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리히 프라우뮌스터 교회(원경)
스위스 제네바의 바스티용 공원(제네바 대학교 교정) 종교개혁의 벽에 가면 종교개혁의 주요 인물들인 윌리암 파렐, 존 칼뱅, 테오도르 드 베즈, 그리고 존 낙스가 거대한 부조로 묘사되어 있는데 츠빙글리는 스위스 뿐만 아니라 개혁주의 전통을 이어받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칼뱅이나 루터보다 덜 알려져 있고 수박 겉핥기 식 앎 정도에 불과하다.
프랑스의 칼뱅보다 25년이나 먼저 울리히 츠빙글리(Ulrich Zwingli)는 스위스의 취리히 지역에서 종교개혁을 이끈 개혁주의적 프로테스탄트 사상의 개척자로 불린다.
츠빙글리는 루터보다 7주 정도 늦은 1484년1월1일 비트하우스라는 조그만 마을에서 태어나 그의 나이 12세에 베른으로가서 공부하기 시작해서 1506년 인문학 석사학위를 받고 그의 나이 22세에(루터보다 1년 먼저) 콘스탄츠에서 사제로 서품을 받았다.
카톨릭 체제에 의문을 갖다
츠빙글리에게 있어서 기존의 카톨릭 제도에 대한 의문이 들게 만드는 두 가지 사건 중 하나가 바로 전쟁이었다. 스위스는 용병으로 유명한 지역이었고,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직업으로 삼고 있었다.
스위스 용병들은 용맹했고 신의를 생명처럼 여겼기 때문에 군주들로부터 인기가 많았다.프랑스의 루이 16세가 죽기 직전에 모든 신하들이 도망가는 와중에도 끝까지 왕을 지켰던 것은 다름아닌 스위스 용병들이었다고 하니 고용주로서는 믿음직한 용병들이긴 했다.
그래서 지금도 바티칸시티에 가면 화려한 복장을 한 스위스 용병들을 볼 수 있다. 츠빙글리도 용병들인 자기 교구민들과 함께 나가 처음 참여한 1512년의 전쟁에서는 비록 승리는 했으나, 자기의 교구민들이 정복지를 약탈하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그리고 1515년 교황과 프랑스의 전쟁 때에는 교황의 편에 서서 싸우다가 패배하고 용병들이 학살당하는 장면을 목격하게 되는데, 여기서 그는 전쟁에 대한 생각이 바뀌고 동시에 기존에 갖고 있던 교황에 대한 신념에 대해서도 의심하게 되었다고 한다.
울리히 츠빙글리(Ulrich Zwingli)
전쟁 외에 츠빙글리에게 영향을 줬던 또 하나의 요소는 바로 성경이었다. 1516년 에라스무스가 그리스어 신약성경을 출판했을 때 그것을 구입해서 읽었다.
당시에는 성경을 스스로 해석하는 것 자체가 성경 해석의 권위를 가진 교황에 대한 도전이기도 했는데, 츠빙글리는 성경에 푹 빠져들었고 그래서 신약을 거의 외우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성경 말씀이 그를 조금씩 변하게 했다. 츠빙글리는 루터처럼 급격한 회심을 한 것이 아니다. 그는 한동안 가톨릭 교회의 체제에 남아있었고, 교황군대의 군종 사제로도 임명받았었고, 그 돈을 책을 사는데 쓰긴 했지만 교황에게서 지급된 연급도 받았다.
취리히에서 본격적인 개혁
이렇게 성경에 빠져들었던 츠빙글리는 1518년 취리히 대성당의 설교자로 임명을 받는다. 이로서 취리히는 루터의 도시 비덴베르크와 같은 의미를 갖게 된다.
그는 1519년 1월 1일 첫 설교에서 기존의 중세적인 방식으로 설교하는 것(교황이 내려준 교회력에 따른 설교)이 아니라 마태복음을 한 구절 한 구절을 강해설교시초하는 설교를 하겠다고 선언하자, 츠빙글리의 임명으로 인해 빚어졌던 혼란이 곧바로 잠재워졌다고 한다.
