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께 붙잡힌 바 된, 사도 바울

바울의 찬송으로 무너졌던 빌립보 감옥

2000년 전,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죽음은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다. 심지어 제자들마저도 주님의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알지 못했다. 그래서 예수님이 뿌린 말씀의 씨앗은 유대교의 울타리 안에 머물러 있었다.

제자들은 예수님 사후에도 여전히 유대교의 율법과 안식일을 지키며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를 드렸다. 그러니 당시 예수님의 가르침은 ‘변방의 가르침’에 불과했다. 그랬던 기독교가 예루살렘의 테두리를 벗어나 로마로, 유럽으로 흘러갈 수 있었던 것에는 사도 바울의 서신과 목숨을 건 여정이 있었다.

스데반의 죽음과 바울의 회심
터키의 다소에서, 헬레니즘 문화권 속에서 자란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정통 유대교 교육을 받았다. 바울은 12사도들과 동시대 사람이었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목격하지 못했고 예수님을 본 적도 없었다. 그런 그가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됐을까?

예수님의 사후 2년쯤 지나 바울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좇던 스데반이 유대교의 율법을 정면으로 비판하다가 성밖으로 끌려 나가 돌에 맞아 죽는 그 현장을 지켜봤다.

그 후 박해를 피해 외곽으로 흩어진 그리스도인들을 잡으러 다메섹(현 시리아 다마스커스)까지 쫓아간 바울은 말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음성을 들었다.

“사울(바울의 유대식 이름)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바울은 그 음성을 향해 물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그러자 음성이 들렸다.“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그건 바울의 율법, 바울의 신념에 금이 가는 순간이었다.

하늘의 음성을 들은 바울은 눈이 멀었고, 구원의 통로라고 믿었던 율법에 대한 믿음이 와르르 무너진 바울에겐 모든 것이 암흑이었다. 그 암흑을 헤쳐간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됐다. 그러자 ‘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지면서 다시 보게 되었다’(사도행전 9장18절).

바울은 그렇게 회심했고, 그가 걸었던 길만 무려 7만㎞에 달하는 네 차례에 걸친 전도여행을 시작했다.

바울, 그리스 신들과 맞서다
아테네의 언덕위에 세워진 거대한 파르테논 신전은 2000년 전 바울도 넘어야 했던 거대한 산이었다. 그 산의 이름은 다신교(多神敎) 신화와 전설이 뒤얽힌 그리스의 종교였다. 그들 앞에서 바울은 ‘하나의 신(一神)’을 설파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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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가 잘린 신상은 집집마다 섬기던 신들을 이사갈 때 무거워 가져 갈수가 없어서 머리들만 잘라서 가져갔다.

범신론적 세계관을 가진 그리스인에겐 메시아란 관념이 없었고 대신 그들은 희로애락이 넘실대는 신화, 인간의 이성과 지혜를 중시했다. 그들은 창과 방패를 든 여전사인 아테네 여신이 도시를 지켜준다고 믿었다.

바울은 이 신전에 올라가 에피쿠로스(쾌락주의) 학파나 스토아(금욕주의) 학파와 열띤 논쟁을 벌였고 “하나님은 사람의 손으로 지은 신전에는 살지 않는다. 인간의 예술과 상상으로 빚은 형상을 신과 같다고 여겨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아테네 사람들은 바울을 철저히 외면하므로 아테네 선교에서 참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2000년이 지난 지금, 기독교는 그리스의 국교가 됐다. 그리스인의 98%가 그리스 정교회를 믿는 기독교인이다.

바울은 그때 알았을까? 자신이 심은 씨앗이 수백 년, 수천 년이 넘어서야 열매가 맺힐 거란 사실을 말이다.

지혜를 구하는 고린도 교회에 답한 바울
고린도는 아테네, 스파르타와 함께 그리스의 3대 도시국가였고 바울 당시에는 인구 75만의 거대한 무역 도시였지만 지금은 붉은 개양귀비 꽃이 여기저기 들판에 흐드러진, 오렌지 농사를 주로 짓는 소담한 농촌이다.

