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스토이의『부활 1, 2』

‘부활’이란 먼저 죽음이 있고 그 다음 순서를 생각하는 개념 아닐까? 하지만 톨스토이의 소설『부활 1, 2』를 읽어보면, 부활을 암시할 만한 죽음을 찾을 수가 없다. 그렇다면 톨스토이의『부활』은 또 다른 의미일까? 이 소설은 톨스토이의 마지막 작품이다. 작가가 나이가 들면서 자기 인생 전체를 종합선물처럼 정리한 소설이다. 과연 톨스토이는『부활 1, 2』를 통해 독자에게 무엇을 남기려고 했을 지 궁금하다.

19세기 당시 러시아 귀족들은 자기밖에 몰랐다 다른 이들의 상황을 전혀 살피지 않았다
이 소설에서 러시아 귀족들은 독어, 프랑스어, 영어, 러시아 등 다양한 언어를 구사했다. 특별히 귀족들끼리 이야기할 때는 다른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도록 프랑스어로 이야기했다. 그것은 자기네들의 잘난 척하려는 행동이었다. 마치 명품 백을 들고 다니는 사람의 심리와 같다고나 할까. 하층민들이 생존문제로 죽느냐 사느냐 힘들어 할 때 귀족들은 마냥 즐겼다.

러시아 귀족인 네흘류도프는 달랐다
소설의 주인공 네흘류도프는 러시아의 귀족 출신이었다. 네흘류도프는 유산으로 받은 땅이 많은 부자였다. 젊은 시절 네흘류도프는 육체적인 충동에 사로잡혀 마슬로바를 범했다. 그때 이후로 시간이 꽤 지난 어느 날, 네흘류도프가 법정의 배심원으로 출석했다. 거기서 마슬로바를 만났다. 그녀의 인생은 순탄하지 않았다. 매춘부로 살아야 했고 심지어 살인사건에 연루되어 법정에 서게 되었다. 배심원이었던 네흘류도프는 마슬로바에게 어떠한 도움도 주지 못했다. 결국 마슬로바는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살이를 해야만 했다.


그 후 네흘류도프는 과거에 마슬로바의 인생을 망가뜨렸다는 죄책감에 시달리게 되었고 많이 힘들어했다. 그 이유는 자신의 영혼을 청소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양심에 찔렸던 네흘류도프는 고민 끝에 마슬로바와 결혼을 결심했다. 그녀와 결혼해서 그녀를 책임지고 싶었다. 하지만 마슬로바는 그 결혼을 거절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흘류도프는 그녀를 지속적으로 감옥에서 석방시키려고 애썼다. 게다가 그녀의 동료 죄수들도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작가는 자기가 살아온 세상을 소설로 쓴다 – 러시아 사회의 민낯을 파헤치다
톨스토이는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자기가 선택한 길에 대한 확신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부활 1, 2』에서 선과 악이 나뉘듯이, 소설의 캐릭터들을 두 그룹으로 나눴다. 즉, 법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던 힘없는 하류층과 귀족들로 대변되는 상류층이었다. 농민들은 대를 이어서 가난했다. 농사지을 땅도 없어 고통을 겪었다. 이들 중에는 무고하게 감옥에 잡혀간 불쌍한 사람들도 많았다. 이들은 법을 몰랐고, 감옥에 가라고 하면 저항도 못해보고 들어가야만 했다. 반면, 귀족들은 하류층 사람들과 달리 풍요롭게 살았다. 이들은 늘 연애하고 파티하기 바쁜데, 농민들의 삶은 고달픔 그 자체였다.


