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주 만에 그에게서 국제우편으로 답장이 왔다. 봉투 안에는 편지와 함께 파란색 셔츠에 청바지를 입은 그의 독사진 1장과 가족들과 찍은 사진 1장이 들어있었다. 필기체로 흘려 쓴 꼬부랑 영어 편지가 여섯 장이나 된다. 얼마나 작은 글씨인지 좁쌀보다도 잘다. 타이핑을 한 편지라도 읽기 어려울 판인데, 하물며 좁쌀 손 글씨 필기체는 도무지 읽을 수조차 없다.
나는 또다시 이 깨알 영문 편지를 들고 연대 영문과 남자를 찾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 남자 왈, “실제 안 보았으니까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편지로 봐서는 아마 진실하고 착한 남자인 듯합니다.” “음. 그래요.”(나 변경숙의 반응) 그런데 정말 재미있는 것은(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그 남자도 그 영어 편지를 제대로 해석 못 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도 그때 나는 왠지 모르게 영문과 남자의 낯모르는 외국 남자의 인성에 대한 해석을 그만 믿어버렸고, 실낱같은 호기심(?)마저 갖게 되었던 것이니, 이야말로 로이와 내가 하나가 될 운명이 그때부터 시작된 것이 아닐까? 참으로 오묘한 하늘의 조화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다시 그에게서 두 번째 편지가 왔다. 15년간 키우던 개가 늙어서 죽었고, 너무나 슬퍼서 며칠간 울었다 한다(반려견이란 개념조차 듣기 어려웠던). 나는 개가 죽었다고 우는 남자 이야기를 그때 처음으로 들어본 것이다. 왠지 불쌍한 생각까지 들었다. 그래서인지 송 선장에게 그동안 궁금했던 그의 나이를 물어보았다.
사진으로는 ‘아마 30대 초반?’으로 보였는데, 아니? 이게 웬일! 그의 나이는 48세. 낼모레면 곧 50줄이 되는 남자란다. 바로 우리 엄마와 동갑내기인 것이다(나중에 알고 보니, 다행히 생일은 우리 엄마가 몇 달 앞이었다).
놀란 것은 나뿐이 아니었고, 송 선장과 순자는 더 많이 놀랐다. “이렇게 나이가 많을 줄이야? 정말 미안하다!”라고 하면서 여자 찾아주는 것 일체를 모두 없던 일로 하자고 강력하게 말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나는 뜬금없이 혼잣속으로 자문자답을 한다.(“아니, 언제는 그렇게 좋은 남자라더니… 모든 것을 다 갖춘 훌륭한 남자라고 치켜세울 때는 언제고, 딱 나이 하나 많다고 그렇게 사람을 매도하냐? 정말 좋은 사람인데 나이만 많은 게 걸림돌이라면 나이는 내가 감수할 수도 있지 않나?”) 그냥 뭔지 모를 오기 혹은 반발심(?)이 슬금슬금 올라옴을 느꼈다.
반대를 무릅쓰고 결행한 나의 운명적 결혼
결국, 송 선장과 주변 사람들에게 조언을 듣고 싶어 의견을 물으니, 다들 내가 정상이 아니라고 말린다. 100% 실패하는 국제결혼이 될 거라며 정신 차리라고 충고한다. 심지어 서울의 내 친구 남편들까지도 왜 서양 남자랑 결혼하려고 하냐며 부랴부랴 수소문해서 괜찮다는 신랑 후보들을 소개하며 중매를 서기도 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너무나 많은 반대에 부딪히다 보니, 오히려 나에게는 이상한 오기가 생겼다. “만에 하나 나의 미래가 불행해진다 해도 나는 송 선장이나 그 어느 누구에게도 책임 전가는 하지 않겠다. 모든 것은 내가 책임지겠다.” “정말 사람들의 우려대로 내가 실패한다면, 그 나라는 바다가 많은 나라라고 들었으니 그냥 물에 빠져 죽고 말지.”