고린도에 바울은 18개월 간 머물며 교회를 세웠고 바울의 서신 중 가장 긴 편지인 고린도 전, 후서를 통해서 고린도 교인들을 향해(고린도전서 1장) 이렇게 말했다.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지만 하나님께서 세상의 지혜를 어리석은 것으로 만들어 버리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선포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2000년 전 이 도시 어딘가에서 바울은 밤을 새며 묵상하며 그 답을 길어 올렸다. 그것은 나의 지혜, 세상의 지혜가 무너지는 자리로 하나님의 지혜가 드러남을 깨달았다.

2000년이 지난 지금도 아무리 첨단 기계와 문명과 통신이 발달해도 인간의 지혜, 인간의 삶은 결국 ‘오십 보 백 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끊임없이 나의 지혜, 세상의 지혜를 통해서 삶의 해답, 인생의 대안을 찾으려 한다. 바울은 그 한계를 지적했던 것이다. 그리스철학은 서양철학의 모태다. 그리스인의 지혜, 그리스인의 철학을 향한 바울의 일갈은 결국 서양철학을 향한 일침이기도 하다.

나를 허물 건가, 우상을 허물 건가
바울은 ‘나’가 무너진 자리에 그리스도의 지혜, 하나님의 지혜가 밀려온다고 했다. 이건 논리나 철학으로 뱉을 수 있는 얘기가 아니라 자신의 지혜를 실제 허물었던 이들 만이 던질 수 있는 말이다.

터키 땅에 초대 일곱 교회가 있는데 그 중 하나인 사데 교회 옆엔 어마어마한 크기의 신전 유적이 있다. 다산과 풍요의 여신인 아데미를 모셨던 신전(알렉산더 대왕의 명령으로 BC 330년경 건립)이다. 입이 쩍 벌어질 만한 규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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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330년 경 건립된 아데미 신전 터

옛날에 78개의 석주가 있었지만 지금은 높이 18m의 거대한 석주 2개가 남아 있다. 신전 귀퉁이에 있는 사데 교회의 유적은 초라해 보일 정도였다. 이런 여건 속에서 이방인을 향한 바울의 전도 여정은 사실 그리스 신들과 로마 신들의 틈새에 ‘예수의 씨앗’을 심는 일이었다.

‘눈에 보이는 신’을 믿는 이들에게 ‘눈에 보이지 않는 신’을 설파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바울은 우상을 만들지 않았고 대신 자신을 십자가에 올렸을 뿐이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그리스도가 산다.”(갈라디아서 2장 20절). 바울은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자신을 그렇게 허물었다.

목숨을 건 전도여행
바울은 전도 여정에서 유대인들에게 다섯 차례나 몰매를 맞았고, 돌에 맞아 죽을 뻔했고, 파선도 세 번이나 당했다. 밤과 낮, 하루를 꼬박 바다에 둥둥 떠다니며 표류한 적도 있었다. 그리스도를 체험하며 사도가 된 바울은 그의 열정적인 성격으로 지금의 터키와 그리스, 로마에까지 복음을 전했다.

바울은 결국 네로 황제의 그리스도인 박해 때 로마에서 죽임을 당하면서까지 변방에 머물던 예수님의 가르침을 세계의 중심이었던 로마에 전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목숨을 걸고 바울이 전하고자 했던 건 진정 무엇이었을까? 그건 종교의 틀, 종교의 껍질이 아니었다. 율법도 아니고, 제도도 아니고. 교회의 벽돌도 아니었다. 그건 생명이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그리스도가 산다”(갈라디아서 2장 20절)고 바울이 고백했던 영원한 생명이었다.

이제 바울이 순례했던 땅을 떠나 왔지만 우리의 순례는 끝나지 않았다. 내가 사는 게 아니라 내 안의 그리스도가 살 때까지 말이다. 거기에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