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만나야 할 가이사

이달견목사/오클랜드주님의교회

“18. 원고들이 서서 내가 짐작하던 것 같은 악행의 혐의는 하나도 제시하지 아니하고 19. 오직 자기들의 종교와 또는 예수라 하는 이가 죽은 것을 살아 있다고 바울이 주장하는 그 일에 관한 문제로 고발하는 것뿐이라 20. 내가 이 일에 대하여 어떻게 심리할는지 몰라서 바울에게 묻되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 일에 심문을 받으려느냐 한즉 21. 바울은 황제의 판결을 받도록 자기를 지켜 주기를 호소하므로 내가 그를 가이사에게 보내기까지 지켜 두라 명하였노라 하니 22. 아그립바가 베스도에게 이르되 나도 이 사람의 말을 듣고자 하노라 베스도가 이르되 내일 들으시리이다 하더라”(사도행전25:13~22)

생명 있는 것은 성장합니다. 우리 신앙은 생명입니다. 그래서 성장과정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불신자에서 초신자로 초신자에서 성숙한 신자로 성장합니다. 아브라함도 불신자에서 75세에 초신자가 되었고 110세가 넘어서 성숙한 신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아브라함의 신앙성장과정을 따라갑니다.

우리 중에 어떤 분은 성경을 아직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니면 부분적으로만 믿습니다. 아직 신자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신자가 되려면 성경 전체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어떤 신학교 교수님이 기차를 타고 서울에서 전주로 내려가던 중이었습니다. 이 분은 평소에 옆자리에 누가 앉지 않기를 원한답니다. 피곤하니까 조용히 쉬고 싶은 거죠. 그런데 만약 누군가가 앉는다면 예수 안 믿는 분이 앉기를 바란답니다. 전도하려고요. 예수 믿는 사람이 옆에 앉는 것이 제일 싫답니다. 그런데 하루는 옆자리에 어떤 아주머니가 앉으시기에 반갑게 인사를 했답니다. 그리고 물었습니다.

“아주머니, 혹시 교회 다니세요?”
“네, 그럼요. 저는 새벽기도까지 다닙니다”
“아이구, 그러세요! 반갑습니다. 예수 믿으니까 참 좋으시죠?”
“네, 저는 교회는 다니지만 예수는 안 믿습니다.”

교수님은 깜짝 놀랐습니다.

“아니, 새벽기도까지 다니시는데 예수는 안 믿으세요?”
“네, 사실 저는 불교신자입니다. 그런데 제가 다니는 절이 너무 멀어서 가까운 교회에 나가서 새벽마다 부처님께 기도합니다”

교회 안에 이런 사람도 있습니다. 교회에 나와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불교신자입니다. 교회 안에는 유교신자도 있고 자기 철학을 신봉하는 불신자도 있습니다. 이런 불신자 분들은 믿음을 갖게 해 달라고 기도하시고 하나님 만나게 해 달라고 하십시오.

초신자들은 영적 어린아이라고 표현합니다. 앞으로 신앙이 많이 자라야 하는 분들입니다. 초신자 때는 개인의 신앙생활에만 관심을 갖게 됩니다. 공동체나 나라나 민족의 영적 상황이나 사건들에 대해서는 무관심합니다. 뉴질랜드를 위해 기도하는 기도모임에서 만든 기도제목이 있습니다. 다음과 같은 기도제목이 전국 크리스천들에게 배부된 적이 있습니다.

“지난 몇 주간, 제가 속한 크리스천 소그룹 모임에서는 온라인 상에서 정기적으로 만나 약 한 시간 동안 대화하고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2주간의 기간 동안, 저희는 무관심과 열심에 대한 주제를 생각하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크리스천으로서의 삶, 교회의 삶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삶 전반에 있어 매우 중요한 두 가지입니다.

다음은 우리가 이 부분에 대해 나누었던 대화와 기도제목입니다.
1. 하나님은 우리의 무관심한 모습을 버리고, 특별히 우리나라의 영적인 부분에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것에 맞서 기도하기를 원하십니다. 필요한 곳에 하나님의 열정이 다시 그 분의 백성들에게 임하게 되도록 하옵소서 2. 많은 교회의 리더들은 헐뜯기고, 공격 당하고, 오해 받으며 지치고 너무나 바쁜 삶을 살고 있습니다. 건강한 교회 및 공동체를 위해, 성령충만함 속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건강한 리더들로 세워주소서”

뉴질랜드가 마치 영적 어린아이처럼 사회의 이슈, 교회의 이슈에 대해 무관심한 국가가 되었으니 기도하자는 부르짖음입니다. 여러분은 어떠합니까? 나와 내 집에 대한 관심을 넘어 교회와 사회에 대한 관심이 있습니까?

한 사람이 초신자에서 성숙한 신자가 되기 위해서는 여러 과목들을 이수해야 합니다. 우리 신앙은 현실의 문제들을 수업 과목으로 지정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스라엘은 광야생활하면서 기초생활수급자(benefit 수혜자)같았습니다. ‘재정 부족’이라는 과목을 거쳐야 했습니다. 그 어려움을 겪어야 하는 분명한 이유는 여호와의 말씀으로 살아야 함을 가르쳐 주기 위함입니다(신명기8:3). 그런데 경제적 가난이라고 하는 절호의 기회가 왔음에도 참된 양식을 구하지 않고 물질에만 관심을 둔다면 일생일대의 찬스를 놓치는 것입니다.

