으로 예배 찬송인 ‘거룩 거룩 거룩’(8장)과 복음가인 ‘울어도 못하네’(544장)를 비교해 보겠습니다. ‘울어도 못하네’의 가사에선 찬미의 내용을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혹 나타날까하여 끝까지 불러봐도, 후렴에 “나를 구원 하실 이 예수 밖에 없네” 라든지, 4절에서 “오직 주께 나가면 영원 삶을 얻네”로 끝났지, 감사하다든지, 영광을 돌린다든지 하는 찬미의 내용이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울어도 못하네’는 ‘찬송’(hymn)이 아닙니다. 그런데 ‘거룩 거룩 거룩’을 보세요. 처음부터 “거룩 거룩 거룩 전능하신 주여! 이른 아침 우리 주를 찬송 합니다” 하지 않습니까. 찬송, 경배, 감사, 찬미, 영광, 존귀 같은, 드리는 내용이 있어야죠. 즉 찬송가는 예배적이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곡명 NICAEA는 소아시아 비누니아 지방에 있는 지금의 이즈닉의 옛 도시이름인데, 그 곳에서 열렸던 니케아 공의회(Council of Nicaea, 1차는 325년, 2차는 787년)의 이름에서 따온 것입니다.
‘니케아신조’(Nicaea Credo)를 채택한 이 공의회에선 그리스도의 신성을 거부하는 아리우스주의자들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결합을 ‘호모우시오스(homoousios, 동일본질성)’란 단어로 표현하고 삼위일체론을 확고히 하였지요.
그런 의미에서 제목만 보고서도 이 찬송은 삼위일체 하나님께 드리는 귀한 찬송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찬송은 멜로디를 보나 시로 보나 너무나도 아름답습니다. 노래를 시작하면서 음이 계단처럼 한 층, 한 층 올라가죠? ‘도도 미미 솔솔’하면서…‘도 미 솔’하며 계속해서 오르면 제일 높은 정점은 어디이겠습니까? 이는 하나님의 존전을 향하여 한 걸음 한 걸음씩 올라가는 모습을 연상케 하는데요, 이 역시 어화(語畵, word painting)로서 음의 상징(tone symbol)이라 볼 수 있습니다.
네째 단 첫 소절을 보면 우리 가사에서 ‘성삼위 일체’ 의 ‘성’ 자가 제일 높은 음인데, 영어 원문 가사의 ‘God in three Persons’에서 ‘God’에 이르는 것입니다. 위 음 ‘도’의 그 높은 곳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보좌 앞에 오른 것이죠.
그뿐만이 아닙니다. 가사를 살펴보면 ‘거룩 거룩 거룩’ 하는 처음 시작 부분도 요한 계시록 4장 8절 말씀인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의 영어 성경 본문을 “Lord God Almighty” 라고 찬송 시에 그대로 인용되고 있어 더욱 성경적이어서 은혜롭습니다. 찬송 시가 지닌 문학적인 아름다움도 빼 놓을 수가 없습니다.
영어찬송을 불러보면 금방 느낄 수 있는데요, 영어찬송 가사에서 4째, 8째, 10째, 12째, 16째 마디 모든 끝 음의 발음이 ‘이’(i)모음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주 단어인 ‘Holy’는 물론이고,‘Almighty’ ‘Thee’ ‘see’ ‘sea’ ‘seraphim’ ‘Mighty’ ‘Trinity’ ‘be’ ‘purity’등 모두 ‘이’ 모음으로 끝나죠?
운(韻, rhyme)이 착착 맞아 들어가 시를 더욱 아름답게 합니다. 각 행의 처음 시작하는 구절도 마찬가지인데, ‘Holy’‘Lord’ ‘All’ ‘Tho’ ‘Early’ ‘Only’ ‘God’ ‘Perfect’ 같은 단어로 거의 ‘어’ 모음으로 되어 있지요. 이런 시적 감흥을 우리말로 옮기기는 절대 불가능하지요.
우리 찬송가에 작사자인 히버(Reginald Heber, 1783-1826)의 찬송은 다섯 장, 작곡자인 다익스(John Bacchus Dykes,1823-1876)의 찬송은 열 장이 실려 있습니다.
