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를 보니 9시 15분이었다. 나는 서둘러 외출 준비를 했다. 10시까지 타카푸나에 있는 피지오(physiotherapy)에 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당신 무슨 애인이라도 만나러 가시는 것 같아요.”하며 아내가 나의 서두르는 모습을 보고 웃는 얼굴로 말을 건넸다. “어, 애인은 무슨. 늦지 않게 가려고 그러지.”하며 나는 현관문을 열었다. “안녕히 다녀오세요.” 하며 문밖까지 따라 나오는 아내에게 손을 흔들어 답하고 차에 올랐다.
오늘이 두 번째로 피지오에 가는 날이다. 작년에 오른쪽 어깨가 불편하기 시작해 침도 맞아보았고 또 지난 가을 한국에 갔을 때 정형외과에 가서 연골 주사도 맞았지만 그래도 아직 불편해서 가정의에게 상의를 한 결과 물리치료를 받아보면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해서 지난주에 처음 피지오에 갔었다.
타카푸나에 있는 피지오에 시술을 받으러 간 첫날 나를 맞아준 물리치료사는 의외로 남자였다. 나이는 들었지만 아직도 사내의 근성이 남아있어서 속으로는 기왕이면 젊고 예쁜 여자 물리치료사에게 치료를 받았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내 앞에 나타난 물리치료사는 대머리가 빛나는 우람한 체격의 젊은 남자였다. “미스터 김!” 하며 악수를 청하는 그에게 엉겁결에 손을 내밀자 엄청난 힘으로 내 손을 움켜잡는 그를 바라보며 나는 솔직히 도망 나오고 싶었다.
물리치료란 사람을 엎어놓고 제쳐놓고 이곳저곳 몸을 주무르는 것인데 이 무지막지한 친구가 나를 주물러대면 그건 치료가 아니라 고문일 것이라고 지레 겁을 먹었다.
우람한 체격의 대머리 물리치료사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제이(Jay)라고 자기소개를 한 그 사내 물리치료사는 의외로 자상한 어조로 내가 어디가 불편한지 언제부터 그랬는지 그동안 어떤 치료를 받았는지 소상히 묻기 시작했다. 친절한 그의 태도에 나는 조금씩 마음이 놓이기 시작했는데 내가 한국 사람이란 것을 알자 그는 자기가 태권도를 배웠다며 ‘안녕하세요’ 하고 우리말로 다시 인사를 했다.
그러면서 다시 내 어깨가 아픈 이유와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을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을 최대한으로 동원하여 자세히 알려주었다. 때로 전문적인 의학 용어를 내가 잘 이해하지 못해 물어보면 쉽게 풀어서 설명해 주며 시종 웃는 얼굴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었다.
그렇게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나는 그와 나 사이에 시술자와 피시술자의 관계 이상의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신뢰가 쌓이는 것을 느꼈다. 그랬기에 이야기가 끝나고 그가 나보고 윗도리를 벗고 시술대 위에 누우라고 했을 때도 별 거부감 없이 윗도리를 벗은 내 맨몸을 그에게 맡길 수가 있었다.
시술을 시작하기 전에 그는 엎드려 누워있는 내게 수건들을 포개서 다리와 양어깨 밑에 넣어주면서 머리 높이가 자연스러운가를 물으며 시술대를 조정했다. 조금이라도 편하게 해주려고 애를 쓰는 그의 마음이 느껴졌다. 준비가 끝나자 커다란 수건을 따뜻하게 해 가지고 와서 등 위에 덮은 뒤 서서히 아주 부드럽게 오일을 바른 두 손으로 내 불편한 어깨 부분을 주무르고 쓰다듬고 누르기도 하면서 시술을 시작했다.
뚝배기보다는 장맛이라고 어떻게 이렇게 우락부락하게 생긴 사내의 손이 그렇게도 부드러울 수 있는지 편안한 자세로 엎드린 채 그의 시술을 받으며 나는 속으로 감탄했다. 쉬지 않고 손을 움직이며 그는 이러저런 이야기를 시작했다.