또한 이스라엘은 유목민이었습니다. 정처 없이 떠도는 백성이었습니다. 어디 한 군데 편히 쉴 곳도 없었습니다. 장막을 치고 걷고를 반복했습니다. 누구 하나 반겨주지도 않았습니다. 그야말로 ‘나그네 설움’을 톡톡히 겪은 민족이었습니다. ‘나그네 과목’입니다.

신분이나 비자가 안정되지 않아 뿌리 없는 나무처럼 마음이 떠 있습니다. 이곳 사람도 아니고 한국 사람도 아닙니다. 한국에 가서 사시는 우리 옛 교우가 고백했습니다. “한국에서 살고 있지만 저는 한국 사람도 뉴질랜드 사람도 아닙니다” 안정적으로 머물 집이 없어 이 집, 저 집을 다녀야 하는 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과목은 무엇을 가르칩니까? 우리가 머물 곳은 이 땅이 아니라 하늘 나라임을 가르쳐줍니다(히브리서11:11~12). 그런데 신분의 불안정과 주택의 어려움이라는 절호의 찬스가 왔는데도 하늘 나라를 사모하지 못하면 일생일대의 절호의 찬스를 놓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또 다른 과목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말렉과의 전쟁입니다. 타민족에게 미움을 받았습니다. ‘갈등 과목’입니다. 이스라엘은 할 수 없이 전쟁을 했습니다. 누가 갈등을 좋아하고 전쟁을 좋아하겠습니까? 하지만 이스라엘은 갈등의 산을 넘어야 했고 전쟁해야 했습니다.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졌습니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여러분, 사람에게 미움 받은 적 있습니까? 다른 사람과 갈등한 적 있습니까? 얼마나 피곤하고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그런데 우리는 그런 갈등의 산에 와서 그 갈등을 극복하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갈등의 산에 머물러 있어도 안되고 거거에서도 함몰되어서도 안 됩니다. 그 산을 넘어가야 합니다.

사도 바울의 인생에는 수 많은 갈등이 있었습니다. 특히 바울은 엄청난 미움을 받은 사람입니다. 바울이 복음을 알기 전에는 이런 수모와 갈등과 번민을 결코 당한 적이 없었을 것입니다.

베스도 총독은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가서 재판 받을 것인지 묻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자신이 로마 시민이라고 하면서 가이사에게 가겠다고 합니다. 그러자 베스도는 “네가 가이사에게 상소했으니 가이사에게 가라”고 합니다. 왜 바울은 가이사에게 가야 했습니까? 자신의 목숨을 구걸하기 위해서일까요? 그저 유대인들의 손에서 벗어나고 싶어서일까요? 살기 위해서요? 아닙니다.

가이사 즉 이 땅의 황제, 이 땅의 신이 존재하는 그곳에 가서 하늘의 신, 참 황제를 소개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세상 나라의 한 복판에 들어가서 복음을 선포하기 원했습니다.

바울은 환난을 많이 당했습니다. 그런데 그 환난이 인내를 만들고 인내가 연단을 만들고 연단을 통해 소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많이 연단되면 소망이 어디에 있는지 보입니다. 앞서 말씀 드린 것처럼 우리의 소망은 하나님의 말씀에 있고 하나님 나라에 있습니다. 연단을 당하면 그 소망이 보입니다.

바울은 가이사를 만나기 위해 로마로 가야 했습니다. 갈등의 산을 너머 가이사에게로 갔습니다. 그런데 갈등이라는 절호의 기회가 왔는데도 소망을 깨닫지 못하고 갈등 자체에만 빠져 허우적 거린다면 일생일대의 찬스를 놓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가 처해 있는 삶의 자리는 어떠합니까? 아직 불신자로 계십니까? 예수를 믿으십시오. 초신자이십니까? 나만의 신앙생활의 영역을 조금 더 넓혀서 이웃과 교회와 나라를 돌아보십시오. 성숙한 신자로 자라가고 있습니까? 재정 부족, 건강 부족, 나그네와 같은 안정되지 못한 삶, 갈등 상황. 이런 상황에 계십니까? 그렇다면 그 자리에서 삶의 환경만 탓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그 상황 너머에 있는 가이사에게로 가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가이사는 누구이며 어디입니까?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레미야 12:5(현대인의 성경) “네가 사람과 달리기를 해도 피곤하면, 어떻게 말과 달리기를 하겠느냐? 네가 조용한 땅에서만 안전하게 살 수 있다면, 요단 강의 창일한 물 속에서는 어찌하겠느냐?”

예레미야가 가야 하는 곳은 말과 경주를 해야 하는 곳입니다. 요단강의 넘실거리는 물 속에서도 살아 남아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곳은 온실이 아닙니다. 저 척박한 광야와 같은 곳입니다. 우리에게 환난, 인내, 연단을 통해 소망을 갖게 하시고 이리와 늑대가 이글거리는 세상의 한 복판에서 가이사를 만나게 하십니다.

빌립보서 4:22 “모든 성도들이 너희에게 문안하되 특히 가이사의 집 사람들 중 몇이니라”

바울의 로마행으로 가이사의 집 사람들마저 복음의 포로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것도 네로 황제의 집에 말입니다. 바울이 가난과 불안정과 갈등의 산을 넘어 성숙한 신자가 되어 가이사를 만났기에 가이사의 집 마저 변화되었습니다.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세상에 사는 동안 우리 각자가 만나야 할 가이사가 있습니다. 그 가이사를 만났을 때 복음을 담대히 전할 수 있도록 훈련되고 성숙해지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의 가이사는 무엇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