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 오브 아일랜드를 가다

부활절 맞이하며 개인 영성 위해 찾아간 곳, 베이 오브 아일랜드

그곳엔 202년 전 이 땅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땀과 순교의 피를 쏟은 믿음의 선진들의 숨결이 아직도 생생하게 느껴졌다. 23년 동안 이 땅에 살면서 어느 정도 안다고 생각한 뉴질랜드였는데, 이번 답사를 통해서 그 동안 몰랐던 새로운 보물들을 볼 수 있어서 무엇보다 의미 있는 시간 이었다.

역사의 현장을 생생하게 보기 위해선 발품을 팔아야 하듯이, 이번 답사는 780km의 차량이동과 도보 이동이 병행 되었다. 그리고 행여 건성으로 보다 귀한 자료를 놓칠까봐 두번 세번 반복해서 꼼꼼히 챙겨보느라 시간이 많이 소요되었고, 육신은 피곤 했지만 영적으로는 새로운 힘으로 충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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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이 펼쳐지는 언덕 길을 따라서 사무엘 마스든선교사가 뉴질랜드 땅에 첫발을 내 딛었던 기념비가 있는 곳을 향해서 걸을 땐 인적이 끊기고 발걸음 소리 마져 방해가 될 정도의 침묵 속에서 걷고 또 걸었다. 그 때 숲은 침묵하지만 말했다.

복음의 길도 이와 같이 아무도 맞아주는 이 없어도 그 길을 가야 한다고. 그리고 우리 주님은 한마디 변명도 하지 않으시고 묵묵히 그 길을 가셨다고.

그곳엔 그 옛날 하늘의 별빛을 방향 삼아 조그만 카누를 타고 거친 바다를 건너온 용감한 마오리족들이, 그들에게 풀리지 않은 한이 아직은 남아 있었지만 여전히 그 땅을 지키고 있었다. 그들은 말한다 금으로도, 은으로도 할 수 없는 것을 주님은 직접 복음이 되어서 해내셨다고.

이제 일상으로 향한 발길을 돌리며 기도한다. 그 땅이 하루속히 복음으로 하나되어서 지난 상처가 치유되고 부활의 기쁜 소식이 202년 전에 그랬던 것처럼 남으로 남으로 밀려 내려오기를…

성경 번역하고 인쇄하여 복음을 전파
독일 마인츠의 금속기술자 요하네스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를 발명해 180권의 성경을 인쇄했을 때가 1450년대다. 고려에서 <직지심체요절>이 금속활자로 인쇄된 것은 그보다 앞선 1377년이다.

고려의 금속활자는 구텐베르크 보다 수 십 년 앞섰지만, 유럽처럼 책을 대중에게 공급 하지는 못했다. 그 이유를 부산대 강명관교수가 쓴 책<조선시대 책과 지식의 역사>에 보면 서양의 금속활자는 상업적 목적으로 민간에서 제작된 반면, 조선의 금속활자는 국가의 필요에 따라 국가에서 제작됐다.

그 결과 서양은 지식독점을 해체해 그 지식 위에 서 있던 특권계급의 약화로 이어졌지만, 조선에서는 지배체제를 더욱 공고히 하는 데 이용됐고, 또 한편 알파벳은 24자×α의 활자를 만들면 됐지만, 한자는 4만여자×α로 금속활자 제작 때 한 글꼴당 10~30만개의 활자를 만들었다. 더구나 금속활자의 원료인 구리는 일본에서 수입해야 했다.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발명은 인쇄문화의 대폭발을 일으켰고 이른바 근대의 형성에 핵심적 기여를 하며 서구 역사의 물길을 바꿨다. 그 불길이 유럽에서는 빠르게 확산됐고, 드디어 선교사들에 의해서 뉴질랜드에 들어오게 됐다.

선교사역 돕던 루아타라추장의 죽음과 마오리어 교육
1815년 3월 3일 루아타라 추장이 28세의 나이로 죽게 되자 그 동안 그의 보호아래 진행되던 선교 사역이 잠시 주춤해 졌고 여전히 언어소통이나 문화적인 문제로 선교사들은 라푸히 부족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면서 선교사들 간에는 서로 불화가 생기자 먼저 토마스 캔들선교사가 1816년에 첫 마오리 학교를 세우고 동네 아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부인과의 결혼문제와 선교사들과의 갈등이 더 심화 되면서 마오리들과 시간을 보내는 일이 많아졌다. 그러면서 마오리 언어를 배우게 됐다.

캔들선교사는 성경 이전에 먼저 마오리들을 어떻게 가르칠까 고민 중 뉴질랜드 최초의 책이고 교과서인 A Korao, ‘The New Zealander’s First Book; Being an attempt to compose some lessons for the instruction.’ 이란 긴 제목의 책을 드디어 출간하게 되는데 그 당시엔 인쇄기가 없어 호주로 귀국해 가있는 마스던선교사에게 원고를 보내서 인쇄를 해왔다.

그러면서 마오리들에게 글을 만들어줬고 1820년 루아타라의 사촌인 홍이헤카와 와이카토에게 영국을 견학시켜줬다. 그 후 사무엘 리교수에 의해서 2번째 책인 Grammar & Vacavulary NZ 책이 만들어 졌다.

마오리어로 성경을 번역하고 호주에서 인쇄하고 가져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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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3년에 CMS Mission 리더로 31세의 해군전역자 헨리 윌리엄스를 파송했다. 그는 도착하자마자 ‘이제 글과 문법이 있으니 책을 읽는 것을 가르치면 성경을 읽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자신과 선교사들에게 먼저 마오리 말을 정확히 배우고 가르치라고 강조했다.