자기의 아들이 타카푸나 그래머에 다니는데 거기엔 한국, 중국, 인도 아이들과 같은 아시아 학생들뿐 아니라 러시아, 네덜란드, 남아프리카 같은 유럽계 학생들도 같이 섞여 있기에 서로 배우는 것이 많다며 이 아이들이 나중에 크면 서로 친구가 될 터이고, 그러면 인종차별 같은 문제는 자연히 해결될 것이라고 했다. 그는 속삭이듯 조용히 말했지만 긍정적인 그의 말에는 힘이 실려 있었다. 나는 엎드린 채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그는 부지런히 손을 움직이면서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자기는 웰링턴에서 자라난 토박이 키위지만 자기 아내는 캐나다 여자이고 역시 물리치료사라고 했다. 아내도 자기와 같이 이곳 같은 피지오에서 일하며 행복하게 일하고 있다는 말에 덧붙여 얼마 전에는 둘이 같이 인도네시아에 가서 의료봉사를 하고 왔다고 했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물리치료로도 의료봉사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어느덧 나는 부드러운 그의 손 움직임뿐이 아니라 그의 이야기에도 빠져들고 있었다.
제일 존경하는 사람은 루퍼 아버지
그는 스스럼없이 자기 집안 이야기를 했고 자기가 제일 존경하는 사람은 자기 아버지라고 했다. 아버지를 존경할 수 있는 사람은 정말 행복한 아들이라고 내가 말하자 그는 자기 아버지는 루퍼였다고 했다. 루퍼가 무엇이냐고 내가 묻자 그는 루퍼(roofer)란 지붕에 관한 모든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자기 아버지는 공부를 싫어해서 12살 때 학교를 그만두고 할아버지에게 지붕 고치는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고 했다.
자기 집은 4대째 루퍼인데 자기는 그게 싫어서 공부를 했고 물리치료사가 되었다고 했다. 자기 형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루퍼가 되었다고 했다. 어떻게 그렇게 아버지를 존경하느냐고 내가 묻자 그는 자기는 8살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지붕에 올라가서 아버지를 도와드렸다고 했다. 지금 같으면 아동 학대법에 걸렸겠지만 그때는 문제없었다고 했다.
8살밖에 안 된 그였지만 아버지는 즐겨 그를 데리고 지붕에 올라갔고 옆에서 지켜보는 그에게 작업 과정을 잘 지켜보게 하며 설명하여 주었고 또 그가 할 수 있는 잔심부름을 시켜 아버지를 돕도록 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아버지는 어린 아들이 아버지의 일을 도와줬다는 명목으로 1주일에 40불씩 용돈을 주었다고 했다. 아버지와 지붕 위에 같이 올라갈 수 있도록 해주시는 것만도 고마웠는데 용돈까지 주셨고 또 지붕 위에서는 아버지와 같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고 게다가 아버지를 도울 수가 있어서 너무 즐거웠었다고 했다.
중학교에 들어가자 60불씩으로 용돈을 올려주었고 칼리지에 들어가자 80불로 올려주어서 자기는 그 돈을 쓰지 않고 잘 모아두었다가 나중에 AUT(오클랜드 전문대학)에 들어갔을 때 아주 유용하게 사용했다고 했다. “참 좋은 아버지시군요. 그런데 왜 제이는 아버지처럼 루퍼가 되지 않았소?”하고 내가 물으니까 그는 자기는 아버지를 돕는 게 좋았지 아버지가 하는 루퍼의 일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형과 달리 자기는 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지 않았기에 루퍼가 자기한테는 잘 안 맞는 것 같았다고 대답했다. “피를 물려받지 않았다니요?”라고 내가 놀라서 묻자 그는 담담히 자기는 어렸을 때 입양되었다고 말했다. 형이 태어난 뒤에 더 이상 아이가 생기지 않자 애를 좋아하는 그의 아버지가 자기를 입양했다고 말했다. 그렇게 말하는 그의 어조는 지극히 담담했다. 엎드려 있던 나는 그의 얼굴을 볼 수 없었지만 그의 얼굴 표정도 그렇게 담담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입양한 아들을 친아들 이상의 사랑으로 키운 루퍼 아버지, 공부가 적성에 맞지 않아 12살 때 학교를 그만두고 루퍼가 된 아버지지만 아들에게 존경받을 수 있는 아버지, 또한 그 아버지가 친아버지가 아니고 양아버지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 아버지를 사랑하고 존경하고 다른 사람에게 자신 있게 자기는 아버지를 존경한다고 말할 수 있는 양아들.