사람들은 19세기 러시아의 사회문제를 능력 없는 ‘개인의 무능함 탓’으로 돌렸다. 하지만 톨스토이는 달랐다. 톨스토이는 하류층의 고단함과 가난함은 사회의 ‘그늘 탓’이라고, 상류층 귀족들이 하층민들의 삶을 공감하지 못한 데서 그 이유에서 찾았다. 소설 속 등장인물이 약 110명이 등장하는데 그 이유는 톨스토이가 다양한 캐릭터로 러시아 사회의 모순을 해부하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한 사람의 변화가 사회를 변화시킨다
네흘류도프처럼 회심이 제대로 일어나면, 그 인생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난다. 마치 예수님을 만난 후 삭개오가 변한 것처럼 톨스토이는 네흘류도프의 마음에 일어난 지각 변동을 이야기로 풀어낸다. 톨스토이는 네흘류도프의 변화를 이야기하면서 러시아가 바뀌기를 기대했을 것이다. 네흘류도프 한 사람이 변화되면, 점차 그를 둘러싼 사회도 변하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톨스토이의‘부활’은‘희망’이었다
‘아무리 황량해도 봄은 온다’는 것이다. 여기에 희망이 있다. 소설의 첫 단락은 이렇게 시작한다. “몇 십만의 인간이 한 곳에 모여 자그마한 땅을 불모지로 만들려고 갖은 애를 썼어도, 그 땅에 아무것도 자라지 못하게 온통 돌을 깔아버렸어도, 그곳에 싹트는 풀을 모두 뽑아 없앴어도, 검은 석탄과 석유로 그슬려 놓았어도, 나무를 베어 쓰러뜨리고 동물과 새들을 모두 쫓아냈어도, 봄은 역시 이곳 도시에도 찾아 들었다. 따스한 태양의 입김은 뿌리째 뽑힌 곳이 아니라면 어디에서고 만물을 소생시켜, 가로수 길의 잔디밭은 물론 도로의 포석 틈새에서도 푸른 봄빛의 싹이 돋고, 자작나무와 포플러와 구름나무도 봄 내음 풍기는 촉촉하고 윤기 나는 잎을 내밀고, 피나무도 이제 막 싹을 틔우고 있었다.”

아주 모질고 힘든 시기일지라도 결국 봄이 온다. 봄이 오는 것은 우리가 인간다움을 지킬 때이다. 톨스토이는 네흘류도프와 마슬로바가 변화하는 이야기를 통해 봄을 설명했다. 모든 것이 다 죽은 것 같고, 모든 것이 다 끝난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톨스토이는 소설의 맨 마지막 부분에서 복음서의 산상수훈을 이야기하며 이 희망을 확증했다.
이 소설은 부활을 경험하는 사람과 경험하지 못한 사람을 보여줬다. 귀족들의 삶은 부활하지 못하는 삶이었다. 왜냐하면 이들은 자기만 알아보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하류층 사람들이 왜 고통받고 힘들게 살아가야만 했는지 그 상황을 읽어내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부활하는 삶도 있다. 이는 남을 바라보고 이타적인 삶을 사는 것이다. 작가는 네흘류도프를 통해 이 부분을 상징적으로 설명했다.

사람이 바뀝니까 안 바뀝니까?
우리는 ‘사람이 잘 안 바뀐다’고 생각하기 쉽다. 소설의 주인공, 네흘류도프와 마슬로바가 변화하는 과정을 통해서 인간은 바뀔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 인간은 바뀔 수 있다. 이 소설은 한 인간이 바뀌면 결국 인간들이 모여 사는 사회도 바뀔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주었다.

나는 어떤 사람이며,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이 소설은 독자에게 “나는 누구이며,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묻는다. 나는 하나님의 피조물이다. 지배욕과 권력 욕망에 사로잡혀 살 것이 아니라 세상에 베푸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을까? 이 소설이 인상적인 것은 마지막 부분에서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을 인용한다. 19세기 당시 러시아 사회는 모순투성이었다. 이것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작가는 성경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것이 신앙의 봄이고 우리의 희망인 것이다.


성탄절이 다가오고 있다. 우리는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아기 예수님을 기다린다. 이는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고, 나하고 거리가 멀게 느껴지는, 나와 상관없는 예수님이 아니다. 친히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은 인간의 고통과 아픔을 공감하고 나와 동행해주시는 하나님이시다. 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곧 나의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은 내 주변을 살피고, 내 이웃이 처한 상황을 읽어내고 함께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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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지겸
감리교신학대학교 신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목회트렌드 2024』및『다음세대 셧다운』공저. 오클랜드감리교회 담임목사. 하나님이 사람과 소통하시려고 성육신 하신 것처럼, 기독교인도 세상과 소통할 통로가 필요하기에 인문학을 통해 세상과 만나는 이야기를 나누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