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는 날기위해 뼛속도 비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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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저마다 자기 밥그릇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한다. 결국, 자기 밥그릇이 차면 죽는다는 말이다. 지금은 못 먹어서 죽는 것이 아니라 너무 먹어서 죽는다. 많이 먹어야 사는 것이 아니라 잘 비워야 산다.

밥을 많이 먹는 사람을 ‘먹보’ 또는 ‘밥보’라고 한다. 속된 표현으로는 ‘밥통’이다. 밥보의 어원을 보면 ‘밥’과 ‘보’가 합쳐진 말이다.‘보’는 말끝에 붙여 사람을 나타낸다.

밥보에서 ‘ㅂ’이 탈락되어 바보가 파생됐다. 바보는 멍청하고 어리석은 사람이다. 한마디로 엉터리라는 것이다.

주변을 보면 바보들이 넘쳐난다. 밥뿐만 아니라 돈과 성, 그리고 일에 바보스럽다. 바보는 사는 대로 말하거나 말한 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자신은 하지도 않으면서 지적이나 하고 있다. 하나님이 다 하셨다는 말의 중심에는 자기가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자부심은 자만심으로 자라고 자만심은 허영과 위선으로 나타난다. 이를 두고 ‘하나님이 당하셨다’고 말하기도 한다.

말과 글은 그럴듯하게 말하고 쓰는데 그 중심에는 자기자랑만이 있고 진정한 사랑은 없다. 악하고 음란한 시대에 살다 보니 죄가 죄인지도 모르고 살다가 드러나게 되면 일단 자기입장에서만 진실이라고 우긴다.

은밀하게 부적절한 행동과 생각과 삶을 살다가 들통이 나면 주변의 아는 귀와 보는 눈을 두려워한다. 그 대가를 지불할 때까지 눈총은 그림자처럼 따라다닌다. 때로는 강한 부정부터 하고 화를 낸다. 기도를 통해 용서를 받았다고 스스로 위안을 삼지만 죄책감에서 벗어나지를 못한다.

오늘날은 500년 전과 같은 비슷한 종교적 위기에 있다. 위기의 핵심에는 모든 일을 자기중심으로 해석하고 판단하고 행하는데 있다.

백세시대를 말하면서 죽음은 외면하거나 무시한다. 스스로 잘 될 것만 믿고 죽음은 남의 일처럼 여긴다. 죽음이 다가왔는데도 살 거라는 믿음은 어디서 오는가? 임종 순간에도 하나님이 살려줄 것이라고 확신한다. 끝까지 살고자 하다가 비참하게 죽는다. 이는 하나님을 바로 아는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귀로 듣기는 하는데 눈으로는 보지 못하는 자기 믿음이다. 잘 사는 것에는 온 마음을 다하는데 잘 죽는 것에는 관심조차 없다.

새는 뼛속까지 비워 몸을 가볍게 한다. 그래야 날 수 있기 때문이다. 잘 굶어야 살듯이 잘 비워야 영혼이 산다.

“부자와 유명인들 사이에서 기분 내며 사는 것보다 가난한 이들 사이에서 겸손하게 사는 것이 낫다(잠언 16장 19절, 메시지성경).”

밥보로 살다가 추악하게 죽기보다는 진정한 천국을 바라보며 날마다 더러운 영혼을 비워 아름다운 임종을 연습하라. 기독인은 어떻게 잘 사느냐 보다, 어떻게 잘 죽느냐가 더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