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란 교회의 뉴질랜드 초기선교사역

한국이나 이곳 뉴질랜드에서도 교세가 그다지 크지 않은 루터교는 스스로 개신교의 장자 또는 효시임을 자임하며 마르틴 루터의 사상을 따르는 개신교 교파이다.

16세기 종교개혁이후 루터교회는 독일 루터교회에서 유럽 루터교회로 발전하였고, 유럽에서‘30년 전쟁’의 전화를 피해 일부 루터교도들은 1700년대에 미국으로 이민을 하였다.
이곳 뉴질랜드에 들어온 역사는 150년 이상으로 잡고 있다. 초기 역사가 보관되어 있지 않아 정확하지는 않지만 1800년대에 독일인들과 스칸디나비아인들의 이민에 근거를 두고 있다.

채텀아일랜드에서 시작된 루터교의 뉴질랜드 선교
정확히 역사로 기록된 것은 1843년 2월 채텀아일랜드의 와카루 베이에 독일 고즈너 선교회에서 5명의 선교사를 보낸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오스카베이어, 토한 바우크, 조하네스 엔그스트, 데이빗 뮬러, 프랜즈 스키메이스터)

7년뒤인 1850년 선교 여건이 어렵자 6명은 철수하고 조하네스 엔그스트 한 명만 남아서 1910년 그가 죽기까지 혼자 사역을 외롭게 이끌어간다.

지금도 채텀 아일랜드에는 망가누이에 스톤코테지가 산밑에 기념물로 남아있다. 채텀아일랜드는 마오리들과 약간 다른 남태평양에서 건너온 마리오리 부족이 살고 있다.

지금은 많이 혼혈되어 있고 100%순수 혈통의 마지막 마리오리는 1933년에 죽은 토미 솔로몬이 동상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채텀아일랜드는 1791년 영국배 채텀이 발견하기 전까지는 600여년 간 평화가 유지되는 낙원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3,000여명의 주민이 목축과 수산업으로 생활하고 있다.

채텀과 더불어 넬슨을 기점으로 시작된 내륙 선교
그 당시 넬슨을 중심으로 남섬에 땅을 매입한 부동산 회사가 이민자 유입을 위해서 신문에 광고를 내자 북독일 지방과 루히네랜드의 루터란 교인들이 1843년 6월에 세인트 파우리호를 타고 넬슨에 들어왔다.

2차 이민자 유입 때는 북독일 선교회의 후원으로 2명의 선교사(조한 프리드렉 헤이니치 월러스, 조한 프리드렉치 라이먼시나이더)와 2명의 학생(H. H. Trost, J. W. C. Heine)이 마오리 선교를 위해서 함께 들어왔다.

월러스 선교사는 처음 영국식민지에 들어올 때 침략자로 오인 받을 까봐 많이 두려웠다고 적고 있다. 그런데 막상 도착하니 자신들의 선교 대상인 마오리들을 극소수만 발견하고 크게 실망했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많은 비로 인한 홍수로 베이스캠프 설치마저 실패하고 남쪽으로 새로운 선교지를 찾아서 이동하게 된다.

월러스 선교사는 남쪽으로 이동 중 드디어 투하와이키 부족의 도움으로 루아푸케섬에서 사역을 시작하게 된다. 그곳은 남섬이 매인랜드로 더 많은 인구가 유입되기 전까지 적은 규모의 부족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사역을 위해서 끝까지 고군분투하다가 1885년 슈튜어트 아일랜드에서 생을 마친다.

넬슨에 도착한 두 명의 선교사 중 하나인 라이먼 시나이더 선교사는 타라나키 쪽으로 가서 와이트맨을 만나서 그와 함께 모카우 강으로 가서 감리교 선교센터에 있는 히네리 시네칸버그(berg는 주로 유태인들의 성씨)를 만났다.