그래서 실제로 1930년 죠지 클락의 선교 보고에 의하면 “이제 그들은 자기언어로 다 읽고 쓸 수 있다. 그리고 수학의 기초도 다 띠었다.” 는 것이다. 헨리의 선교 방법은 토마스 캔들과 같이 말과 글 등에 치중한 반면 마스던선교사는 관계중심적인 전략이었다. 그래서 그는 먼저 농사 짓는 법과 영국 매너와 도덕을 먼저 가르쳤다.

1826년에는 CMS선교사들은 매일 아침 모여서 파이하 스톤하우스(지금은 무너지고 돌무더기만 남음)에서 공동번역 작업에 들어갔다, 물론 다른 곳에서는 1823년에 팡가로아에 도착한 감리교선교사 죤 홉스도 번역작업에 들어 갔지만 동역자가 없어서 힘들었다.

같은 해, 선교회는 또 한 명의 선교사를 파송 했는데 헨리 윌리엄스의 동생인 윌리엄 윌리엄스였다. 그는 언어에 능통해서 다른 선교사들의 불만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번역 작업에 착수해서 처음에 창세기 1-3장, 요한복음1장, 출애굽기20장(1-7 십계명), 마태복음5장 1-30, 6장 주기도문을 번역했다.

1827년 8월 영국의 도움으로 당시 41파운드라는 큰돈을 지불하고 호주 시드니에서 400권을 인쇄해왔다. 첫 출판이라 실수가 많았지만 마오리들 사이에서는 인기가 많았다. 헨리는 빵을 물에 던지는 심정으로 성경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주라고 했다.

1844년 그의 일기장에는 학생들이 이제 땅에 누워서도 성경을 읽게 되었다고 회고했듯이 매우 고무적이고 성공적이라 신약을 다 번역하기에 이른다. 인쇄가 워낙 돈이 많이 들어서 늦어지긴 했지만 영국과 호주의 도움으로 출판은 계속되었다.

비싼 운송비 절감 위해 인쇄기를 뉴질랜드로 들여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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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출판함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비중을 많이 차지하는 부분은 운송비라 출판을 뉴질랜드에서 하기로 결정하고 드디어 1834년 6월 18일 윌리엄 클린소(William Collenso)와 그의 조력자 윌리엄 와디(William Wade)는 스텐호프 인쇄기를 Black Bird란 배에 싣고 그 해 12월 30일 뉴질랜드에 도착했다.

인쇄기를 배에서 뭍으로 옮기는 과정은 더욱 힘든 과정이었다. 그것은 사람들이 무기로 오인해서 습격 할까 봐 몰래 옮겨야 했고 무거운 기계를 들고 올 수가 없어서 카누 두 대를 합쳐서 만든 배에 싣고 아주 조심스럽게 스톤하우스로 옮겨졌다.

막상 인쇄기는 옮겨 왔지만 더 큰 문제는 종이가 없었고 부분적으로 활자가 빠져있었다. 그래서 종이는 선교사들이 도네이션 해줬고 빠진 활자는 케리케리 돌이나 나무로 조각해서 끼워 넣었다.

마오리어 성경을 직접 인쇄하여 보급할 때 상상할 수 없는 인기끌어
뉴질랜드 최초의 인쇄는 1835년 2월 27일에 에베소서, 빌립보서 16페이지짜리를 25권 인쇄해서 선교사들에게 우선 보급했다. 이 책들은 이미 3명의 선교사들(William Williams, W G Puckey, William Yate)이 번역해 놓았던 것들이다. 물론 5년 전 윌리엄 예이트가 6장짜리 몇 권을 수작업으로 인쇄했었다.

그 후 케리케리 미션하우스에서 종이를 발견해서 2,000권의 책을 추가로 인쇄했다. 그러나 여전히 종이가 부족해서 때로는 커텐으로 제본을 하기도 했지만 그 인기는 상상할 수 없었다.

1835년 12월에는 윌리엄 윌리엄스가 번역해 놓은 누가복음 1,000권을 인쇄했다. 또한 파히하에서 1836년 3월부터 1837년까지 356페이지짜리 신약 5,000권을 더 찍었고 다른 한편으론 신학적인 연구가 계속됐다.

사무엘 마스던선교사의 죽음과 선교유산
73세에 마지막으로 뉴질랜드를 방문했던 마스던선교사가 성경이 인쇄되는 것을 보고 너무 기뻐했고 마오리 들은 그를 안고 홍귀앙아에서 와이마티까지 20마일을 갔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내가 있었을 땐 마오리 문화에 어둠이 있었는데 지금 오니(일곱 번째 방문) 성경(번역된 신약)을 읽고 많은 사람들이 크리스천으로 변해가는 것을 볼 때, 이게 바로 하나님이 인도 하셨던 일이라고 생각된다”고 회고했다.

그는 1838년 5월 호주로 귀국 후 한달 만에 죽음으로 이 땅의 사역을 마치지만 그의 열정과 비전은 불씨가 되어 마치 산불처럼 북에서 남으로 뉴질랜드 온 땅을 복음으로 불을 붙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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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길
뉴질랜드 구세군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구세군오클랜드한인교회 담임사관.루터의 독일, 장 칼뱅, 츠빙글리의 프랑스와 스위스, 얀후스의 체코, 네덜란드와 벨기에, 존 낙스의 스코틀랜드, 감리교와 구세군의 부흥지 영국, 종교개혁이 넘지 못했던 스페인, 무슬림의 땅 아부다비와 두바이를 답사하여 그들의 사역을 전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