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한국에서 결혼을 하고 홍콩을 거처 싱가포르에 머물다 며칠 후 뉴질랜드라는 나라에 도착했다. 낯설고 물설은 나라! 지구 땅덩어리 남쪽 끝에 있다는 섬나라 뉴질랜드에 드디어 도착하였다.
새신랑 로이가 살고 있다는 뉴질랜드의 수도 웰링턴의 첫인상은 ‘하늘이 참 푸르고 잔디가 초록색이구나’하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바람이 몹시 차가웠다. 그때까지 외국에 가본 적이 없어서 외국의 하늘도, 잔디도 한국과 똑같은 색깔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한국과 똑같은 자연의 색깔이 오히려 신기하게 보인 것이다. ‘조용하고 한적한 시골분위기에 뉴질랜드라는 나라도 별게 아니구나’ 쉽게 생각되었다.
이튿날 로이는 나에게 함께 웰링턴 한국 대사관에 가야 하는데 한국 사람이니 한복을 입으라고 했다(훗날, 대사관의 영사님 왈…. 한복 입고 재외국민 신고하러 온 것이 뜻밖이었다 했다). 그 다음 날에는 그의 부모님께 인사하러 가게 되었다. ‘처음 만나면 어떻게 인사를 하나? 무슨 선물을 갖고 가나?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기대 반, 호기심 반, 불안한 마음 반…. 잠을 설쳤다.
로이 윌슨, 그러니까 남편이 된 사람(남편이란 단어가 너무나도 낯설었다)과 아침 일찍 웰링턴에서 출발하여 온종일 차를 타고 도착한 그곳 뉴플리마우스는 조그만 도시였는데, 마운트 에그몬튼의 경관만큼이나 매우 유명한 곳이란다. 드디어 도착한 그곳에 호호 할머니, 할아버지가 우리를 맞이한다.
한복 입고 큰 절을!
처음 내 눈에 비친 그 서양 노인들은 꼭 동화책 속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완전 은백색의 머릿결을 가진 할머니 루시 윌슨! 백발의 할아버지는 오스왈드 윌슨! 그분들이 그러니까 나의 시어머니, 시아버지다. 그런데 그분들이 내게는 시할머니, 시할아버지로 보였다.
이날도 내게 한복을 입으라고 했다. 그리하여 몇 벌 해온 한복 중에서 새색시가 입는 색깔 빨간 치마에 초록색 저고리를 골랐고, 로이도 우리 엄마가 해준 파란색의 한복을 입었다. 시할머니…. 아니, 시어머니는 차를 끓이고 있고, 시아버지는 벽난로에 장작불을 지피고 계셨는데, 우리는 두 분에게 한국식 큰 절을 올렸다. 아무도 우리에게 그렇게 하라고 한적은 없었으나 예의상 그래야만 될 것 같았다. 시부모님도 한국식 큰절을 처음 받아 보시는 듯 어리둥절해하셨다.
친정 엄마가 시댁에 선물 하라고 챙겨 주신 한국식 홈드레스 몇 벌과 고향 금산에서 공수해온 5년근 인삼을 내놓았다. 동그랗게 뜬 그분들의 눈은 생전 처음 보는 동양인 며느리인 나의 모습을 신기해하는 것 같았다.
하루 삼시 세끼의 밥상은 모두 시어머니가 차리신다. 시아버지는 주로 신문을 읽고 계신다. 그러니까 시아버지에게 부엌 근처는 일체 그의 영역 밖인 것 같았다. 밥상 차리는 순서는 테이블보를 깔고, 한가운데 꼭 꽃을 갖다 놓는다. 그리고 그녀가 손수 만든 스콘, 무슨 빵, 케이크, 버터, 거의 밀가루로 만든 음식이다.
유일하게 내가 먹을 수 있는 음식은 오직 삶은 감자뿐이다. 감자는 우리 엄마가 어릴 때 많이 쪄준 그 맛과 같다. 감자만 먹고 이내 포크를 내려 놓는 나를 그들은 이해하지 못한다(물론 지금 같으면 그러한 서양 음식도 다 먹을 수 있을 텐데….).