마오리 카톨릭이 많은 그곳에서 선교베이스를 세우고자 했으나 여의치 않아 타라나키에 있는 와에라 지역으로 그를 돕는 H H Turton과 함께 이동해서 선교사역에 우선해서 그들의 필요를 도울 수 있는 많은 역할을 해낸다. 그는 의사, 판사, 빌더, 캐비닛메이커, 농부, 국회의원에 준하는 역할, 심지어 정부에 마오리 땅에 대해서 조언자 역할까지 실로 다양한 일들을 사역의 일환으로 감당한다.

그러나 그는 그의 사역 중 또 한번의 위기를 맞게 된다. 바로 1860년 타라나키 전쟁 중 마오리들 편에 서지 않아 마오리들과 사이가 멀어지고 결국은 그 곳에서 쫓겨나 넬슨으로 가서 1866년 오타코우 헤드스에서 죽으며 사역을 마감한다.

넬슨 이민 때 두 명의 선교사와 함께 왔던 두 명의 학생 중 한명인 J. C. W. Heine는 넬슨에서 독일 이민자들의 정착을 도우며 교사와 전도자의 일을 겸하여 했다.

그 후 그는 넬슨에 있는 뉴질랜드 컴파니랜드를 팔고 모우테레, 와이메아, 랜자우 지방에 땅을 사서 선교센터를 세웠다. 선교센터의 이름을 사라우(Sarau)라 붙였다. 그는 허마난스버그 선교 단체에 마오리 선교와 루터란 독일 이민자들을 돕기 위한 재정지원을 요청했다.

그래서 먼저 호주 아댈래이드에서 C F Meyer가 도착하고 이어서 1876년에 크리스토프 디렉스(Christoph Direks), H W Kower(카워), H Loose(루스), J F Goessling(고슬링)이 도착했다. 디렉스는 와이토타라(Waitotara)에서 그의 형제 하트잉(Hartwig)은 맥스웰타운(Maxwelltown)에서 마오리들과 함께 성공적으로 사역을 진행했다.

블레이스목사(G Blaess)는 1906년까지 파리하카(Parihaka)지역에서 사역 했는데 선교의 일환으로 음악에 재능있는 사람들을 모아서 사역하기 시작했다. 왜냐면 마오리 리더들인 티피티(Te Whiti)와 토후(Tohu)는 마오리들을 집회에는 참석 못하게 하고 찬양집회에만 참석을 허락했기 때문이다.

하무에라 티풍가의 사역
블레이스목사는 와이페투(Waiwhetu)에 살고 있는 하무에라 티풍가(Hamuera Te Punga)에게 주기도문과 루터의 소교리문답(Luther’s Small Catechism)의 번역을 부탁했다. 그 뒤에 티풍가에게는 미국 유학의 길이 열렸다.

그는 티풍가와 백인 핸리 하팅(Henry Harting)을 미국 스프링필드에 있는 루터 신학교에 보내 목회의 수업을 쌓게 했다. 티풍가는 리디아 고스(Lydia Gose)와 1912년 결혼하고 뉴질랜드에 돌아와서 로핫(Lower Hutt)지역에서 사역 했는데, 할콤(Halcombe)지역의 세인트 죤 루터란교회(St John Lutheran Church)에서 1968년 그가 죽기까지 사역했다.

루터란 교회는 그들의 말대로 규모면에서는 조그만 교회들이지만 전국에 흩어져서 오늘도 루터의 개혁정신의 계승을 이어가고 있다.

그 동안 ‘뉴질랜드 초기 기독교의 뿌리를 찾아서’란 연재를 위해서 남섬 끝 더니든에서 북섬 카이오까지 여러 차례 답사를 통해서 그 뿌리들을 보았다면 이제 더욱 풍성한 열매들을 보기를 소망한다.

2017년은 루터의 종교개혁 500주년이 되는 해이다. 기회가 허락되는 대로 루터의 종교개혁 현장 방문을 구상 중에 있다. 많은 응원과 기도를 부탁 드리며 독자 여러분들께 지면으로 감사 인사를 드린다. 주안에서 평안하시고 새해에 다시 만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