나는 별안간 나를 쓰다듬고 있는 물리치료사의 손길이 사랑 자체로 느껴졌다. “아직 살아 계신가요?”라고 내가 묻자 그는 “아뇨, 5년 전에 돌아가셨어요,”라고 답했다. 내 어깨를 누르던 그의 손끝에서 힘이 좀 빠지는 듯 느껴졌다. “미안해요”라고 내가 덧붙이자 “아니 괜찮아요”라고 말하며 시술을 계속했다.
부모자식 간에 사랑과 존경이 사라지고 있는 요즈음 세상에 나는 너무도 귀한 이야기를 그날 들었다. 세상의 안목으로 볼 때에는 별볼일 없는 루퍼의 아버지를 존경할 수 있는 아들, 돈도 명예도 없지만 사랑 하나로 입양된 양아들을 키워 낸 아버지. 이 아름다운 부자지간의 사랑을 생각하며, 금수저·흙수저의 웃지 못할 비아냥이 난무하고 있는 한국의 부모 자식 간의 풍조를 생각할 때 그만 부끄러워 얼굴이 후끈 달아올랐다.
그날 피지오를 나오는 나의 발길은 가벼웠다. 다음 주의 약속을 정하며 쳐다본 제이의 얼굴은 너무도 온화해 보였으며 반들반들 빛나는 대머리마저 다정해 보였다. 불과 한 시간 전에 처음 만난 그였지만 한 시간 동안 그의 손끝이 전해준 정성스러운 시술과 그의 입을 통해 나온 사랑의 이야기는 그를 보는 나의 시각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피지오를 나오면서 벌써 나는 다음 주 그와의 만남을 기대하고 있었다.
차창 위로 떠오른 아버지의 모습
그렇기에 오늘 두 번째로 피지오에 가는 길이 이렇게도 상큼하고 또 기다려지기까지 했나 보다. 체격은 우람하지만 목소리는 다정한 그 사내가 오늘은 또 어떤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줄까 하는 기대도 있었다.
집에서 타카푸나의 피지오까지 가는 길이 차로 불과 20분 남짓한 거리였지만 차를 몰고 가는 내내 나는 다정한 친구를 만나러 가는 듯 가슴 속에 잔잔한 파도가 일렁였다. 아버지를 존경하는 아들, 그리고 아들에게 존경받는 아버지. 그 아버지는 어떻게 생겼을까 하고 생각하다 나는 문득 차창 위로 떠오르는 오래전에 돌아가신 내 아버지의 모습을 보았다.
돌아가신 지 삼십 년이 넘었기도 하지만 그래도 이즈음 무심하도록 잊었던 아버지가 생각나며 생전의 그 인자하던 모습이 자꾸만 차창 위로 떠올랐다. 그때 자동차 사고로 갑자기 돌아가셨던 아버지의 마지막을 생각하자 가슴이 아려 왔고 어느덧 피지오 가는 길이 먼 옛날 돌아가신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회상의 길이 되었다. 나는 정신을 차리고 운전대를 꼭 잡고 앞을 똑바로 보았다.
차창에 어린 아버지의 얼굴이 듬뿍 미소를 짓고 계셨다. “아버지, 사랑합니다, 오늘 같은 날 너무 뵙고 싶어요,” 나도 모르게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온 고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