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내용을 모르는 그리스도인은 없다. 성경은 하나님이 세상을 구원할 예수를 메시아로 보내실 것이며, 하나님의 구원은 예수님를 통해서 성취되었고, 마지막 날 예수님은 심판주로 이 세상에 다시 오심을 말하고 있다. 성경 어떤 한 부분을 열어도 그 내용은 나침반의 끝점이 북극을 가리키는 것처럼 정확하게 예수님을 향하고 있다. 성경을 보다가 예수님을 놓치면 성경의 권위는 사라진다.
성경의 모든 장들이 예수님을 향하고 있으며, 예수님이 말씀하신 ‘생명’을 선포하고 있다. 그 ‘생명’은 창세기에서 시작되어서 요한계시록까지 이어진다. 그래서 성경은 ‘생명의 책’이다.
창세기 1장과 2장에 기록된 천지창조를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우주가 어떻게 시작되었고, 지구가 어떻게 생성되었으며, 사람과 생물들이 어떻게 창조되었는지 알려주시기 위함 이었을까?
아니다! 하나님은 천지창조를 통해서 ‘생명’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었음을 알리고자 하셨다. 이것을 놓치면 창세기의 천지창조를 사람이 알고 있는 과학 지식으로 밀어 넣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그렇다면, 창세기로부터 시작된 ‘생명’은 무엇일까?
성경이 말하는 생명의 의미
헬라어에는 생명에 해당하는 3단어가 있다. ‘바이오스’는 우리가 육체와 함께 살아있는 동안 존재하는 생명이다.
‘조에’는 육체에 메이지 않는 영원한 생명이다.‘프쉬케’는 한 사람에게 국한된 제한된 생명을 말할 때 사용된다. 그래서 육적인 생명은 바이오스로 통칭하고, 영원한 영적인 생명은 ‘조에’로 칭한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생명의 시작을 알리셨다면 그것은‘조에’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셨던 아담과 하와가 소유했던 생명은 ‘조에’였다. 그들은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살면서 교제하는 삶을 살았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영원한 삶이 있었기에,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처럼 될 것이야!”라는 사단의 유혹은 아담과 하와에게는 별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영원한 생명의 삶 ‘조에’를 버리고 한시적인 육체의 삶, ‘바이오스’를 선택했다. 그 결과 그들의 생명은 영원한 생명에서 한시적인 생명으로 바뀌었다.
그것이 창세기 6장 3절에 언급된‘하나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하지 않는’120세로 제한된 육체였다. 노아의 홍수 사건 이후 태어난 인류는 그렇게 ‘하나님의 영이 떠난 육체’만 갖게 되었다.
성경이 예수님을 조명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떠난 육체, ‘바이오스’만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조에’를 가져다 주셨기 때문이다. 사도 요한은 이것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의 오심을 말씀에서 시작하고, 그 말씀이 사람에게 닿을 때 우리가 잃어버렸던 ‘조에’를 다시 되찾는다고 말했다(요한복음1: 4). 에덴동산에서 잃어버렸던 ‘조에’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는 자들에게 다시 임하는 것이다
생명을 받아들인 자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까?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받은 자들에게 영원한 생명, 즉 영생이 주어졌다. 영생이란 단어는 ‘조에 아이오니오스’이다. ‘조에’는 이미 앞서 설명한 영원한 생명이고, ‘아이오니오스’는 영원한 이란 형용사이지만, 그것이 품고 있는 의미는 그냥 영원한 것이 아니라,‘시작도 끝도 없는 영원’이란 뜻이다.
즉 영생을 직역하면 ‘시작도 끝도 없는 생명’이다. 영생은 우리가 죽어서 시작되는 또 다른 삶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고 난 다음 바로 시작된다.
‘바이오스’란 한계에 갇혀 지내던 우리에게 ‘영생’이 주어졌다. 육에 속한 ‘바이오스’와 영생인 ‘조에’의 결합이 순조로울까? 겉으로 보기에는 이상적인 그림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바이오스’와 ‘영생’의 결합은 혼돈 그 자체이다.
현실적인 복과 번영을 갈구하는 ‘바이오스’와 예수님과 하나됨을 갈망하는 ‘조에’는 첨예하게 부딪친다.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삶이 어렵다고 말하는 이유는 이 양자간의 다툼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는 ‘바이오스’를 위한 삶을 포기하기 어렵다. 그래서 영생은 성령과 함께 시작된다.
생명과 성령
예수님이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구원과 영생이 우리들에게서 활성화(activate) 되려면 성령의 도움이 필요하다. 성령께서 하시는 가장 중요한 일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사랑을 우리들에게 조명해 주시는 것이다.
이미 알고 있는 성경말씀이 우리 안에서 살아나기 위해선 성령의 조명이 필요하다. 성령을 통해서 말씀이 내 안에서 살아나 나의 생명 에너지가 되는 것이다.
이것을 요한은 그의 복음서 15장에서 말씀과 하나됨이라고 표현했다. 예수님은 포도나무 비유를 통해서 ‘하나됨’을 반복하신다. 예수님은 아버지와 내가 하나가 된 것처럼, 너희들도 나와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요한복음 17: 21). 예수님과 우리를 이렇게 하나가 되게 하는 매개체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고,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는 것이 가능해 지는 것은 성령의 조명을 받은 말씀이 내 안에서 활성화 되기 때문이다(요한복음 15: 7).
즉 성령께서 하시는 가장 큰 일은 예수님을 믿은 우리들에게 정지 모드의 생명을 활동 모드의 생명으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성령의 도움없이 성경말씀이 내 안에서 활성화될 수 없다.
다시 생명으로
사도 요한은 그의 계시록을 마감하면서 다시 한번 더 ‘조에(영원한 생명)’를 언급한다.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나서(계시록 22:1)”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관심은 ‘조에’를 회복하는 것이다
주님의 일을 하다 보면 지치고, 힘들 때가 있다. 시간이 흘러도 큰 변화가 없어 보인다. 자신에 대한 무력함과 실망이 엄습해 오기도 한다. 그러나 말씀 앞에 서는 순간, 주의 성령의 도움을 갈망하는 순간, 누더기 걸친 나에게 예수님은 말씀으로 다가 오신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는 목자가 되라고, 뽕나무 위로 올라간 삭개오를 안아주며 함께 교제하라고, 침상에 누워 실려온 병자에게 죄에 대한 용서를 선포한 나, 예수의 사랑을 전하라고 말씀하신다.
그 생명, ‘조에’가 말씀 안에서 공급되기 때문에, 오늘도 나는 주님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고 있다.
주님의 위로는 언제나 생명의 회복과 그 궤도를 같이한다. 내가 성경을 읽는 이유는 내가 살아가는 힘과 능력이 성경으로부터 공급되기 때문이다. 그 생명이 내가 전할 복음이고, 우리가 살아서 남겨야 할 전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