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둘째 주 찬송/7월 넷째 주 찬송

7월 둘째 주 찬송/167장(통157장) 즐겁도다 이 날

십자가 파편 유물을 보며 전례 시를 쓴 포르투나투스
찬송 시 ‘즐겁도다 이 날’(‘Welcome, happy morning’)을 지은 포르투나투스(Venantius Honorius Clementianus Fortunatus, c. 530 – c. 600/609)는 메로빙거 왕조의 라틴 시인이자 찬송가 작가이며 보아티에의 주교로 6세기 가장 유명한 시인입니다.

이탈리아 베네토주 트레비소 근처의 케네다(또는 Duplavis)에서 태어나 라벤나와 밀라노에서 로마 스타일의 고전 교육을 받고 어린 나이에 기독교 신앙으로 개종했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라벤나에서 눈병으로 거의 실명했는데, 투르의 성 마르티노 제단 등불의 기름을 눈에 발라 기적적으로 치유된 후, 투르에 있는 그 성인의 성지로 순례를 떠나 생애의 나머지 시간을 갈리아에서 보냈습니다.

그는 메츠의 메로빙거 궁정 시인이 되어 시기베르트 왕과 브룬힐트 왕비 결혼 축시를 낭송했습니다. 이를 시작으로 샤리베르트 왕(시기베르트의 동생)의 궁정인 파리에도 머물다가 시기베르트의 땅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는 투르와 푸아티에에서 라데군다(Radegund) 왕비를 만나 특별한 우정을 쌓고, 그녀를 기리고 정치 캠페인을 지지하는 시를 썼습니다.


그는 투르의 그레고리 주교의 후원을 받았으며, 그레고리를 변호하는 시를 지었습니다. 그는 비명(碑銘), 찬사, 전원 시, 찬송 시 등 다양한 장르의 시집 11권을 썼습니다. 그는 라데군다 왕비의 권유로 푸아티에에 있는 그녀의 성 크로이 수도원에 들어가 그곳 주교가 되었습니다.

우리 찬송가 167장에 실린 찬송 시 ‘즐겁도다 이 날’은 590년경에 지은 110행의 라틴어 장시 ‘부활절에 복된 감독에게’(‘Ad Felicem Episcopum de Pasche’)에서 발췌된 시(‘Salve, festa dies’)입니다. 이 찬송은 부활주일 입당송 행렬 의식 중에 불립니다.

“즐겁도다. 이날 세세에 할 말, 사망 권세 깨고 하늘이 열려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와서 생명의 주 예수 찬송하도다.
즐겁도다. 이날 세세에 할 말, 사망 권세 깨고 승리하셨네”(167장, 1절)

성공회 성가 126(A)장에 실린 찬송 시(‘Pange lingua gloriosi proelium certaminis’)는 십자가를 읊은 것으로 후에 가톨릭교회 전례의 일부가 된 토마스 아퀴나스의 찬송 시(‘Pange Lingua Gloriosi Corporis Mysterium’)에 영감을 주었으며, 고난주간 저녁 기도에 부르는 찬송 시(‘Vexilla Regis prodeunt’)는 비잔틴 황제 유스티누스 2세가 예수님의 십자가 파편 유물을 라데군다 왕비에게 보낸 것을 기념하여 지은 시입니다.

“구주께서 십자가에 득승하신 영광을
천하 사방 파양하여 찬미하옵나이다.
수난 하사 죽으심은 사망을 이기셨다.”(성 126장 A, 1절)

그의 찬송 시는 부르크너의 모테트(‘Vexilla Regis’)와 니스테트(Knut Nystedt)의 합창곡(‘O Crux Splendidior’) 텍스트로도 유명합니다.

7월 넷째 주 찬송/140장(통130장) 왕 되신 우리 주께

입례 찬송으로 예루살렘 입성 재연한 테오둘프
올리언스의 주교인 데오둘프(Theodulph of Orleans, c.762-c.821)는 스페인 혹은 이탈리아에서 고트족 귀족 가문의 아들로 태어난 작가요, 시인이자 성직자입니다. 그는 피렌체의 수도원장이 되었고, 신성로마제국 황제에 즉위한 샤를마뉴(카를 대제)가 그를 프랑스로 데려왔습니다. 그는 플뢰리 수도원장이 되었으며, 오를레앙의 주교로 임명되어 781년부터 818년까지 엄격하게 통치하고 사람들을 교육하기 위한 학교를 세웠습니다.

그는 카롤링거 르네상스의 핵심 인물로서 샤를마뉴의 신임받는 고문으로 그의 수석 신학자가 되었습니다(샤를마뉴는 800년 교황 레오 3세에게 서로마 황제직을 수여 받고서 교회를 통해 예술, 종교, 문화를 크게 발전시켜 카롤링거 르네상스를 일으켜 유럽의 정체성에 발판을 마련하였기 때문에 ‘유럽의 아버지’로도 불립니다).

테오둘프는 샤를마뉴 치세에 교회가 여러 차례 개혁될 당시 중요한 인물이었으며, 그가 쓴 ‘리브리 캐롤리니’(‘Libri Carolini’)는 성상 숭배에 대한 신학적 논쟁 내용으로 표상 예술에 대한 태도를 잘 나타낸 저서입니다. 황제가 죽은 후, 샤를마뉴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루이 1세 경건왕(778-840) 때 테오둘프는 왕에 대한 음모를 꾸민 혐의로 프랑스 서부에 있는 앙제(Angers)에 투옥되었습니다.

우리 찬송가 140장에 실린 찬송 시 ‘왕 되신 우리 주께’(‘All glory, laud and honor’)는 라틴어 제목의 찬송 시(‘Gloria, laus, et honor’)로서 테오둘프가 감옥에 있는 동안인 820년경에 39연으로 지은 종려주일의 행렬 찬송입니다. 전설에 따르면, 루이 왕이 종려주일 행렬로 감옥 부근을 지나다가 테오둘프가 부르는 찬송가를 듣고 감동하여 그를 풀어주고 이후 종려주일마다 이 찬송을 부르도록 명령했다고 합니다.

찬송 시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노래합니다. 중세교회는 실제로 이 찬송 시로 된 행렬 찬송으로 그리스도의 예루살렘 입성 스토리를 재연했습니다. 사제와 주민들은 나귀에 앉은 예수를 따라 들판에서부터 성문까지 행진했으며, 그들이 성문에 도착했을 때, 어린이 성가대가 “왕 죄신 우리 주께”를 선창하면 군중은 후렴을 불렀습니다. 이때 성문이 열리고 군중은 거리를 찬송하며 교회로 향했습니다.

“왕 되신 우리 주께 다 영광 돌리세
그 옛날 많은 무리 호산나 불렀네
다윗의 자손으로 세상에 오시어 왕 위에 오른 주께 다 영광 돌리세”(140장, 1절)

찬송가 599장 ‘우리의 기도 들어주시옵소서’(‘Christe cunctorum dominator alme’)도 동시대(9세기) 작자미상의 찬송 시입니다.

“우리의 기도 들어 주시옵소서
우리의 찬송 받아 주시옵소서
이 시간 이 땅에 모퉁이 돌 놓으니
주님의 교회라”(599장, 1절)

                                  이 글은 필자가 진행하는 유튜브‘김명엽의 찬송교실’에서 볼 수 있습니다.