이렇게 생각한 나는 모든 것을 내 생각대로 차근차근 진행해 나갔다. 많은 사람이 그때에도 지금도 우리의 결혼에 대해 궁금해한다. 여러 번 반복해 설명을 해주어도그들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하긴 내가 결혼 결정을 하기 전에 그의 얼굴도 실제로 본 적이 없다. 나이도 20년 연상, 나의 친정 엄마와 동갑인 외국 남자. 게다가 그 외국은 흔히 알고 있는 미국이나 영국도 아닌 뉴질랜드라는데…
도대체 한국 지도에 이름조차도 나와 있지 않은 뉴질랜드! 하와이 근처에 있는 나라인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한 일일 것이다. 돌아보면, 1970년대 한국에서 국제결혼이란 매우 극소수의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그 무렵 내가 한국을 떠나야 할 만한 개인적인 이유도 전혀 없었다.
대학을 졸업한 후 육영 재단에서 운영하는 ‘어깨동무’, ‘꿈나라’ 월간 잡지사에서 편집기자로 몇 년간 근무하였다. 그 후 마산으로 내려가서 부동산 일을 열심히 하면서 500평의 땅을 사 놓았고, 그곳에 곧 시범주택을 짓기로 했기에 참으로 야심 찬 계획을 실행하는데 여념이 없고 바쁜 나날들이었다. 그러던 내가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 결혼 결정을 하고 한국을 떠났느냐고 지인들은 나에게 물었다.
나는 가만히 내 마음을 들여다보았다. 그를 좋아하느냐고? 아니다! 좋아하는 것도 아니다. 더구나 사랑의 감정은 더욱 아니었다. 그렇다고 돈을 바란 적도 없다. 물론 결혼 시 보석을 바란 적도 없다. 그럼 그렇게 급하게 결혼을 결정한 내 마음은 뭐였을까? 나 자신도 모르겠다. 그저 이게 운명이라는 것이 아닐까? 아니면 인간의 꾀를 넘어서는 절대자의 절묘한 조화가 아닌가 생각한다.
아무튼 이런저런 곡절을 겪은 후, 1980년 5월 로이 윌슨은 신부를 맞으려 김포공항을 통해 한국 땅에 발을 디디게 되었고, 며칠 후 변경숙은 서울에서 결혼을 하고 로이 윌슨과 함께 뉴질랜드 웰링턴으로 왔다.
예비 신랑 상견례 – 고난의 하루
첫 만남: 오케이, 결혼합시다!
우리는 결혼 전에 서로의 얼굴을 본 적이 한 번도 없다. 편지만 세 번 오고 갔다. 나만 좋다면 그는 나의 결정에 따르겠다고 했다. “오케이, 결혼합시다.” 그렇게 1980년 2월, 대사관을 통해 결혼 서류를 진행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극구 반대하던 송 선장도 뉴질랜드 조업을 마치고 한국으로 귀국해 로이와 나의 결혼을 거들었다.
로이가 서울에 도착하는 날, 엄마와 아버지, 여동생, 나, 그리고 송 선장이 함께 김포공항으로 나갔다. ‘어떻게 생긴 남자일까?’ 너무나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리던 중, 얼마나 기다렸을까? 사진으로만 보았던 키 큰 서양 남자가 걸어 나오는 것이었다. 송 선장이 멋쩍어하는 우리에게 그 를 소개했다.
“Hello, my name is Roy Wilson.”
“Hello, my name is 변경숙, welcome to Korea.”
짧게 인사를 나누고 나니 그다음에 더할 말이 없다. 우리 부모님은 그냥 목례만 한다. 무슨 말을 해야 하나? 소리 없이 쑥스러운 미소만…..키가 작은 엄마는 그를 올려다보며, 나름 장모다운 촉으로 이리저리 예비 신랑감을 재보는 것 같다(아마도 그녀의 궁금증은?). “왜 저 사람은 코가 저리도 클까? 어째 서양 나라에서 온 사람이 비니루 가방을 메고 왔는가? 적어도 가죽 가방을 들어야 하는디…. 싸구려 가방 같네.”
