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 교회를 꿈꾸다

한국교회는 가장 많은 선교사를 파송한 국가 2위 자리를 몇 년 전 내어주었고 지금은 한국 교회의 성장 둔화 현상과 맞물려서 새로운 선교사를 파송하는 교회 수도 점차 낮아지고 있음은 안타까운 현실이 아닐 수 없다.

이제 한국선교 40-50년의 역사를 돌아보며 나타나는 여러 선교적 이슈들 가운데 많은 것들이 있지만 요즘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문제들 가운데 하나는 선교사 돌봄(Care)문제이다.

우리는 보내는 일에 집중되어 선교사를 파송하는 일에 열의를 품었지만 상대적으로 선교사들을 이해하고 그들이 지속적으로 사역할 수 있도록 그들을 돌보는 일에는 한국교회의 인식의 부족과 이해 결여가 있었음을 이제 인식해야 할 때인 것이다.

선교사 돌봄의 가장 중요한 이유들이 있다
첫째로, 선교사들은 본국의 생활과는 전혀 다른 환경에서 새로운 언어와 문화에 적응하는데 본인이 의식하는 것보다 더 큰 문화적 충격(Culture shock)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이 충격의 후유증에는 대인관계의 긴장이나 관계형성에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것이다. 이 여파는 결국은 동료 동역자와의 관계 형성의 어려움의 호소로 나타나고 선교사의 중도탈락률의 큰 요인으로 드러나고 있다는 점이다.

두 번째로, 선교사들이 사명감이 분명하다 할지라도 그들은 예측하지 못한 스트레스와 어려움을 겪게 된다는 점이다.

필자 본인도 복음을 전하다 경찰에 체포되어 투옥되는 어려움을 겪어 보기도 하였고 현지인에게서 배신을 당하는 어려움을 겪어 보기도 하였다.

문제는 이러한 어려움의 상처가 마음속에 있어도 아무도 이를 공감해 주거나 이해해 주는 사람이 없을 때 극한적인 외로움과 정서적 불안정을 겪기도 한다.

오래전 내전상황에서 극적으로 탈출한 선교사들을 상담한 적이 있었다. 이들은 본인도 의식하지 못한 트라우마로 한동안 심한 우울증과 불면으로 고통을 당하는 것을 보았다. 어떤 이들은 이로 인한 대인기피증을 겪기도 한다.

만일 파송한 교회가 선교사들의 이러한 어려움을 이해하지 못하고, 통상적으로 교회가 몇 개 개척되었는지, 세례를 몇 사람에게 주었는지 보고서만을 요구할 때 선교사들은 더 많은 고통을 받는다.

세 번째로, 선교사는 영적인 슈퍼맨이거나 영적인 영웅들이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의 위대한 선교사였던 바울도 극한의 외로움과 재정적인 고통, 배고픔, 동족들의 위험을 경험하였다(고린도후서 11:21-31).

감옥에 갇혀 있던 바울은 그의 제자에게 극한 외로움 속에서 자신에게 속히 와 달라는 편지를 보낸다(디모데후서 4:9~22). 노년의 선교사에게서 느껴지는 절절한 외로움을 느끼게 하는 편지이다.

마찬가지로 선교사들은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되어 있고 누군가 이들을 돕는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바울은 그의 전도로 인해서 개척된 빌립보 교회를 향한 편지에서 많은 권면과 감사를 표현함을 본다.

그 중에도 빌립보서4: 14-16절에 “너희가 내 괴로움에 참예하였으니 잘 하였도다,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 받는 내 일에 참예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 번 두 번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

영적인 거장인 바울도 선교사역을 하면서 수많은 역경과 궁핍 가운데 있었고 그와 함께 동역하는 이들이 필요함을 절감하고 있었음을 보여 주고 있었다는 것이 시사하는 바는 너무 크다 하겠다.

위대한 사도 바울도 그의 파송 교회였던 안디옥 교회나 가장 큰 대형교회인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후원을 받지 못하고 그가 개척한 작은 교회들이 그와 함께 동역을 하였다는 사실이었다. 바울이 말한 “내게 힘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립보서4: 13)” 의 말씀은 이러한 선교적 맥락에서 고백한 사실임을 주지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한국선교사들의 파송 숫자와 우리나라 GNP의 숫자가 거의 비슷하다고들 한다
한국교회는 이제 새로운 전환점을 돌고 있다. 화려한 양적성장 뒤에 극심한 정체 현상뿐만이 아니라, 복음으로 인한 사회적 영향력을 끼치지 못했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어쩌면 선교에 있어서도 선교본질 보다는 온정주의적인 서구선교가 보여주었던 물량주의적 선교에서 탈바꿈하여 본질적인 선교로 전환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양적인 숫자와 더불어서 선교사의 자질과 철저한 훈련의 필요성이 있다는 진단적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와 동시에 한 사람의 선교사가 제대로 사역하는데 필요한 기간은 거의 10여년을 잡는다면 이들이 선교지에서 가장 효율적인 사역을 할 수 있도록 할 뿐 아니라, 이들이 계속할 수 있도록 이들을 돕는 일이 수반되지 않는다면 우리 한국교회는 엄청난 재정적, 영적 손실을 입게 될 수 있음을 예견할 수 있다.

교회가 관건이다. 이제 교회의 본질인 전도와 선교하는 선교적 교회(Missional Church)는 사도바울의 서신에서 보여주었던 것처럼, 선교사와 함께 동역하는 빌립보 교회와 같은 모습을 되찾아야 한다는 점이다. 교회를 방문할 때마다 필자가 말하고 부탁하는 것이 있다.

“선교사를 돕는 것이 아니라, 동역하는 것입니다. ”

선교사와 교회가 동역의 관계로 맺어지게 될 때, 비로소 우리는 성경적인 선교의 모델을 교회를 통해서 이루시는 하나님의 선교를 경험하게 될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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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재흥
1990년부터 오엠국제선교회 소속으로 터키, 영국 런던 Turning Point와 이슬람권 전략 사역 컨설팅과 뉴질랜드 Te Awamutu에서 선교사들을 양성하는 학교(Iner Cultural Institute of NZ)에서 사역을 하였고, 현재는 기독교 대한 성결교회 총회의 선교국장으로 섬기며 선교의 ABC부터 선교 현장에 필요한 전략에 관한 내용을 25회 동안 풀어가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