삼 일째 되는 날, 신랑은 우리가 가지고 간 쌀을 냄비에 앉혀 익혔다. 이것은 한국인의 주식이라고 설명을 하며 그들에게 권한다. 시어머니는 일언지하에 NO! 쌀을 본 적도, 밥을 먹어본 적도 없다고 딱 거절한다. 시아버지는 짐짓 용기를 내어 한 숟갈을 드시고 갸우뚱 신기해한다.
나 또한 신랑이 요리한 안남미로 지은 흰밥을 먹기가 참 힘들었다. 무엇인가 한국식 반찬이 있어야 먹을 텐데… 아무것도 곁들여 먹을 게 없었다(소금과 후추 외에는). 그는 자기 엄마의 음식을 맛있다고 다 먹고 난 뒤 이 쌀밥에 우유와 설탕을 섞어 맛있다고 먹는다. 그러니까 이 음식이 디저트라고 한다(요즘 말로 하면 rice pudding).
이웃 할머니들과 인형 신부의 상견례
아침 식사를 마친 후 시부모님과 같이 동네 산책하러 나갔다. 그 동네에는 아름다운 겨울 동백꽃이 만발하여 참으로 아름다운 산책로였다. 하지만 30분만 지나면 이내 배가 고파 힘이 없어 집에 들어온다. 오전 산책에서 돌아오고 나니 웬 서양 할머니 다섯 분이 와 계셨다. 아마 시어머니와 동네에서 친분이 있는 분들 같다. 인사를 시키시니 “Hello, good morning!” 하고 몇 번 미소 짓고 나면 그들과의 대화는 이어지지 않는다.
쪼르르 다섯 명이 같이 오는 그 할머니들은 이튿날도, 또 다음 날도 왔다. 그때까지도 나는 그냥 매일 그분들의 일상생활이리라 생각했다. 훗날 알게 된 것은 그 할머니들이 특별히 나를 구경하러 왔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태어난 이후 단 한 번도 가까이서 동양인을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눈에 비친 경숙은 눈도, 코도, 키도 모든 게 작아 마치 ‘인형 같은 사람’으로 보였다는 말!(하긴 그때 40kg였으니 지금보다 더 작을 때) 어른인지? 틴에이저 아이인지 그러니까 사람 인형?
1960년대 초 내가 초등학교 시절 고향 금산에 살 때의 기억이 떠오른다. 한 미국 남자가 금산에 나타났다. 금산 사람들은 처음으로 미국 사람을 가까이서 보게 된 것인데, 그 남자는 키가 훤칠하고 파란 눈을 가졌었다. 그가 우리 집 앞을 지나갈 때 동네 짓궂은 남자애들 다섯 명이 졸졸 따라다니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졸졸졸… 나는 용기가 없어서 차마 남자애들을 따라가지도 못하고 힐끔힐끔 곁눈질하며 홈쳐봤다. 처음 보는 서양 남자가 그렇게도 신기 할 수가 없었다(그 서양인이 평화봉사단 선교사였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시어머니 루시와 시아버지 오스왈드 집에 쪼르르 같이 오던 동네 서양 할머니 다섯 분… 금산에서 미국 남자 뒤를 졸졸졸 따라가던 boy 다섯 명…. 왠지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새 신랑이 차려주는 밥상 – 우유와 설탕에 말은 밥
한국에서 결혼식을 마친 로이와 나는 단수여권 비자를 받자마자 홍콩에 며칠 머무르다 싱가포르를 거쳐 웰링턴에 신혼살림을 차렸다. 아니 신혼 살림을 차렸다기보다는 혼자 살던 노총각의 집에 새 신부가 갈아입을 옷 몇 벌 들고 들어온 것이다. 깔끔하게 잘 정돈된 그의 집을 보고 노총각이라는 거부감 없이 매우 신선한 느낌과 좋은 첫인상을 받았다.
식사 끼니마다 어떻게 무슨 준비를 해야 할지? 아무것도 몰랐고, 미리 배우지도 못했던 나는 부엌(아니 다이닝 룸)에 들어서면 종종 우두커니 서 있기가 일쑤였다. “무얼 먹겠냐?”고 그가 물어보아도 딱히 뭐라고 말하기가 어려워서 그냥 ‘anything(아무거나요….)’ 단답형으로 대꾸하였다. 물끄러미 바라보던 로이는 냉동고에서 꽁꽁 얼린 식빵을 꺼내 토스터를 만들고 버터, 마멀레이드 잼을 발라서 내게 권했다. 얼린 빵을 구워 먹는 개념이 없던 나로선 거의 ‘노땡큐’로 응답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 그가 25kg 짜리 쌀 한 포대를 사왔다. 한국인의 주식이 쌀이란 것을 알았다고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지금처럼 흔한 전기밥솥이 아닌 주로 연탄불에 밥을 하던 시절에 한국을 떠났기에) 나는 가스 스토브 사용법도 몰랐다. 그러니 로이가 퇴근 후 주로 식사 준비를 하곤 했다.
