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조한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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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가 그리스도인 것을 믿고, 예배하며, 찬송하는 기독인의 삶은 겉은 비슷해 보이는데 삶의 속은 저마다 다르다. 겉과 속이 틀리거나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삶과 앎의 틈새에서 비롯된다. 다시 말하면, 교인이 말하는 대로 살지 않고, 삶대로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교인은 교회 안에 머물기만 하고 공동체와의 소통은 더디기만 하다. 더불어 살아가려는 의지와 용기는 멀어지고 세상의 문제에 대한 공감은 줄어들거나 외면하려고 한다.

자신은 변하지도 않고 가르치지 못하면서 타인을 변화시키려고 가르치려 드는 것은 정말 힘들고 피곤한 일이다. 이 모두는 진정한 복음의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복음의 근본적인 문제는 누구를 믿는 것과 무엇을 믿는 것의 차이에서 오는 현상은 아닐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신앙의 확신이고, 신앙의 의지라고 할 수 있다.

예수를 믿는 것과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분명히 하나인데 복음에 대한 이중적인 접근으로 예수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서로 혼동하고 있지는 않는가 보라. 교단도 보면 예수와 그리스도는 하나이지만, 예수교와 기독교로 분리되어있다. 복음에 대한 이해와 해석의 차이로 오는 갈등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이는 신앙의 삶과 앎을 성결과 세속으로 나눈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겉으로 보이는 조직이나 직책, 그리고 권위와 같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보면 정직과 언행, 그리고 윤리와 도덕과 더불어 재물과 이성관계가 선명하게 삶의 민낯으로 드러난다.

시기, 질투, 교만, 허영, 욕심, 인기, 탐심, 태만의 습관이 배어있는 겉 사람을 보지 말고, 속 사람이 무엇으로 사는지 보라. 그럼, 사실과 진실의 차이가 담긴 생각과 말과 행동의 동기를 보게 된다. 재물은 사람의 체면을 살리기도 하지만, 반대로 사람의 의지를 누르기도 한다.

삶과 앎이 하나가 될 때 비로소 진정한 사람으로 거듭난다. 앉아서 비난과 비판에는 익숙한데 비해 나가서 동참과 공감에는 낯설기만 하지 않은가 보라. 자기중심적인 신앙의 틀을 깨지 않으면 생명 없는 건조한 조건을 따지는 종교인으로 남고 만다. ‘건조한 조건’은 앞뒤로 읽어도 같은 것처럼 변화를 주지 못한다.

“침묵의 시대는 지났다. 지금은 외침의 시대가 다가왔다”고 마틴 루터는 말한다. 나도 기독인의 한 사람으로서 세상적이고 사람 중심의 제도와 전통에 묶인 교리를 벗어버리고, 복음적이고 하나님 중심의 사랑과 은혜의 진리를 입어야 하고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 지금 삶과 앎으로 보여주는 진정한 용기가 필요하다.

나부터 형식적이고 이미 죽은 교리의 건조한 조건을 따지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감동으로 삶과 앎이 하나되는 기독인이 되어야 한다. 이중적인 삶과 앎의 벌어진 틈이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책상에만 머물지 말고 살아있는 삶터와 일터로 나아가서 함께 웃고 함께 우는 마음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이미지를 두세 사람이 모여 기독인의 에너지와 함께 사용할 때 세상에서 시너지가 생긴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덧입는 영성과 지성을 겸비한 기독인이 삶과 앎이 세상에서 하나로 모아질수록 하나님의 나라는 더 가까이 경험하게 될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