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방에 같이 있어도 좋은 사람이 있고 함께 있으면 싫은 사람이 있다. 한방에 더불어있는 것이 거북한 이유는 분명 겸손해 보이려고 하지만 위장된 자만이 감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친절함이란 상냥하게 대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그것은 상대를 존중받을만한 사람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고 콜린 파월은 말한다.
찾아온 사람의 말을 들어주는 것처럼 하지만 실은 경청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듣고 싶은 말만 듣고, 하고 싶은 말만 하더니 갑자기 목소리를 바꿔 일방적으로 기도해준다. 이는 시간이 많이 지났으니 이제 그만 가달라는 몸짓이다.
이는 허세와 위선이 거룩해 보이려고 하는 허튼 몸짓에 불과하다. 이로써 마음의 원과 한을 풀러 갔다가 가슴에 상처만 안고 돌아선다. 외롭고 힘들고 지친 영혼은 위로와 격려를 해줄 사람이 없어 비바람 부는 도로를 하염없이 질주만 한다.
“한국인이 종교로부터 구하려고 한 것은 영생이 아니라 바로 그 한을 푸는 일이다.” 고 이어령은 심훈의 “그 날이 오면” 을 시론으로 펼치면서 한풀이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한국인은 동양의 불교, 도교, 유교, 민족종교와 서양의 구교, 신교, 개신교, 유사개신교, 기독교 이단 등 원한을 풀기 위해 종교에 심취해있고 다양한 종교를 가지고 있지는 않는가 보라.
진정한 기독교의 죄와 벌 그리고 구원과 심판뿐만 아니라 영생과 죽음과 더불어 천국과 지옥에 대하여는 귀로만 듣고 눈으로 보지 못하고 있지는 않는가 보라. 영혼의 구원을 통한 영원한 생명을 확증하고 있는가. 지금 죽어도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을 믿는가.
혹, 마음에 겨울의 한기처럼 스며든 한풀이 때문에 누군가에게 말을 하고 싶으면서도 체면으로 고민한다면, “갈까 말까 할 땐 가라. 할까 말까 할 땐 하라. 말할까 말까 할 땐 하지 마라”는 어느 노교수의 잠언을 들어보라.
“나는 듣고 잊는다. 나는 보고 기억한다. 나는 행하고 이해한다.” 는 중국 격언처럼 말만 하면 잊고, 보고 기억하고, 몸으로 해보고 이해하는 것처럼 “함께 웃고 함께 울 때” 마음으로 공감하고 감동하게 된다. 명심하라. 보스는 하라고만 하고, 리더는 먼저 솔선수범 하면서 ‘공감동행’을 한다.
지금 내가 만나고 있는 사람이 내 영혼의 구원과 영생을 바르게 인도할 사람인가 보라. 성령의 사람은 절대로 배워서 되는 것이 아니다. 거짓 몸짓으로 흉내 내기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알아가기를 원한다면, 영원한 생명을 얻는 확실한 믿음을 가지는 언행일치가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을 사는 사람은 분명하게 내 영혼의 영원한 생명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확증할 수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