비빔 냉면과 찰떡이 고문이었나?
어느덧 점심때가 되었다. 서로 낯설고 어색한 분위기도 삭힐 겸 식당으로 향한다. 별미 음식을 대접한다고 냉면집을 찾았다. 손님이 바글바글한 게 맛있게 하는 식당인가 보다. 빨간 고추장 양념에 무쳐진 냉면 생각에 나는 벌써 군침이 돈다. 그리고 그 식당은 의자식이 아니고 온돌 좌식이었다. “무엇을 드시겠냐?” 송 선장이 그에게 물으니, “잘 모르니까 알아서 시켜달라”고 하는 모양이다. 우리 식대로 그냥 모두 평양식 비빔냉면을 시켰다. 쫄깃쫄깃한 면발, 겨자와 고추장 양념이 어우러진 맵싸한 비빔냉면을! 이리저리 손짓을 해가며 어서 드시라고 열심히 권하는 엄마.
로이에게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먹어보는 음식이었을 텐데…… 훗날 그의 회고담에 의하면, 그날 그 냉면 먹는 시간이 너무나도 힘들었다고 한다. 생전 처음 경험하는 젓가락질! 냉면을 말아 올려 집는 것도 힘들었고, 어느 시점에서 면발의 길이를 입으로 잘라도 되는지(서양식 knife도 아니고, 가위를 사용할 수도 없고), 방바닥에 앉아 먹는 것도 처음이라 다리가 너무나도 아파서 쥐가 날 지경이었다 한다.
더구나 매운 고추장과 겨자 양념에 땀방울이 범벅되었지만, 미래의 장인 장모 앞에서 평가받는 상황이라 싫은 내색도 못 하고 극도의 초긴장을 했었다고 한다. 아마 그때 그 시간이 로이에게는 고문당하는 수준이었을 것인데, 우리는 전혀 그의 고충을 짐작도 할 수가 없었다. 그때까지 우리 가족뿐 아니라 나도 서양 사람들의 관습이나 음식 문화에 아는 바가 전혀 없었다. 단지 우리가 하라는 대로 그가 고분고분 잘 따라온다고만 생각했고, 착한 사람처럼 보였던 것이니 입장에 따라 생각도 너무 달랐었던 시간이다.
(엄마의 혼잣말) “쯧쯧쯧, 저런 저런, 어째 어른이 저렇게 흘리면서 먹냐? 턱에다 고추장 양념을 다 묻히고 면도 막 흘리네. 서양 사람이라 매운 거 잘 못 먹나 보다. 세상에 저 땀방울 좀 봐라. 에고 떡 좀 시켜주자. 매운 것 좀 가셔지게. 냉면 그만 흘리고 이 맛있는 찰떡 좀 먹어 봐 얼마나 맛있다고.” 찰떡이 왔다. 장모가 될 어른이 권하니 거절할 수도 없고 로이는 아무 말 없이 떡을 받아 들었다.
송 선장이 쌀로 만든 맛있는 거라고 짧게만 설명해 준다. “떡을 영어로 뭐라고 번역하나?” 통역 준비도 없었다. ‘어? 이건 또 뭐야?’ 로이가 태어나서 처음 보는 음식이었단다. 한입 베어 물긴 하였지만 추잉검(Chewing gum, 껌)도 아닌 것이 철떡철떡 입천장에 들러붙는다. ‘떡이란 음식은 언제쯤 삼켜야 하는지? Wrong time에 넘기다 목에 걸려서 막히기라도 하면 어떡하지?’ 심히 염려스러웠단다.
우리는 그가 이렇게 힘든 고문의 시간을 겪고 있다는 걸 꿈에도 몰랐다. 어릴 적에 읽었던 이솝의 동화 “여우와 두루미”의 스토리가 생각난다. 서로 입 모양이 다른 여우와 두루미는 상대방을 배려하지 않고 자신이 먹기 편한 그릇으로 음식을 내어놓고 결국 상대방은 음식을 먹지 못하고 불편함을 겪는다는 스토리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