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회 다음으로 이 땅에 들어온 감리교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 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마태복음 5:14-15)

산 위의 마을은 숨을 수 없다. 언덕 위의 집은 드러나게 마련이다. 교회도 그렇고 교인도 그렇다. 강단 위의 목사는 교인들에게 숨길 수 없고, 교인들의 행동도 마을 사람들에게 드러나게 마련이다. 이왕 드러날 것, 숨길 수 없는 것이라면 빛으로 드러나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그 빛으로 더 많은 사람을 교회 안으로 이끄는 것, 그것이 주님의 말씀이 아니던가?

우리나라 사람들은 배산임수라 해서 산자락 아래 개울이 흐르는 곳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영국 선교사들은 한국이나 뉴질랜드에 처음 들어와서 언덕 혹은 산 위에 집을 짓고 살았다.

그곳에서 많은 행사가 치러지며 자연스럽게 그 마을의 명물이 되었다. 뉴질랜드 역사에서 교회는 이렇게 처음부터 드러내 놓고 복음을 전했다.

감리교는 성공회보다 9년 뒤인 1823년 6월 6일에 감리교 선교부에서 파송한 사무엘 리(Samuel Leigh)목사 부부와 3명의 일행이 성공회 존 버틀러선교사 등 4명과 세인트 마이클이라는 배에 동승해서 팡가로아 하버에 1진으로 도착했다.

그 뒤를 이어서 8월 6일에 나다니엘 터너목사부부와 존 홉스가 2진으로 카이오(Kaeo)에 도착해서 먼저 도착한 감리교 선교팀에 합류했다. 리목사와 터너목사가 뉴질랜드 선교에 쏟은 열정과 헌신은 후대에 Hokianga 감리교 선교하우스 옆에 있는 두 길에 리 스트리트와 터너 스트리트라는 이름을 붙일 정도로 기념비적이다.

감리교가 처음 닻을 내린 카이오

6월 6일에 도착한 사무엘 리목사는 이틀 후인 8일에 팡가로아에서 첫 설교를 하고 또 이틀 후인 10일에는 카이오 강 남쪽 둑에서 본격적인 선교를 시작했다.

카이오는 베이 오브 아일랜드에서 47 km 정도 북쪽으로 10번 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도착한다. 마을 입구에 선교역사의 숨결을 느끼게 해주는 간판이 하나 있는데 거기엔‘Small Town Big Spirit’라고 적혀있다. 간판이 주는 신선한 충격을 따라 막 고개를 돌아서면 아주 작은 마을이 하나 나오는데 바로 감리교의 성지라고 할 수 있는 카이오다.

마을 중앙에 감리교 뉴질랜드 선교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서 1922년 3월 8일에 세워진 교회건물이 지금도 홀로 선교 역사의 애환을 간직한 채 서있다. 건물 안에는 첫 세례자들의 명단과 초창기 선교 역사를 담은 그림들(리목사가 그린 2명의 마오리 추장들의 초상화와 터너목사가 그린 연필 스케치)이 소장되어 있다.
물론 초창기 교회건물은 지금 건물의 맞은편에 1869에 지어 졌다가 1885년에 땅만 팔고 건물은 옮겨와 검(나무 진 굳은 것)창고로 사용하다가 1886년 6월에 다시 문을 열었다.

카이오에서 고개 하나 넘으면 그림 같은 팡가로아 항구가 나오는데 지금은 지나가는 여행객들이 피시 앤 칩스를 먹고 가는 필수 코스로만 남아 있다.

제2의 감리교 선교지 망군구 미션하우스

계속되던 선교는 1827년 1월을 기점으로 마오리들의 부족 전쟁으로 잠시 주춤하고 새로운 사역거점을 멀리 서쪽 해변가인 호키앙가에서 시작했다. 호키앙가는 호주에서 들어오는 배가 가장 짧은 거리로 닿을 수 있는 곳이다. 선교팀은 나푸히 리더 Eruera Maihi Patuone (와이탕기에서 스피치했던 Tmati Waka Nene의 형제)의 도움으로 1828년부터 1855년까지 정착 작업을 하고 1838-9년에 선교관을 지었다.

망군구 미션하우스는 호키앙가 포구에서 30분 정도 들어와 있는 강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다. 파히아에서 차로 3시간 정도 가다 다시 비포장 도로를 40분 정도 가면 나온다. 인적 하나 없는 무서운 숲길을 옛날 선교사들을 생각하며 겨우 도착 했지만 선교관은 닫혀 있었고 개미새끼 한 마리 없었다. 안내판을 보니 한시적(12-2월, 토-월요일과 부활절)으로 개방하고 있었다. 사방을 둘러 봐도 인걸은 간데없고 기념비만 덩그렇게 남아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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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탕기 조약 당시에 70명 이상의 추장들이 와서 이곳에서 싸인했고, 3,000명의 군중이 모였던 장소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오직 언덕 위에 세워진 기념비문에 처음 마오리 사역자와 세례자들, 순교자들의 이름들이 그 역사를 대변하고 있었다.

그리고 중앙에 새겨져 있는“씨는 하나님의 말씀이다(누가복음 8장11절).”라는 말씀처럼 그 때에 역사하는 말씀의 씨앗이 있었기에 오늘 우리가 그 열매들을 볼 수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 복음의 씨앗이 선교사들을 통해서‘예수사랑’으로 나타났기에 마오리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었다. 그리고 변화된 마오리들을 사역자로 세우고 훈련 시켜서 그들의 커뮤니티에 보내서 뉴질랜드 전역은 물론이거니와 남태평양까지 진출 시켰다. 대표적으로 통가는 감리교가 국교이다.

저들은 금주, 낙태반대, 사회정의와 평화를 지지하며 심지어 양심적 전쟁 거부로 제2차 세계대전 때는 많은 사람들이 감옥 가는 일도 있었다. 또 한편으로는 개인구원에 집중하며 많은 프로그램과 어린이 집과 시티 미션을 세우고 오늘날까지도 그 사역을 이어오고 있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태복음5: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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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길
뉴질랜드 구세군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구세군오클랜드한인교회 담임사관.루터의 독일, 장 칼뱅, 츠빙글리의 프랑스와 스위스, 얀후스의 체코, 네덜란드와 벨기에, 존 낙스의 스코틀랜드, 감리교와 구세군의 부흥지 영국, 종교개혁이 넘지 못했던 스페인, 무슬림의 땅 아부다비와 두바이를 답사하여 그들의 사역을 전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