츠빙글리는 이렇게 성경을 설교하는 것을 통해서 취리히의 개혁을 시작했다. 사실 츠빙글리가 종교개혁을 이렇게 시작한 이후에, 취리히에는 과격한 개혁을 원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츠빙글리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복음을 통해 사람의 마음을 바꾸는 것이 진정한 개혁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말씀을 설교하는 것에 힘썼다.
초반에 츠빙글리의 종교개혁을 수월하게 만들어준 요소가 있었는데 그것은 아직 카톨릭 제도에 남아있었다는 사실과, 또한 무엇보다도 교황에게는 스위스 용병들이 필요했다는 것이 바로 그 요소들이다.그래서 1523년까지는 교황도 함부로 츠빙글리를 건드리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취리히의 개혁의 불씨를 좀 더 당기는 사건이 벌어지는데, 그것이 바로“소시지 게이트” 사건이다. 당시에는 각종 절기 등으로 인해서 일년의 거의 1/3은 고기를 먹지 못했다.
고기를 먹지 않아야 하는 사순절에 츠빙글리의 열두 친구들이 모여 소시지를 먹게 된 것이다. 비록 츠빙글리는 소시지를 먹지는 않았지만, 그는 친구들을 변호해서 사순절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에 인간의 명령을 덧붙인 관습일 뿐이며 불필요한 것이라고 설교하자 츠빙글리를 공격하는 여러 가지 소문들이 퍼져 나가게 된다.
츠빙글리는 자신의 신학을 변호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루터처럼 츠빙글리도 그리스도께서 교황이 아닌 말씀을 통해 교회를 다스리신다는 67개조 논제를 내어놓고 루터처럼 선행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것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자 당시 콘스탄스의 부 주교가 츠빙글리를 고발하게 되었다.
츠빙글리는 자신의 신학적 견해를 1523년 1월 29일에 열리는 토론회에서 변호하는데 성경에 대한 지식을 탁월하게 드러내며 토론에서 승리했다.
아무튼 이렇게 취리히에서 성경에 합당한 설교만이 합법이라는 것이 결정이 나게 되자 성경에 합당한 설교를 할 수 있는 목회자들을 길러내는 일에 큰 기여를 했다.
이 덕분에 성경에 대한 주석들이 많이 출판되게 되었고, 이에 더하여 1531년에는 취리히 성경도 출간되었다. 이와 함께 종교개혁은 수도원을 문을 닫게 했고, 각종 유물들과 성상, 미사를 위한 촛대와 제단, 그리고 사제들의 제의 등이 다 치워졌다.
루터는 성경에 반대되지 않는다면 전통적인 것들을 존중했지만, 이와 달리 츠빙글리는 성경에서 보장하지 않는다고 여겨지는 것들은 다 없애 버렸다.
종교개혁의 깃발을 넘겨주다
이렇게 활기차게 개혁을 진행시켜 나가지만 그에게는 개혁을 할 수 있는 많은 세월이 주어지지는 않았다. 개혁의 첫 번째 아버지로 불릴만큼 개혁적인 그의 삶은 카펠전투에서 47세의 젊은 나이로 죽음을 맞이하며 볼링거에게 넘어가게 된다.
사람들은 츠빙글리의 시신이 나중에 성물이 되지 못하게 하려고 그의 시체를 찢고 태워서 오물과 섞어버렸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남긴 유산은 실로 크다.
“오직 하나님께 영광(Soli Deo Gloria)이라는 개혁교회의 표어는 바로 츠빙글리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루터의 종교개혁이 자기 구원의 확신에 대한 몸부림에서 출발했다면, 츠빙글리의 종교개혁은 스위스 국민들의 구원에 대한 갈망에서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