2월 둘째 주 찬송<544장 울어도 못하네>
앞서 8장 찬송과 이 찬송을 비교한 바 있지요. 그도 그럴 것이 복음가(gospel song)는 예배 찬송과는 달리 주님과 멀리 있는 사람들에게 주님과의 관계를 설명하고 주님께 돌아오길 설득하는 노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찬송가의 내용이 찬송, 경배, 감사, 찬미, 영광, 존귀 같은 드리는 내용, 즉 예배적인데 비해 복음가는 십자가, 피, 용서, 부르심, 영접, 회개, 사죄, 구원 등이 주 내용으로 복음적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미국에서 독립전쟁을 전후해 극도로 죄악이 극심하던 때에 때마침 매사추세츠 중심의 대각성운동(The Great Awakening), 그리고 이 후 서부 켄터키에서의 대부흥운동(Great Revival)이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부흥집회에서 부르는 새로운 장르의 노래들은 대중들에게 폭발적인 호응을 얻게 됩니다.
교회에서는 그 이전까지 밋밋한 시편가를 불렀었거든요. 화이트 필드(George Whitefield, 1714-1770)나 맥그리디(James McGready, c.1760-1817), 그리고 이 후에 무디(Dwight L.Moody, 1837-1899) 같은 대부흥사들은 문학과 음악에 재능을 가진 많은 동역자들을 모아들여 복음화 운동에 적극 활용하였던 것입니다.
1830년경 미국에서 애팔래치아 산맥을 넘은 인구가 무려 미국인구의 1/3 가량이나 된다는 기록이 있는데, 미국 서부 개척의 대열에 이러한 산야집회(camp meeting)와 그에 어울리는 새로 나타난 복음가로 인해 엄청난 힘을 발휘하게 된 것입니다.
찬송가 위쪽을 보면 왼쪽과 오른쪽에 작사자 이름과 작곡자 이름이 로우리(Robert Lowry, 1826-1899)라고 쓰여 있고, 작사 작곡 년대도 1867년으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모두 똑 같죠? 로우리 목사님이 작사도 하고 작곡도 한 찬송입니다. 그는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필라델피아에서 태어났고, 루이스버그(Lewisburg)와 버크넬(Buchnell)대학에서 우등으로 졸업했다고 합니다.
1845년 목사가 된 후에 뉴욕 등 여러 곳에서 목회도 하였고, 모교인 버크넬 교회에서 강의도 했습니다. 1875년엔 이 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도 받았습니다. 마흔에 들어서면서부터 뒤늦게 창작열이 솟아나 찬송가를 작사하고 작곡 했는데요, 그 후 세상 떠날 때까지 30여 년간 많은 찬송을 만들었습니다. 우리 찬송가에는 12편이나 실려 있습니다.
로우리 목사님은 목회를 잘 하셨다고 하는데, 특히 설교가 뛰어났나 봅니다. 이같이 많은 찬송을 남긴 그가 찬송가 작가보다는 설교자로 기억되길 바랐다고 하니까요. 이 찬송가에는 에베소서의 말씀이 부제로 붙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엡2;8)
그렇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찬송 시 ‘울어도 못하네’에서 보듯이 아무리 몸부림치고 애써보아도 그 어떤 이 세상 방법으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오직 주님을 믿고 돌아오는 것만이 그 해결 방법임을 알려주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때로 삶의 의미를 잃고 한강 다리를 오가며 한숨만 쉬고 있을 때 누군가가 다가와 속삭입니다.
“죽고 싶지? 울고 싶지? ” 하며 우리의 처지를 너무도 잘 알아 통사정을 들어주고 위로해주는 다정스런 목소리… 이 모진 세상을 살면서 힘쓰고, 애쓰며, 참다못해 우는 우리를 위해 주님께서 저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다가 오십니다.
우리의 눈물을 닦아주실 뿐만 아니라 우리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돌아가신 주님, 그 분을 소개해주겠다며 그 분에게만 행복이 있음을 알려줍니다. 우리로선 그리도 힘들었던 그 어렵고 힘든 문제들이 주님을 만나 믿고 따르기만 하면 다 풀리게 될 것이라고 말이죠.
곡명 WEEPIHG WILL NOT SAVE ME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너무도 좋아합니다. 곡조가 다분히 국악적이죠. 서양 음계 중 ‘파’와 ‘시’가 빠진 ‘도레미솔라’ 다섯 음으로만 되어 있어 예부터 할머니들이 즐겨 했지요.
국악기 반주로 추임새까지 곁들여 부르면 영락없는 우리 가락입니다. 후렴에 있어 “십자가에 달려서 예수 고난 보셨네” 에선 음이 높죠? 마치 우리 앞에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피를 흘리고 계신 것 같지 않습니까?
그리고 노래 진행이 울음소리 같아요. 이 찬송을 1절부터 부르노라면 3절까지 답답하다가 4절을 부를 때면 신이 나고, 시원합니다.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통곡이 변하여 잔치 자리가 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