쌀을 씻어 냄비에 넣고 가장 약한 화력 1번에 놓고 끓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센 불에 쌀을 익히고 다 된 후 뜸을 들인다는 개념을 모르는 신랑이니 정성 들여 해준 밥이지만 찰진 윤기도 없고 그냥 풀풀 날리는 이상한 밥이 되곤 했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은 한국인들이 먹는 Short grain Rice가 아니고 동남아시아인들이 먹는 Long grain Rice였던 것이 밥맛이 없었던 이유 중의 하나이기도 하였다.
조용히 그가 밥상을 차린다. 윤기 없이 풀풀 날리는 하얀 밥과 우유, 반찬으로 내놓은 설탕, 식빵, 버터, 잼… 아무리 봐도 밥상에서 내가 먹고 싶은 반찬을 찾기가 어려웠지만, 그의 성의를 봐서 “먹을 게 하나도 없다”는 말도 하기가 어려웠다. 그는 자신이 먼저 하얀 밥에 우유와 설탕을 섞어 맛있다고 먹었다.
식사를 하고 나면 언제나 English cup of tea를 만들어 머그컵 같은 큰 잔에 가득 부어주고 우유 한 두 방울 떨어뜨려 준다. 이 또한 얼마나 맛이 없는 영국식 홍차인지 결국 나는 한 모금 맛보고 슬그머니 버리곤 했다. 이런 차를 두고 가끔 한국 선원들이 하는 표현으로, “금붕어가 홍차 잔에 빠져 죽을 일 있습니까?”하는 말이 있다. 뉴질랜드 키위들은 전혀 이해하기 어려운 한국인들만의 유머라고나 할까?
매일 그는 새벽 5시에 일어나 스스로 아침 식사를 하고 빨래까지 해서 널고 출근을 하면서, 나에게는 늘 “더 자라! 푹 자라”고 말했다. 그날도 나는 할 일도 없으니 느지막히 잠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오늘은 또 무슨 꽃이 피었을까? 어제는 보라색, 그저께는 노란색, 집채 만한 레몬 나무에 수백 개의 레몬이 주렁주렁 달려 있다. 레몬이 왜 좋은지? 어떻게 활용하는지? 전혀 알 수 없던 나로선 그냥 수북이 떨어진 레몬을 구경만 하였는데, 가끔 동네 사람들은 우리 집에 와서 레몬을 따갔다. ‘Thank you! Lovely!’를 연발하면서….
할 일도 없이 심심하던 차에 정원에 나가보았는데 그날따라 새하얀 무덤처럼 수북이 쌓여 있는 물체를 발견하게 되었다. 가까이 가서 살펴보니 그것은 바로 롱그레인 쌀 25kg 한 포대를 큰 통에 익힌 후 정원에 쏟아 놓고 남편이 출근한 것이었다. 몇 번이나 그가 나를 위하여 그 쌀로 밥을 해주었지만 먹지 않는 것을 눈치챈 것이다.
어디서 날아왔는지 수백 마리? 새들이 날아와서 큰 잔칫상을 받은 것 같이 찍찍 짹짹! 얼마나 맛있게 들 먹는지? 새들은 저렇게 맛있게 먹어대는데 나는 왜 한 공기, 아니 몇 숟갈도 먹지 못했을까? 김치 한 조각이나 뭐 짭짤한 한국식 밑반찬 한 가지라도 있었더라면…. 풀풀 날리는 안남미 쌀밥이라도 조금은 먹었을 텐데….
그 밥에 우유와 설탕을 넣어서는 도저히 먹을 수 없었던 나의 상황을 새신랑은 당연히 몰랐었고, 나도 그런 마음을 전달할 지혜도 용기 있게 해결할 방법도 몰랐던 시절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